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자유를 갈망하는 새는 날지 못한다
* * *
"아르웬!"
"왜 이렇게 늦게 나오셨습니까!"
아르웬과 페르온 두 사람은 계속해서 달려드는 영지병들을 좁은 골목에서 막아내고 있었는데 장검을 사용하는 아르웬의 특성상 그녀의 움직임은 한정되어 금방이라도 잡힐 것만 같았다.
"얘기를 좀 했습니다!"
아르웬의 팔목을 잡아챈 기사 하나를 발로 차버린 칠러웨이는 순식간에 병사들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턱을 후려쳤다.
"아르웬님 최대한 죽이지 않도록 해주세요!"
"응.."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들을 죽인다면 분명 헬하임 제국에서도 수배전단이 붙을 터!"
두 사람을 때려눕힌 페르온은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하며 골목 이곳저곳을 빠르게 움직이며 달려갔다.
"윽!"
"아르웬!"
"무슨 일입니까!"
"제길.. 어떤 자식이!"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아르웬의 다리에 상처를 발견한 칠러웨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를 업었다.
"좀만 참으세요 알겠죠?"
"응..."
그의 등에 업힌 아르웬은 시야에 방해가 되지 않게 검을 집어넣었지만 골목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기사들과 영지병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필..."
"아르웬님 지금은 도망치는 것만 생각합니다!"
"...."
칠러웨이가 땀을 흘리며 골목 안을 페르온과 함께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마땅한 길을 나오지 않았고 이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던 페르온 조차 숨을 헉헉대며 도망갈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 칠러웨이."
"좀만.. 좀만 참으세요.."
다급한 칠러웨이와는 달리 아르웬은 무언가 결정한 듯 그의 목을 껴안았고 칠러웨이는 처음 보는 그녀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낀 듯 고개를 돌리려 했다.
"꼭 나를 찾으러 와."
".... 무슨...! 아르웬!"
그 순간 아르웬은 몸에 힘을 풀었고 칠러웨이는 자신의 등 뒤에서 떨어지는 아르웬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녀의 의중을 파악한 페르온이 칠러웨이의 어깨를 잡았다.
"가야 합니다!"
"무슨 개소리를!"
"아직 아직은 괜찮습니다! 일단 칠러웨이 당신은 도망쳐야...!"
"안됩니다!"
두 사람이 머뭇거리는 상황에도 저 멀리 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아르웬은 우울한 표정을 짓기보다는 칠러웨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아르웬!!!"
"제기랄!"
어쩔 수 없이 칠러웨이의 목을 검 집으로 내려친 페르온은 그를 어깨에 둘러업고 아르웬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성녀."
"괜찮아.. 그를.. 살려."
자신이 살리고 싶은 성녀였지만 페르온은 칠러웨이가 먼저였기에 그녀를 내버려 둔 채 골목 끝을 향해 달려갔다.
"헉헉... 너! 성녀를 포획했다고 전해라!"
"예!"
"저들은 어떻게 할까요?"
".... 일단은 내버려 두도록 하지.. 백작님이 원했던 것은 일단 성녀 하나뿐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케미안."
케미안이라 불린 중년의 남자는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다리를 다쳐 주저앉아있는 아르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성녀님, 저는 이 백작령의 기사단장이자 수비대장 케미안 입니다 당신을 최대한 조심히 모실 테니 웬만하면 저항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내가.. 가."
아르웬은 자신의 장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고 케미안은 그녀를 무심히 바라봤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녀가 넘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러지 말고 부축받는 것이.."
"내 몸에.. 손.. 대지 마."
"... 알겠습니다."
자신의 딸과 같은 나이 일지도 모를 아르웬이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가는 모습에 케미안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의 일은 백작에게 이 여인을 데려가는 것뿐이었다.
"그럼 말이라도 드릴 테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요."
"...."
"죄송합니다, 조심히 모셔오라는 백작님의 말씀도 있으셨고 저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아서 제 말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알겠어."
케미안이 영지병에게 눈짓하자 병사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말을 한 필 가져와 그녀에게 넘겼고 기사들과 병사들은 혹여나 그녀가 도망갈세라 고삐를 놓지 않고 옆에 꽉 붙어 서있었다.
"케미안님 일단 목표를 이뤘으니 돌아가심이.."
".... 뭐.. 자유 기사들이 왜 가만히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터.. 돌아가자."
"예! 돌아간다!"
골목에서 영지병들과 기사들이 물처럼 우르르 빠져나가자 쌓인 물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페르온은 고개를 내밀고 그들을 바라봤다.
".... 일이 더 어려워져버렸네."
"왜 그러셨습니까?"
"어익! 깜짝 놀랐잖습니까!"
성녀가 말을 타고 영지병들과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혀를 차던 페르온은 기절했던 칠러웨이가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자 그 또한 놀랐는지 펄쩍 뛰었다.
"... 당신이 저들과 맞서는 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말했듯 분명 저들과 대적한다면 영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압니다."
"그리고 성녀님을 데려가서 바로 무언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저들이 아르웬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예 '당장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 애매모호한 말은..."
"....."
칠러웨이의 분노에 찬 표정을 보며 물건들 사이로 몸을 뉜 페르온은 골목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봤다.
"이 헬하임 제국 전체가 아르웬님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을 압니다."
"...."
"브라이언 공작과 당신들이 접촉했다는 사실 또한 모두가 알고 있구요."
"...."
