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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화 〉 소란스러움은 언제나 적을 불러온다 (53/90)

〈 53화 〉 소란스러움은 언제나 적을 불러온다

* * *

"리에티."

".... 예."

화려한 서재 안 한 남자가 양피지들을 쌓아두고 열심히 읽고 있었지만 전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 아직까지 하고 있는 건가?"

"이건 오늘의 양입니다, 어제 것은 어제 끝내뒀습니다."

반짝이는 대머리의 남자는 두 여인을 데리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지만 리에티의 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시간이 없나?"

".... 후우.."

아빌론이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꺼내자 리에티는 잠시 그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사엘라와..."

"오랜만이야, 교황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네가 통 만나주질 않아서 찾아왔지."

아빌론의 뒤에서 나온 라티엘은 리에티에게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방주인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의자에 앉았다.

".... 예의가 없으신 건 여전하시군요.. 무엇을 믿고 그러십니까?"

리에티가 조금 짜증이 난 듯 그녀를 보았지만 라티엘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손톱을 보았다.

"요새 네가 숲을 정리한다고 나를 너무 써먹잖아? 안 그래도 키메라들에게 기사들은 죽어나가지.. 그나마 쓸만했던 아르웬도 톤 왕국 아니면 헬하임 제국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이 도니까 내가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말이야."

"..... 인원을 충원을 해드릴 테니 돌아가시길.. 사멜라 네가 라티엘님과 함께하거라."

"예."

리에티는 말을 끝마치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일에 몰두하려 했지만 이마에 주름을 만든 라티엘은 그의 책상에 있는 양피지를 모두 엎어버렸다.

"... 무슨 짓입니까?"

"참는 데는 한계가 있는 거 알아?"

"무엇을 말입니까?"

"리에티!!!!"

라티엘이 화를 내며 검을 뽑아들자 아빌론과 사엘라는 검을 들고 그녀의 목을 겨눴지만 라티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가 권력을 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했어! 칠라렌 성국이 그저 조용하게 흘러가길 바랐던 교황의 밑에서 더 있었다면 아마 더 기울었겠지."

".... 칭찬해 주시니 고맙군요."

"그런데!!!!!"

리에티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자신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자 라티엘은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를 하고 조건을 걸었던 네 녀석이다, 교황을 죽이러 네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도 그 무엇도 하지 않고 기사들을 방치했다."

"그것도 감사합니다."

"또한 다른 왕국으로 가는 아르웬조차 말리지 않았어!"

"마치 동생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배다른 내 동생과 같았다."

"....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 왜 조건은 안 지키는 거지?"

"...."

오랜만에 보는 라티엘의 분노에 리에티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고 그 모습에 라티엘의 눈썹은 꿈틀하고 움직였다.

"겨우 그 얘기로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

"당신이 걸었던 조건은 분명.. 그거였죠... 성국의 차기 교황은 제가 맡는 대신 '성녀'의 권위는 더 높인다."

"잘 아는군."

똑똑..

리에티의 말에 라티엘은 이를 갈았지만 이내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라티엘."

".... 리에티.. 네놈이.."

"약속은 지켰습니다."

"네놈이 감히!!!"

라티엘은 당장이라도 리에티의 목을 치려 했지만 순식간에 달려드는 많은 기사들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

라티엘은 검을 뽑아들려 했지만 그들의 힘은 강했다.

"성녀의 권위는 당신이 말한 대로 높아졌습니다."

"으드득.."

"앞으로 '성녀가 아닌' 전 성녀들의 기사들은 엘라님의 호위가 될 겁니다, 저들 또한 '당연히' 약조한 일들이구요."

"애써 키워놨더니 너희들이 내 뒤통수를 치는구나!"

실력 좋은 자신의 기사단에게 몸을 눌린 라티엘은 검을 들으려 발버둥 쳤지만 그들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는 리에티를 올려다보았다.

"전 성녀 아르웬의 기사단은 그 충성심이 강해 넘어오지 않았지만 당신의 기사단과 마리아, 그리고 그녀의 기사단 또한 모두 엘라님에게 편입되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엘라에게 충성을 바칠까? 또한 내 단장은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다."

