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소란스러움은 언제나 적을 불러온다
* * *
"허억... 허억..."
끼긱.. 끼기긱...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계속 뒤에서 들려오자 데브라와 피렌디를 어깨에 맨 찰러웨이는 조금 더 속도를 올렸고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의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다 왔네!"
"말.. 허억.. 걸지... 마세요... 허억.."
얼마나 뛰었을까 칠러웨이와 데브라는 어느새 자신들도 모르게 숲의 밖으로 나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우우욱...!"
너무 오래 뛰었는지 칠러웨이가 토를 하며 정신을 못 차리자 데브라는 말없이 다가와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미안해요.."
정신이 든 피렌디가 미안한지 다가와 걱정스럽게 얘기했지만 칠러웨이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 우욱..습니다."
"...."
"내가 무리를 시켰나 보군."
"무리는요... 후우.. 살려고 뛴 거지.."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게워낸 칠러웨이는 입가를 슥 닦고 지겹다는 표정으로 조용한 숲을 바라보았다.
"이제 들어갈 일은 없으니 안심하게, 이제부터는 그래도 '나름' 쉬운 곳이야."
"그 말 믿고 싶네요."
온몸에 묻어있는 역한 바퀴벌레와 코루의 체액을 털어낸 세 사람은 천천히 다음 숲으로 움직였다.
"이곳은 뭐 하는 곳입니까."
"아까 예기했던 대로 저곳보단 쉬운 곳이네."
".... 쉽지는 않아요."
데브라의 말에 칠러웨이가 자신을 바라보자 피렌디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은 칠라렌 성국에서 가장 가까운 헬하임 제국의 영토에요.."
"그 말은.."
"톤 왕국의 영토지만 칠라렌 성국에서 탈출한 키메라들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죠."
".... 도대체 왜 키메라들을 처리를 안 하는 겁니까? 칠라렌에서는 모두 물리치려고 그렇게 노력하던데.. 데브라님은 아십니까?"
"톤 왕국은 토벌대를 보낼 능력이 없는 걸세.. 뭐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럼 헬하임 제국은요?"
"조용한 숲을 뚫고 이곳으로 토벌대를 원정을 보내야 하지.. 근데 또 이게 톤 왕국이랑 가깝네? 자네 같으면 이곳으로 토벌대를 보내겠는가?"
"방치됐다는 거군요.."
"한마디로 아르티네의 영지와 협곡을 통과하지 못하면 처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버렸다는 거지."
칠러웨이는 데브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성국에서 보았던 키메라들의 모습을 떠올렸고 한숨을 내쉬었다.
"데브라님의 잘못된 선택이었죠, 아르티네에게 조금만 얘기하고 몰래 통과했으면 되는데..."
"일황자가 그곳에 대기하고 있으면 전쟁이야 '그분'도 그러길 바라지 않을 걸세."
"데브라님의 생각이잖아요 그건."
"그거야 모르는 거지! 하하하하!"
"그놈의 입은.."
"...."
피렌디의 말에 데브라가 그냥 웃어넘기려 했지만 올라가는 피렌디의 주먹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다시 보니까 두란트가 선견지명이 있네요.."
"두란트들은 조금 무식하게 생겼지만 굉장히 똑똑한 편에 속하네."
자신에게 지도를 건넸던 체체로를 떠올리며 칠러웨이는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이 지도 굉장히 귀한 것일 텐데... 저한테 주고 굉장히 고맙다는 생각이 드네요."
"체체로는 모든 것을 대비해두는 편이라 자네가 어디로 갈지 뻔하게 보였을 거야."
"... 그랬었나 봐요."
숲 안으로 들어선 데브라는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보고는 깜깜한 숲을 슥 둘러보더니 피렌디에게 짐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피렌디."
"네."
"이제 날이 더 어두워져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이곳에 자리를 잡을까요?"
피렌디는 나무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장작을 주워온 데브라는 능숙하게 불을 지폈다.
탁.. 타닥..
"먹거라."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그 옆에 앉은 데브라는 칠러웨이와 피렌디에게 자신이 담은 술을 건넸다.
"전 안 먹을래요."
"칠러웨이는?"
"저는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오르는 장작을 보며 칠러웨이는 씁쓸한 술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너무 많이는 먹지 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거라도 안 먹으면 너무 힘들어서 말입니다."
"후후..."
데브라는 칠러웨이가 다시 건네는 술을 받아들고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
"아르티네의 영지에서 이렇게 나오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
".... 데브라님은 그렇죠."
그의 말에 피렌디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칠러웨이는 문득 궁금한 것들이 생겼다.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안 나오고 계셨던 겁니까?"
"그래,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얘기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
"어려우면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뭐... 어렵진 않지.. 다만 아르티네 그 아이에게는 얘기하지말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데브라는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하더니 자신의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반지?"
"자네가 끼고 있는 브라이언의 반지와 용병 대장 클라인의 반지처럼 '가문의 표식'일세."
"알아보시네요?"
"그 두 사람의 반지는 절대 흔하지 않거든."
"그 정도입니까?"