"놀랍죠..? 제국에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지다니?"
칠러웨이의 놀란 표정에 페르온은 별것 아니라는 듯 피식 웃더니 칠러웨이의 떨어진 검을 주워 그에게 건넸다.
"헬하임 제국에 들어오는 정보의 9할이 어디서 들어오는 줄 아십니까?"
"자유 기사..?"
"예, 모두 저희의 눈으로 직접 보고 저희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합니다.. 그래서 아까 데브라님과 얘기하실 때 데브라님이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었구요."
"...."
"지금 성국에서 아주 소중히 품고 있던 키로스의 성녀들 중 하나가 마음이 바뀌어 나왔다는 얘기는 말 그대로 칼을 쥘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겁니다.. 그녀들은 신의 힘을 가지고 있고 키로스의 성녀이기 때문에 성국이 아니라 다른 왕국이나 제국에 옮겨간다면 성국뿐만이 아니라 신의 힘으로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국이 그 소식을 놓치고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성녀 하나만 포획해도 평생을 먹고 놀만할 부를 얻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포획 후 제국으로 포섭까지 한다면 공작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 또한 가능할 겁니다."
"성녀가... 그리도.."
"중요한 존재입니다, 브라이언 공작이 아르웬을 직접 보낸 이유도 자유 기사들을 포섭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데브라님은 제 생각과는 달리 당신들을 선택하지 않았고 자유 기사들이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
"어쨌든 제 얘기는 그녀를 '포획'까지는 했지만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포섭'까지는 못했기 때문에 황제조차 지금 상황에서 섣불리 그녀를 건들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르웬님이 계속 포섭당하지 않는다면 고문.. 약물.. 뭐..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입에서 '나는 헬하임 제국에 종속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겠죠."
"제길.. 내가 왜.. 그녀를.."
"이제 아셨습니까? 톤 왕국이나 칠라렌 성국, 헬하임 제국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아르웬님을 노리고 있는 이유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이야기해주지만 키로스는 이 대륙에서 가장 큰 존재입니다."
페르온은 칠러웨이의 어깨를 툭 쳐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고 칠러웨이 또한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것은 당신까지 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고 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절대로.. 아르웬님이 잡힌 지금 당신에게 제대로 눈이 돌아가면 순식간에 자유 기사들까지 동원해 당신을 잡으려 할 겁니다."
"... 알겠습니다."
"아무리 성녀가 중요한 인물이더라도 헬하임 제국은 성녀를 포섭했다고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았으니 조용히 성녀님을 빼네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톤 왕국에 돌아가서도 헬하임 제국의 적으로써 적극적으로 공격당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후우.."
칠러웨이의 깊은 한숨을 들은 페르온은 골목길을 따라가더니 으슥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에 멈춰 섰다.
"여기는...?"
"둘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예 뭐.."
"낭만에 미쳐사는 놈이 하나 있어서.. 성녀를 구한다고 얘기만 해도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 검을 들 녀석이거든요."
끼이이익...
소름 끼치는 문소리가 들리고 페르온은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멈춰."
".... 나다 페르온."
".... 그 옆은?"
"칠라렌 성국에서 온 자유 기사 칠러웨이."
"음."
조그만 목소리였지만 페르온과 같은 자유 기사라는 이야기를 듣자 안심한 듯 조용히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빠져나왔다.
"석궁?"
"예.. 뭐 활은 엄청나게 잘 쏴서.."
"나는 후트.. 너는?"
"칠러웨이입니다."
"나는 자유 기사가 아니지만 페르온이 데려온 사람이니 믿을만하겠지."
후트는 잠시 골목길을 살피더니 문을 닫고 탁자 위에 물을 꺼내주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 후트, 도와줄 수 있어?"
".... 도와? 뭐를?"
"헬하임 제국에 최근 성녀가 들어왔다는 소식 들었었지?"
"... 그래."
"옆에 있는 이 사람은 성녀를 데리고 칠라렌 성국부터 이곳까지 온 사람이야."
"...."
갑자기 후트가 조용해지자 칠러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페르온은 기다려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
"어디로 가면 되나? 어디서 구하면 되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 자신의 단검과 온갖 무기들을 주머니에 쑤셔 박는 후트의 모습을 보며 칠러웨이는 당황한 표정이 보였지만 페르온은 익숙한 일인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핫하! 그럼 도와주는 거지?"
"물론이다!"
"도대체.. 이 사람.. 뭡니까?"
칠러웨이의 물음에 페르온은 한 책장을 가리켰고 책장 위에는 용사와 성녀, 성녀를 지킨 기사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었다.
"후트가 어릴 때부터 기사를 엄청 동경해왔습니다.. 성녀도.. 그래서 자유 기사가 됐지만 돈만 밝히는 데브라님 때문에 여행도 못하고 성국의 키메라를 잡는데도 못 간 채 아무 것도 못 하고 멍하니 계속 집안에 머물러 있었거든요.."
".... 진성 빠돌이다.. 이 말씀이군요."
"빠돌이요?"
"아 뭐.. 엄청 좋아한다 그겁니다.."
"아! 핫하! 저 만큼 좋아하는 친구도 없을 겁니다!"
페르온은 성녀를 만날 생각에 들떴는지 자신의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쓴 줄도 모르고 옷을 정리하고 있는 후트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칠러웨이는 왠지 모를 귀여운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페르온 이 옷 어떤가 밝아서 성녀님이 좋아할 것 같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