"지금 상황을 보시면 아시겠죠 안 그런가 블라인?"

"....!"

라티엘은 자신의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버리고 엘라의 갑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충직한 수하 블라인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죄송합니다 라티엘님, 이 나라의 성녀는 단 한 명이었습니다 저희 또한 성녀가 다섯씩이나 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네놈이 어떻게!!!!"

"끌고 가라."

라티엘이 스물이 넘는 기사들에게 포박당해 끌려나가자 리에티는 그제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떨어진 양피지들을 주웠다.

"리에티님."

"예 사엘라."

"키메라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음."

리에티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을 바라보자 블라인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토벌하세요, 몇 십 년간 방치되어있던 숲은 분명 칠라렌의 부흥에 분명 엄청난 도움이 될 겁니다."

"예."

"사엘라 너도 블라인을 따라가거라."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가자 폭풍 같던 방안은 다시 고요하게 바뀌었고 그 안에는 좋지 않은 표정의 아빌론과 리에티만이 남아있었다.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아빌론 '대장군'?"

".... 없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있으십니까?"

"엘라님에 대해서 조금 얘기를 나눌 수 있겠나?"

아빌론의 말에 리에티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아빌론 또한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단검 하나를 건내주었다.

"이건..?"

"엘라님이 계속 품에 숨기고 계시던걸 가져온 거네."

".... 그 남자 겁니까?"

".... 그래."

리에티는 단검을 잠시 받아들더니 얼굴을 쓸어넘겼고 책상의 서랍 안에 단검을 집어넣었다.

"... 아직도 못 잊으셨다니."

"못 잊을 만도 할걸세, 목숨을 빚진 대다가 그를 사지로 내몰았고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 없으니."

"그러게 진작에 저희의 편이 됐으면 좋았을걸..."

"...."

두 사람의 사이에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리에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라님은 어디 계십니까?"

"엘라님의 정원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고 계시네, 저러다가 건강이 나빠지시진 않을까 걱정이 되네."

"제가 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예."

"여기 자네가 얘기한 기사들의 명단이네."

".... 총 몇 명입니까?"

성녀들의 기사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살육이 벌어졌고 남은 기사들은 아빌론이 건넨 양피지의 안에 들어있었지만 그 종이가 상당히 얇은 것을 보고는 리에티는 한숨을 쉬었다.

"천오백 정도네."

"오백 정도가 거부했군요."

"그래 젊은 기사들이라 옛날 일을 모르지, 그들 데리고 끝까지 마리아와 함께 저항하던 라이칸은 사로잡았네."

".... 세 번째 성녀는?"

"... 아직."

"아직도 못 잡았습니까?"

"... 어쩔 수 없네 상당히 많은 귀족들이 그녀와 연관되어 있어 그리고 그녀는 순순히 기사들을 양도해 주고 원한다면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했네."

"...."

"전쟁밖에 모르던 라티엘과 아르웬, 아무 일에도 엮이지 않으려던 마리아.. 하지만 모든 걸 간파하며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세 번째 성녀는 쉽게 건드릴 수 없어."

"하아...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세요... 정 안되면.."

"...."

"모두 모아 한 번에 칩니다."

"알겠네."

아빌론은 리에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 했지만 열린 방문 앞에 서있는 한 여인은 그들을 보고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똑똑?"

입가에 있는 점에 대비해 붉은 입술과 흰색의 머리카락을 감아올려 멋들어지게 만들어 매력을 뽐내고 있는 그녀는노크하는 척을 하며 들어와 엉망인 방을 훑어보았다.

아빌론과 리에티는 그녀의 모습에 얼어붙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자신의 옆에 있는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나가들 있으세요."

"하지만."

"명령."

"예 세레나님."

조용히 기사들을 뒤로하고 우아한 걸음으로 엉망이 된 방안의 한 가운데 의자를 끌고 와 앉고는 그녀는 리에티를 바라봤다.

"손님을 이렇게 대할 생각?"

".... 죄송합니다."

리에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인에게 손짓했고 하인은 빠르게 차 한 잔을 만들어 그녀에게 내주었다.

"내 얘기를 하던 것 같은데?"

