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눈앞에 다가온 기회는 잡으려 노력해야 한다.
* * *
"...."
말없이 남자는 한 여인을 이끌고 한 사냥꾼에게 인도받은 헬하임 제국으로 가는 샛길을 통해 길을 걷고 있었다.
"칠러웨이."
"예 아르웬님."
일루안의 시신을 본 뒤로부터 느껴지는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아르웬은 낯선 기분으로 그의 소매를 잡았다.
"...."
"괜찮... 아?"
더듬거리며 말하는 아르웬을 잠시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칠러웨이였지만 이윽고 전과 같은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에 빠져서."
"...."
"톤 왕국에 남아있는 이들과 칠라렌 성국을 버리고 나온 아르웬님이 걱정이라서..."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네 물론 톤 왕국도.."
칠러웨이의 어깨를 툭 친 클라인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지나가자 칠러웨이는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화난 모습으로 보이네, 아르웬님이 걱정하실 만도 하니 표정은 풀고 다니게나."
"아.. 예."
"나도 일루안님의 일로 굉장히 화가 많이 나있지만 굉장히 좋은 분이었으니 키로스님의 곁에서 잘 계실 거라 생각하네.."
클라인의 씁쓸한 표정에 칠러웨이는 다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아르웬을 조용히 바라봤다.
"다만.. 나도 걱정인 것이 아르웬님인데.."
"어떤..?"
"아르웬님은 자네의 생각대로 칠라렌 성국을 버리고 나오셨네 분명히 돌아오지 않는 아르웬님이 배신자라고 떠들며 리에티는 당장이라도 잡으려 노력하겠지."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함부로 침입할 수 없지 않습니까?"
"가능하네."
"예?"
"칠라렌 성국은 여태껏 한 마디로 '중립국'이었어 어떤 이유에서건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키로스님에게 뜻이 내려올 때만 움직일 수 있었지."
"...."
"하지만 리에티가 힘을 거머쥔 현재는 다르다 이 말이지."
클라인은 목이 말랐는지 짐 속에서 물을 꺼내어 꿀꺽 꿀꺽 마시고는 칠러웨이에게 던져주었다.
"전에 얘기했던 것 기억 나나?"
"어떤..?"
"칠라렌 성국은 많은 힘을 숨기고 있다고.."
"... 예."
"성국이 마음을 먹고 전쟁을 일으키면 제국도 휘청거릴 정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네, 성기사들은 특수한 힘을 사용하며 성기사 하나에 기사 수십이 달라붙어야 처리가 가능하지.. 아빌론을 만나봤었지? 어땠었나?"
"분명 강했습니다."
"그런 자들이 성국의 성녀들에게 수백수천은 붙어있어.. 물론 교황의 밑에도 성기사 투성이지.. 또한 그들은 대륙 전체에 분포하는 신도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그 신도들은 평민부터 귀족들까지 다양해 그런 이들이 성국을 도와 뜻을 함께한다면..."
"무슨 얘기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 상황은 위험하다는 거네, 아무리 강한 헬하임 제국이더라도 성국과 정면으로 들이 받으면 그대로 무너질 거야.. 기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톤 왕국 또한 힘을 잃는 것이 분명했지만 아르웬님이 오셨으니 분명 성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시간을 끌 수 있겠지만 현재 엘라님 하나만을 성녀로 받들려는 리에티 녀석은 모든 성녀를 내치려 노력하겠지.. 그게 전투의 성녀로 유명한 두 번째 성녀님이라고 해도 말이야."
"...."
"아마 지금은 마리아님부터 잡아먹으려고 들 거네."
"마리아..를?"
"성녀 중 아르웬님 다음으로 힘이 약하신 분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아르웬은 클라인의 얘기를 듣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칠러웨이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 주었다.
"무사하실 겁니다."
".... 그래야.. 할 텐데."
아르웬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클라인은 괜히 얘기를 꺼낸 것 같아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세 번째 성녀님은 분명 쓸모가 있으니 끝까지 데리고 가려고 할 겁니다, 저희는 헬하임 제국으로 가 먼저 할 일을 끝내고 그때 구하면 됩니다."
"... 응."
아르웬은 클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검자루를 꾹 쥐었고 칠러웨이는 그런 그녀에게 괜히 미안해 한숨을 내쉬었다.
"곧 있으면 헬하임 제국에 도착하니... 나는 나대로 행동하도록 하지."
"예."
"자네는 무언가 계획이 있나 칠러웨이?"
"아뇨.. 저는 칠라렌 성국 밖에 가본 곳이 없습니다."
"골치 아프구만."
"하지만 아르웬님을 이용해 그들을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음... 어떻게 말인가?"
"그들은 주인 없는 기사입니다 그러니 무언가 지킬 것을 제공한다면.."
"안되네."
"예?"
클라인의 단호한 태도에 칠러웨이는 머리를 긁적였고 아르웬은 왜 안되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브라이언 공작이 웃은 이유를 아는가?"
"대충은... 하지만 키로스의 성녀라면..."
