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소란스러움은 언제나 적을 불러온다
* * *
"데브라."
"쉿... 조용."
"... 하지만.."
"인간은 키메라보다 귀가 더 밝아, 만약 찍소리라도 내서 저들이 우리를 본다면 자네 혼자 상대할 건가?"
세 사람은 조용히 한 무리의 기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기사들은 이미 주인을 잃어버린 키메라를 괴롭히듯 검으로 찌르고 있었고 병사들 또한 그 모습을 보며 낄낄댔다.
"저 사람들은.."
"갑옷에 작게 그려진 태양 무늬를 보아하니 칠라렌 성국의 귀족들인가 보군."
".... 칠라렌 사람들입니까?"
칠러웨이는 이제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그들은 무언가 위험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속이 시원하군!"
"그나저나 너무 멀리 온 것 아닌가?"
"뭐.. 톤 왕국의 영토이긴하나... 그 녀석들이 영토를 관리할 정도로 여유롭진 않잖나?"
"그건 그렇지 하하하!"
귀족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크게 웃으며 대화를 하자 기사들은 숲의 주변을 바라보며 키메라가 더 몰려오진 않을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라틴님."
"응?"
"조금 조용히 하시는 것이..."
"뭐!?"
"그... 그게... 크게 대화하시다가 키메라라도 몰려오면..."
기사의 말이 불쾌한 듯 라틴이라 불린 귀족은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귀족은 혀를 차며 그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이봐, 이곳은 키메라가 나타나지만 이미 일루안 후작... 아니 그 배반자가 키메라를 정리해 거의 대부분을 없애버렸어! 칠라렌 성국의 깨끗한 숲만 봐도 알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네놈 이름은?"
".... 죄송합니다."
귀족은 자신이 재차 말을 하게 하자 그에게 자신이 먹던 과일을 던졌고 기사는 피하지 못하고 과일을 맞아야만 했다.
"이름은?"
"핀입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견습 기사인가 보구만... 네 아비가 우리 아버지 밑에서 호위를 하고 있었지 아마?"
"...."
"이곳에서는 그냥 넘어가지만 네 주제를 모르고 내게 감히 대든다면..."
"이해했습니다."
라틴이 살이 찐 포동포동한 볼을 떨며 그에게 화내자 핀이라는 견습 기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다른 귀족은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돌아가도록 할까 라틴?"
"아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아닙니다, 저희 영지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아 그렇다면 처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밟아놓지요."
"하하하하!"
그렇게 귀족들이 떠들며 노는 모습을 인상을 찌푸리고 바라보던 칠러웨이는 한숨을 쉬었지만 데브라는 익숙한 듯 그에게 손짓했다.
"가지."
"예."
"화가 나겠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늘상 있는 일이야, 끼어든다면 분명 골치가 아플 테니 조용히 지나가지."
"알겠습니다."
칠러웨이는 핀이라는 견습 기사가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자신은 아르웬을 만나러 톤 왕국으로 향해야만 했고 데브라 또한 바쁜 몸이었다.
"어어어!"
"무슨 일이야!"
"저... 저기!"
하지만 그들이 출발하려는 것도 잠시 귀족 일행에게서 큰 소리가 났다.
".... 예상했지만.."
"그냥 가죠."
선두에서 데브라가 발걸음을 멈추자 피렌디가 데브라의 옷자락을 끌었지만 그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 여기서 끼면 이황자님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 알고 있어."
결국 피렌디의 재촉에 데브라는 걸음을 옮겼지만 칠러웨이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칠러웨이! 얼른 오게."
"먼저 가세요."
"뭘 하려 하나!"
".... 저렇게 많이 몰려오는데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뭐...! 그런 오지랖 부리지 말고..."
데브라는 그를 잡아 끌려 했지만 덜덜 떨리는 칠러웨이의 손에 이상한 듯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칠러웨이?"
".... 토벌대에 있을 때 너무 많은 죽음을 봤습니다."
"... 그런 건 언젠간 한 번 겪여야 하는 일이네..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먼저 가십시요."
귀족들의 소리를 듣고 키메라들이 숲 안에서 몰려나오자 병사들은 긴 창으로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상급의 키메라들인 듯 그들은 막지 못하고 이리저리 넘어지며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나... 나를 지켜라!"
"피하십시요! 여긴... 끄아악!"
기사가 귀족 하나를 지키려 했지만 키메라의 날카로운 발톱에 머리가 날아갔고 말위에서 떨어진 귀족은 손을 내저으며 애원했다.
"사.. 살려줘! 내... 내가... 어.. 억..."
키메라가 머리를 물어뜯자 귀족의 목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고 그 모습을 보던 라틴은 두려움에 덜덜덜 떨었다.
"피.. 핀! 나를 지.. 지켜라!"
"걱정마십시요 도련님 제가 지켜드릴 테니 일단은 물러나계세요!"
핀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키메라의 앞에 섰지만 키메라의 모습은 견습 기사인 그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너무 거대하고 무서웠고 그의 발은 두려움에 땅에 딱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으.. 으으.."
병사들과 기사들의 피가 난자하자 결국 라틴은 오줌을 지렸고 핀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아무리 위험한 곳에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키에에엑!
키메라의 팔이 휘둘러졌고 핀은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역시나 그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커억..."
