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자유를 갈망하는 새는 날지 못한다
* * *
"칠러웨이."
"...."
칠러웨이가 계속해서 기분이 안 좋은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페르온은 분위기를 풀려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칠러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칠러웨이 말 좀 합시다."
"...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칠러웨이의 태도에 페르온은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나선 것 잘하신 겁니다."
"...."
"그들 중에서는 저를 챙겨주던 분들도 몇몇 계셨습니다."
"제가 잘못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봇물이 터져 나오듯 칠러웨이는 화를 내며 페르온을 바라봤고 페르온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못한 것 아닙니다."
"하아.. 그런데 백작님은 오히려 저에게... 그리고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겁니까?"
"...."
페르온은 칠러웨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며 자신의 물을 건넸다.
"진정하세요."
"... 그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
"그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학살당했습니다 성문을 빠져나가던 저희의 앞에서.."
"예."
"그런데 페르온님과 후트는 저에게 나서지 말라고 했죠.. 사람이 눈앞에서 저렇게 죽어나가는데.."
"저와 후트도 화가 났습니다."
"...."
칠러웨이는 페르온의 손톱에 묻은 거멓게 굳은 피와 딱지가 진 손톱자국을 보며 그가 얼마나 파울로의 기사들에게 화가 났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칠러웨이님이 파울로 황자에게 바로 달려간 간 것은.. 무리하신 겁니다."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백작님은 일단 저희를 보내시고 승부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칠러웨이님도 그 넘치는 정의감과 성격이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괜히 넘치는 정의감이라도 옳은 일이라면 할 겁니다."
"영지민들이 더 죽어나가고 백작님부터 병사들까지 모두 죽을 뻔했다고 얘기해도?"
".....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아니라고는 말 못 하시네요."
"...."
"게다가 아르웬 성녀님은 대륙의 큰 존재 중 하나입니다 저분을 지키려면 괜한 정의감은 조금 접어두시는 게 좋아요."
칠러웨이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자신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하는 페르온을 째릿 바라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페르온 당신의 말이 맞긴 하지만.. 저 황자가 나타났다고 했을 때 상당히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 무슨 느낌말입니까?"
"그냥..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
"엄청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요."
"아.. 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죠?"
칠러웨이의 말에 페르온은 그의 말에 공감하듯 피식 웃은 후 후트를 바라보았다.
"어이 후트."
"아.. 어.."
후트는 몇 시간 동안 첨탑에서 버티느라 꽤나 고생을 했지만 그의 신들린 활 실력은 감탄을 자아냈었다.
"고생했어."
"아.. 그래."
"뭘 그렇게 봐?"
페르온은 멍하니 칠러웨이를 보고 있던 후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후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가로로 빠르게 내저었다.
"아니야."
"... 흠."
페르온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자 후트는 인상을 팍 찌푸렸고 그는 고개를 돌려 홀로 앞장서 가고 있는 아르웬을 바라봤다.
"... 그나저나 성녀님은 쿨하다 못해 춥게 느껴지는 정도군요."
"예.. 뭐 겉으로는 저렇게 보여도 알고 지내다 보면 저렇게 따듯한 분이 없더라구요."
칠러웨이는 페르온의 말에 피식 웃으며 육포를 던져주었고 페르온은 자신이 생각했던 성녀의 이미지와 아르웬이 딱 맞아떨어졌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두 사람.. 같이 톤 왕국으로 가도 되는 겁니까?"
"예.. 뭐 데브라님의 밑에 오래 있었으니 데브라님도 대충은 이해해 주실 겁니다."
"음..."
"나도 괜찮아, 자유기사긴 해도 어차피 혼자 활동해서."
칠러웨이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편을 두 명이나 만들어 좋았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하게 자유기사를 해먹던 그들이 자신과 아르웬을 따라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미안해져왔다.
"그나저나 칠러웨이 계획이 뭡니까?"
"일단 톤 왕국에서 아르웬님을 보호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줄 생각입니다."
"그럴 거면 칠라렌 성국에 있던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 그게 거기에서는 일이 있어서..."
"칠러웨이님이라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 것도 같네요."
"...."
이야기할 때마다 자신의 성격을 꿰뚫어보는 페르온이 불편할 만도 했지만 칠러웨이는 전혀 불편한 티를 내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자신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생겨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깐."
평화롭게 숲을 걷던 것도 잠시 앞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아르웬은 팔을 들어 그들의 걸음을 막았다.
"무슨 일입니까?"
"허억.. 허억..."
칠러웨이가 물어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길을 정찰 나갔던 케미안이 옆구리에 피를 흘리며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케미안!"
"무슨 일입니까?"
페르온과 칠러웨이가 달려들어 케미안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막았고 케미안은 혼미한 정신으로 칠러웨이의 팔을 잡았다.