"...."

"난 나가보지 리에티."

"거기."

"...."

"아빌론도 잠깐."

짧은 그녀의 말투에 아빌론의 머리에 힘줄이 올라왔지만 그녀는 어찌 보면 교황 다음가는 성국의 실세였기에 쉽사리 뭐라고 하지 못했다.

"할 말이라도?"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

"날 쳐내겠다?"

"협조하지 않으신다면."

"그럼 내가 묻지."

"예."

"나는 모든 걸 협조했는데 리에티 네가 나를 굳이 죽이거나 아까 끌려나간 언니처럼 날 감금한다면... 어찌 될까?"

리에티가 뻔뻔하게 그녀를 보며 얘기하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그녀는 여유롭게 받아쳤고 빙글 웃었다.

".... 내가 더 협조할 것이 남았나?"

"모든 걸 협조한다는 것이면 성국에 손을 떼는 게 답 아니겠습니까?"

아빌론의 말에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바라봤다.

"아아 안쓰러운 아빌론."

".... 저는 엘라님의 성기사, 당신에게는 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빌론, 계속 얘기하지만 난 모든 걸 '협조'했어."

"...."

"성국에서 손을 뗀다...? 나는 무언가 조종하고 있지 않아, 아! 물론 교황님이 권력을 굳히실 때 나를 써먹긴 했지만.. 음... 내가 과연 이 나라에 손을 뻗고 있을까?"

"무슨 소리를...! 엘라님을 파티장에서 쫓아낸 것도...!"

"내가 아니야."

"..... 아니라고?"

"그래."

아빌론의 분노에도 그녀는 무섭지도 않은지 웃고 있었고 오히려 리에티에게 윙크를 하며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아빌론."

".... 리에티 조금 더 얘기하고.."

"더 이상의 대화는 통하지 않는 것을 못 느끼셨습니까?"

"...."

"이들이 엘라님을 똥통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것만 기억하세요."

"... 알겠네."

아빌론이 결국 방 안에서 나가자 리에티는 잠시 후 찻잔을 깨부수며 그녀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감히.."

"후후.. 본성이 나오는구나 리에티?"

"네년 따위는 내가 지금 한 마디만 해도 사지를 찢어놓을 수 있다."

"한 번 해봐."

"... 뭐?"

리에티의 협박에도 그녀는 전혀 겁을 내지 않고 있었고 내동댕이 치듯 그녀를 던진 리에티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책상을 부쉈다.

"어떻게 알아냈지?"

"내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네?"

"...."

"나도 귀족들과 놀고먹던 것만은 아니야 리에티."

"원하는 것이 뭐지?"

리에티가 그녀에게 짜증 나는 표정으로 묻자 세레나는 세 개의 손가락을 폈다.

"딱 세 가지를 원해."

".... 뭡니까."

"첫 번째 더 이상 나를 건들지 마."

"...."

"두 번째 성국에 있는 마리아와 언니를 건들지 마, 언니가 욕심이 가득해서 꽤나 스트레스 받았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그녀를 계속 막아왔던 것은 나야 잊지는 않았겠지?"

"알고 있습니다."

"아! 특히나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르웬에게 암살을 보낸다거나 그런 짓은 더더욱 하지 말고."

"후우... 성녀를 모두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럼 몸은 멀쩡하게 이 나라에서 살아나갈 수 있게 해줘."

"...."

"세 번째는... 나중으로 미뤄둘게."

세레나의 요구에 리에티는 들어주기 싫은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도 쭉 여유로웠다.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엘라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간다면."

"그러지 않도록 노력할게."

"...."

"그렇게 인상 쓰지마, 네가 그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른 성녀들과 젊은 귀족들을 포섭하게 도와준 나의 노력이 일부분 들어가 있잖아?"

세레나는 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양피지를 던져주었다.

"뭡니까?"

"아직 칠라렌의 다섯 성녀에 찬성하는 귀족들이자 친 교황파."

".... 이것을 저에게 주는 이유는 뭡니까?"

리에티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지만 세레나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앞으로 걸어가며 그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이 성녀를 가장 때려치우고 싶은 게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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