"톤 왕국의 왕도 가지지 못한 게 그 두 개일 걸세."
칠러웨이는 자신의 손에 껴져있는 클라인과 브라이언의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봤고 데브라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생길 거니까 아껴두게."
"아 예..."
"아무튼 이 반지는 아르티네의 반지일세."
"...."
"정확히는 아르티네 아비의 반지야."
"데브라."
"괜찮다 피렌디 조금 털어놓고도 싶었으니까."
데브라가 취한 것 같아 피렌디는 그만 얘기하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르티네의 아비를 죽인 건 나일세."
".... 의뢰를 받으신 겁니까?"
"그랬지, 하지만 잘못된 정보로 인한 의뢰였고 그 의뢰를 부탁한 사람 또한 지금까지 엄청난 죄책감으로 살고 있지."
"아르티네는 알고 있습니까?"
".... 아니.. 친구의 딸이었던 그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나."
".... 그래서 말 하지 말라고 했었군요."
데브라는 쌀쌀한 날씨에도 춥지 않은지 자신의 겉옷을 피렌디에게 덮어줬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슬픔에 일그러져 있었다.
".... 내 실수였어 평소와는 달리 잘 알아보지 않고 진행했지... 분명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게 오해였고 나는 어린 아르티네를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어."
"...."
"결국 대륙을 돌아다니다가도 그 아이가 눈에 밟혀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그곳에 눌러앉게 됐지.. '그분'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분이라면..."
"이황자."
"황제의 두 번째 아들.. 말입니까?"
"그래.. 그는 그때부터 멍청한 일황자가 황제의 자리를 위해서 날뛰고 괴롭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그게 지금 바뀐 거군요."
"그래, 그와 나는 죄책감을 갚고 있던 도중에 그 멍청한 녀석이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걸 본 거야."
"아르티네."
"맞네."
데브라는 분한 표정으로 자신이 들고 있던 술병을 악력으로 터뜨리고는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자네가 성녀를 이끌고 아르티네의 영지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 모든 건 돌아가기 시작했지.. 일황자가 나타났고 그 자의 손에서 아르티네를 구해내어 우리의 신뢰를 얻었지."
"그러려고 한건 아니었는데..."
"분명 자네는 정의감 때문에 그랬겠지.. 하지만 그게 도화선이 됐어, 이황자가 다시 황제의 자리를 가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한 장본인이 바로 자네일세."
"왜...?"
"일황자가 아르티네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해 무릎을 꿇렸을 때 그때 이황자는 분노했네.. 하지만 나설 수가 없었지.. 그런데 자네가 나타난 거야, 일황자를 때려눕혔고 많은 영지민들이 죽었지만... 자네 덕분에 아르티네만은 안전할 수 있었지."
".... 아르티네는 화를 냈지만요."
"그래서 이황자님은 마음을 다 잡았네, 아르티네를 그 악랄한 형으로부터 지킬 힘을 얻기 위해 나를 톤 왕국으로 가게 한걸세."
"...."
데브라는 이황자가 하사한 자신의 검을 조용히 들어 올렸고 등 뒤에서 나타난 키메라를 두 동강 내버렸다.
"이런.. 얘기하는데 이렇게 튀어나오다니."
키메라를 베어낸 데브라는 씨익 미소를 짓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모닥불 앞에 주저앉았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네."
"... 뭡니까?"
"주인을 한번 섬겨볼 생각 없나?"
"...."
"자네라면 환영해 줄 걸세."
칠러웨이는 그의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데브라님은 자유기사가 아니십니까?"
"... 뭐 그렇지."
"하지만 주인이 있으신 것 같군요."
"....."
"제가 생각하는 자유기사는 주인을 섬기는 자유기사가 아닙니다."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자유기사란 뭔가?"
그의 물음에 칠러웨이는 조용히 달을 바라봤고 그를 따라 데브라 또한 둥글게 뜬 달을 바라봤다.
"낭만이겠죠."
"..... 낭만?"
"사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주인이 없는 게 편합니다."
"... 그런가?"
"예.. 그리고 마음을 다잡으려 할 때마다 워낙에 뒤통수를 많이 맞아서."
"... 그렇구만."
"그리고 뭐... 저는 얽매이지 않는 것이 자유기사라 생각합니다."
"하하하하!"
데브라는 칠러웨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었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얘기는 다 끝나셨나요?"
피렌디는 지루한 듯 하품을 하며 두 사람을 바라봤고 데브라와 칠러웨이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키메라가 더 오기 전에 조용히 하는 것 어떨까요? 아까도 깜짝 놀랐다구요."
".... 이곳은 안 나오는 걸 바래도 계속 나타나는 곳이라."
피렌디는 자신의 말에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브라를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키에에에엑!
"지겨운 울음소리."
"칠라렌 성국에서 왔다고 했나?"
"예 토벌대 출신이죠."
"그거 다행이군."
데브라와 칠러웨이는 검을 뽑아들고 키메라들에게 달려들었고 피렌디 또한 화살에 시위를 메기며 그들을 엄호했다.
"우리를 보고 꽤나 모여든 것 같으니 빨리 움직이도록 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