"다시...! 다시.. 되돌아가게!"
"예?"
"백작령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네.. 이곳은.. 위험해!"
케미안이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아르웬은 계속 앞에서 다가오는 소리에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아르웬님?"
"곧.. 와."
"...."
결국 심상치 않음을 느낀 칠러웨이는 페르온을 돌아보았다.
"페르온."
"예."
"케미안을 영지로 돌려보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지만..."
"괜찮습니다, 페르온님 대신 후트님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
"분명 여기서 좀 더 시간을 끌리다간 케미안님이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하아.. 알겠습니다."
케미안과 친분이 있던 페르온은 쓰러져있는 그와 칠러웨이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케미안을 둘러업고 백작령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예!"
페르온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중무장한 기사들이 천천히 풀숲에서 걸어 나왔다.
".... 후트? 저들은 누굽니까?"
"아까 봤던 놈들."
"... 황자의 기사들인가?"
"맞아, 하지만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지.. 갑옷 두께는 일반 갑옷의 두 배.. 아니 세 배? 이 헬하임 제국의 자유기사들 사이에서 저들을 '캉'이라 불러."
"왜 캉입니까?"
"검과 화살로 공격해 봤자 캉 소리밖에 안 나서."
후트는 활을 뽑을 자세를 취했고 칠러웨이 또한 몸을 긴장시키며 그들을 조용히 지켜봤다.
"아르웬 성녀님 맞습니까?"
"...."
"모시러 왔습니다, 저희랑 같이 가시죠."
"싫어."
중무장한 한 기사가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아르웬은 얼굴을 팍 찌푸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셔야 합니다."
"... 싫어."
"계속 거절하신다면 저희도 저희 나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요."
중저음의 기사는 목소리만 들었을 때 꽤나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그는 칠러웨이를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봐."
"..."
"그녀는 못 데려가."
남자가 칠러웨이를 지나치려는 순간 칠러웨이는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는 기분이 나쁜 듯 눈을 찌푸렸다.
"어딜 손대는 거지?"
"칠러웨이!"
그의 얼굴을 보려 칠러웨이가 고개를 돌리려는 그 순간 남자의 검이 순식간에 뽑혀져 나왔고 후트는 중무장한 남자의 손목에 활을 쐈다.
깡!
얼마나 단단한 갑옷을 입은 건지 남자의 팔을 살짝 들려져 올라갈 뿐 후트의 강한 화살은 튕겨져 나왔고 칠러웨이는 그 순간을 틈타 뒷걸음질 쳤다.
"어딜 가느냐!"
"....!"
중무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에 칠러웨이는 당황해 눈을 크게 떴고 다시 한번 남자의 검이 휘둘러졌다.
"크윽!"
칠러웨이의 가슴에 긴 상처를 남긴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터벅터벅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가왔다.
'숨이 막히는군.'
칠러웨이의 생각대로 남자는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었음에도 그 속도는 칠러웨이에게 엄청난 압박을 느끼게 했고 검술 또한 만만치 않았다.
"칠러웨이 물러서."
"아르웬...!"
"저 사람.. 칠러웨이는.. 벅차.. 힘들어."
"...."
"흐음."
아르웬이 칠러웨이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자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검을 들어 올렸고 아르웬 또한 그와 걸맞게 자신의 그레이트 소드를 빙글 돌렸다.
까앙!
"....!"
백작령에 머무르는 동안 몸이 거의 다 나았는지 아르웬은 상쾌한 움직임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레이트 소드의 무게감에 남자의 몸은 휘청였다.
카앙! 까앙!
"역시 다섯 번째 성녀."
남자는 갑옷이 찌그러져가는 과정에서도 그녀의 검술을 보며 감탄했고 아르웬은 계속해서 그를 밀어붙였다.
"헉.. 헉..."
"다 끝나셨습니까?"
남자의 말에 화가 난 아르웬이 앞으로 뛰어나가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백합을 넘게 휘두르고 난 뒤 이미 체력이 거의 다한 그녀의 검은 별로 위력이 없었다.
".... 잡았어?"
하지만 아르웬의 공세도 잠시 남자는 갑옷 속의 눈을 번뜩이며 그녀의 검의 날을 잡았고 아르웬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들었던 대로 실력이 뛰어나십니다, 갑옷이 없었으면 제가 자리에 누워있을 수도 있겠군요."
"크윽!"
중무장한 남자의 발차기는 꽤나 묵직했고 아르웬은 복부에 피해를 입었는지 피를 토해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시지요."
"싫... 어!"
아르웬은 일어나려 몸을 일으켰지만 비틀대다 쓰러지기를 반복했고 남자는 그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봤다.
"자 성녀님을 모셔라."
"어딜!"
쩌억!