그의 검은 두 동강이 나버려 바닥에 떨어졌고 꽤나 큰 내상을 입었는지 핀의 입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어이!"
키메라가 핀을 입으로 넣으려 할 때 한목소리가 들렸고 키메라는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쩌억.
단 한 방에 키메라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피를 뒤집어쓴 남자 칠러웨이는 다 죽은 시신을 씹어먹고 있는 키메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하기 시작했다.
"... 피렌디 잠깐 여기 있거라."
"데브라!"
".... 자유 기사인데 저 녀석은 데려가야지."
"...."
"안 그러냐?"
피렌디는 그를 막으려 했지만 데브라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카각! 카가가각!
뼈가 잘리는 소리가 들리며 데브라가 순식간에 키메라를 해치우며 다가오자 그의 실력에 놀란 듯 칠러웨이는 손에 쥔 키메라를 놓아주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키에에엑!
"자네는 항상 그렇게 무리하나?"
"아... 뭐.. 항상은 아닌데.."
"정의감에 쩔어있어도 너무 쩔어있어."
"...."
데브라의 말에 칠러웨이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고 조용히 기절한 핀과 라틴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던 착한 사람이던 죽음에 놓여있을 때는 구하고 보는 거라고."
"참 좋은 걸 가르켜주셨구만... 구하다가 자네에게 피해까지 입히면?"
"....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떠오른 아버지의 기억에 칠러웨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데브라는 그를 보며 무언가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점은 배울만하구만.. 그래도 이런 무리는 하지 말게."
"... 아시면서 오신 것 아닙니까?"
"하하하... 자네를 보니 과거에 내가 떠올라서.."
데브라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은 칠러웨이는 키메라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고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검을 휘저었다.
"허억... 허억.. 늙으니.. 검도 못쓰겠구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나?"
"그런 것 같네요."
얼마나 싸웠을까 키메라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두 사람은 생존자들을 구하려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거의 대부분 머리가 뜯겨져 나가거나 사지가 분해되어 이리저리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쉽구만 칠러웨이."
"... 나섰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그대로 지나쳤으면 분명히 찝찝해서 잠도 못 잤을 겁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다행인 거지."
안타까운 얼굴로 병사들을 바라보는 칠러웨이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데브라는 그를 지나쳤고 잠시 멍하니 있던 칠러웨이는 나무에 처박힌 핀에게 다가갔다.
"... 괜찮습니까?"
"허.. 허어억!"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키메라인 줄 알았던 핀은 팔을 들어 올렸지만 칠러웨이는 조용히 그의 팔을 잡아주었다.
"사람입니다."
"아.."
"괜찮으십니까?"
"예... 예... 괘.. 괜찮습니다.."
핀은 겉으로 보기에는 꽤나 상처를 입은 것 같았지만 혀를 깨물어 입에 피가 흐르는 것뿐 겉보기에는 아무런 외상도 없었다.
"일어나세요."
"가.. 감사합니다, 기사님이십니까?"
"자유기사입니다."
칠러웨이의 목에 걸린 금패를 보며 핀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피를 뱉어내고 일어나려 했지만 꽤 충격이 큰 듯 다시 주저앉았다.
"자 잡으세요."
"감사합니다.. 성함이..?"
"....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네요."
핀은 가슴이 아픈지 가슴을 부여잡으며 일어났고 그런 그가 안타까운지 칠러웨이는 톤 왕국의 방향을 가리켰다.
"같이 가시죠."
".... 저..."
칠러웨이가 손을 내밀었지만 핀은 머뭇거리며 키메라의 옆에 쓰러져 있는 라틴을 바라봤고 칠러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을 모욕하지 않았습니까?"
".... 하지만 저의 주인입니다."
"완전 뼈까지 기사구만!"
칠러웨이는 아직까지 그의 어깨에 묻어있는 과일 조각을 보며 이상하게 그를 바라봤지만 데브라는 오히려 그의 등을 팡팡 때려주었다.
"... 저런 자를 주인으로 모시는 게.. 맞는 겁니까?"
"... 저도 화가 나지만... 전 기사입니다."
"...."
"자유 기사님도 정의감으로 저를 구해주신 것이 아닙니까?"
".... 뭐.."
"당신의 정의감처럼 제 충성심도 진심입니다."
"...."
"부탁드립니다 라틴님과 함께 빠져나가게 해주세요."
잠시 칠러웨이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데브라와 피렌디에게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가야 한다는 것 잊었나?"
"... 늦으면 성녀를 빨리 못 볼 겁니다."
두 사람이 설득하듯 칠러웨이에게 얘기했지만 칠러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럼 빨리..."
"하지만 도와줘야겠습니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서."
"하아..."
"하하하하!"
피렌디는 답답한 듯 가슴을 팡팡 쳤지만 데브라는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가지."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당신들 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요."
"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피렌디의 매정한 말에도 핀은 고개를 거듭 숙였고 라틴에게 다가갔다.
"피렌디 말은 조금 이쁘게 하거라."
"제 마음이예요."
"그.. 그래."
"끄.. 끙..."
하지만 핀이 아픈 몸으로 라틴을 업으려 하자 칠러웨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대신 그를 업었다.
"칠러웨이? 안 무겁나?"
"끄.. 끄응.... 말 걸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