"끄아아악!"
기사들이 아르웬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칠러웨이의 엄청난 힘에 갑옷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중무장한 기사들은 그의 힘에 깜짝 놀란 듯 물러났다.
"아르웬님 괜찮으세요?"
"... 응.."
하지만 아르웬의 상태는 상당히 나빠 보였고 그녀는 후트의 부축 없이 일어날 수 없었다.
"성녀를 넘겨라."
"싫다면?"
"죽일 수밖에."
"미안하지만 죽는 게 쉽지 않아서 말이지."
".... 말장난할 시간없다."
"어이."
남자는 칠러웨이에게 다가가려 발을 옮겼지만 한 남자가 페르온이 케미안을 둘러업고 사라진 길에서 나타나 그를 불렀다.
".... 데브라."
"돌아가게."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수도부터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아네, 하지만 성녀는 톤 왕국으로 돌아가야 해."
"누구 마음대로 돌려보내는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만..."
"이 황자님의 명령일세."
"...."
"돌아가게."
"일 황자님의 명령은 성녀를 수도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꽉 막힌 사람이구만!"
데브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칠러웨이의 앞에 누워있는 중갑옷의 기사를 바라봤다.
"자네가 한 건가?"
"예..."
"대단하군."
"아뇨 뭐..."
"이곳은 나에게 맡기고.. 후트!"
"예!"
"성녀님을 모시고 톤 왕국으로 먼저 가라."
"예!"
후트가 아르웬을 데리고 가려 하자 중갑옷의 기사들이 앞을 막아섰고 데브라는 혀를 차며 검을 뽑아들었다.
"빨리 끝내지."
데브라는 마치 브라이언 공작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미끄러지듯 중갑옷의 기사들에게 다가갔고 순식간에 갑옷의 목 이음새에 검을 찔러 넣어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캉!
하지만 아르웬을 쓰러뜨렸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데브라의 빠른 검을 막아냈고 그의 팔목을 잡아챘다.
"역시 '캉'인가."
"그런 저급한 이름으로 부르지 마시길."
남자는 데브라의 팔목을 잘라내려 검을 휘둘렀지만 데브라는 그의 손목을 검자루로 때려 위기를 벗어났다.
"후우.. 그놈의 갑옷은 언제 봐도 지겹구만."
"당신들을 위한 방어수단입니다."
"쯧.. 우리가 뭘 했다고."
"아주 많이 얍삽하게 했죠.... 길!"
".... 후트! 조심하거라!"
데브라를 노려보고 있던 데브라는 어디론가 소리를 쳤고 한 기사가 순식간에 뛰어나와 아르웬을 옮기고 있던 후트의 허리를 잡아챘다.
"이 개 같은...!"
후트는 빠르게 화살을 빼네 중갑옷을 입은 기사, 길의 눈 부위를 찔렀지만 길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아르웬을 들어 올린 뒤 빠르게 뛰어나갔다.
"제길!"
"성녀는 잘 받아 가겠습니다."
중갑옷의 남자는 길이라는 이름의 기사와 함께 순식간에 숲 안으로 사라졌고 스물이 넘는 기사들은 칠러웨이와 데브라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비켜!"
카가각!
철 갑옷을 찢어내듯 베어내며 칠러웨이는 아르웬을 데려가는 길을 잡으려 했지만 중갑옷의 기사들은 그가 지나가지 못하게 몸을 눌러 막았다.
"끄윽! 비... 켜!"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며 칠러웨이는 앞으로 나아갔지만 자신을 저지하는 기사들 때문에 길과 남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 그만하게."
"제기랄! 뭘 그만합니까!"
"저 둘은 따라잡을 수 없어."
"무거운 갑옷을 입었습니다 뛰면 금방...!"
"저 두 사람은 이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이네 수 십년간 저 갑옷을 입고 생활했고 단련된 체력은 나나 브라이언 공작도 혀를 내두를 정도야 아마 갑옷을 벗고 도망간다면 절대 못 잡네."
"....."
"저 갑옷을 베어내는 자네의 힘 또한 놀랍지만 저 두 사람이 전장에서 도망갈 때 잡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네 나 또한 마찬가지고."
"그럼 저대로 놔줍니까!? 성녀를 데려갔는데!"
"... 내가 보낸 자유기사들이 위치를 대강 알려줄걸세 수도로 들어가기 전에 잡으면 돼."
".... 놓친다면 어쩔 겁니까?"
"내가 돕지."
"...."
"이번 일은 내 실수니 성녀를 구해내는 것부터 톤 왕국의 계획까지 모두 도와주겠네."
데브라의 말에 칠러웨이는 주먹을 꽉 쥐면서도 아르웬을 놓쳐버린 후트를 일으켜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응."
"돌아가시죠.. 백작령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