"그래도 안돼.. 분명 아르웬님은 성녀지만... 아마 신앙심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않을 걸세."
"...."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뭔지 아는가?"
"아뇨.."
"그들은 용병과도 똑같아 돈을 주면 돈을 주는 곳에 따라 움직이지 아무리 '기사'라는 칭호가 붙었어도 그들은 절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더 큰돈을 주면 그곳으로 움직이고 더 큰 힘이 자신들을 부르면 그곳에서 싸우지 즉, 돈과 확실한 승리에만 자신들의 힘을 쓴다 이 말일세."
"...."
"그들에게 우리의 상황을 다 말해준들 들을 이유가 뭐가 있겠나? 이미 그들은 헬하임 제국의 손 위에서 놀고 있고 성국 또한 움직인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들은 분명 강자인 그들에게로 붙을 텐데."
"그럼 심어주면 됩니다."
"무엇을?"
"명예를요."
"....?"
클라인은 칠러웨이의 말이 어떤 뜻인지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칠러웨이는 그저 미소를 지어주고는 아르웬을 이끌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클라인님도 조심하십시요 용병들이 클라인님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리에티에게 어떤 제안을 받았을 지도 모르니까요."
"물론일세."
"그럼 일주일 뒤에 이 자리에서 뵙도록 해요."
"후후.. 칠러웨이!"
자신만만한 칠러웨이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클라인은 주름진 눈으로 미소를 짓고는 그를 불러 세웠다.
"예?"
"받게나."
그가 던져준 것은 자유 기사들이 시험을 봐 등급을 올릴 수 있는 문서 중 하나였는데 칠러웨이가 그것의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클라인은 그의 목에 걸려있는 금 간 나무패를 가리켰다.
"아무리 자네가 실력이 좋다고 해도 그들은 나무패 자유 기사는 거들떠도 보지 않아 그러니까 그들의 본거지로 도착하자마자 시험부터 보게, 적어도 금패 정도는 따놔야 발언권이 생기지 않겠나?"
"아..."
"하하하! 그럼 다음에 볼 때 서로 사지 멀쩡한 채로 보세, 그리고 아르웬님은 자네가 꼭 지켜드리고.. 힘든 일 있으면 내가 준 반지 기억 나나? 설마 자네... 버린 것 아니겠지?"
"아.. 아니요! 있습니다 주신 것을 버리다니.. 그런 짓은 안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하하하하! 문양이 새겨진 용병단으로 찾아오게 내가 최대한 도움을 주려 노력해보지."
"감사합니다.. 꼭 필요할 때 쓰도록 할게요."
"하하하! 그러지 말게 용병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 쓰라는 얘기일세 반지가 일회용도 아니고 한 번만 쓰지 말고 여러 번 사용해도 도와줄 수 있네."
클라인에게 고개를 숙인 칠러웨이는 품속에 고이 넣어둔 반지를 꺼내어 조용히 살펴보고는 아르웬과 함께 길을 내려갔다.
".... 아르웬.. 저거.."
"응?"
"저거.. 맞죠?"
"응.. 헬하임.. 제국."
톤 왕국을 포함한 이곳으로 오는 이들을 압도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국경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문에 칠러웨이는 압도되어 멍하니 그 문을 바라봤다.
"칠러.. 웨이?"
"아 죄송합니다.. 저런 것은 처음 봐서..."
잠시 멍하니 있던 자신의 이름을 아르웬이 부르자 칠러웨이는 정신을 차리고 경비병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톤 왕국에서 오는 마차들을 검사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거대한 제국의 병사인 것이 자랑스러운 듯 그들은 가슴을 당당히 펴고 있었다.
'자세부터 다르네.'
"안녕하십니까, 헬하임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마치 게임 속에 나오는 NPC처럼 딱딱한 말투였지만 칠러웨이는 왠지 모를 압도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지만 저희에게는 처음 보는 얼굴들인지라.. 혹시 신분을 밝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잠시 칠러웨이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아르웬을 바라봤다, 눈에 띄는 흰 원피스를 벗고 평범한 평민 여자아이처럼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매일 신고 다니지 않던 가죽 신발이 익숙지 않은 듯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쪼개진 나무 패였지만 칠러웨이는 병사에게 그것을 건넸고 조용히 그를 살펴보던 병사는 아르웬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칠라렌 성국에서 오신 자유 기사분이시군요... 그럼 이분은..?"
"제 아내입니다."
"...."
병사의 물음에 칠러웨이가 대답하자 아르웬의 얼굴이 새빨게졌지만 칠러웨이는 신경 쓰지 않고 병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인되셨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요 자유의 기사 칠러웨이님."
예의 바른 병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아직까지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르웬을 이끌고 칠러웨이는 주변을 살폈다.
"헬하임 제국에서는 자유의 기사를 천대하지 않는군요."
"응.. 아무래도.. 헬하임 제국은.. 자유의 기사가.. 탄생한 나라이니까... 칠러웨이가.. 아무리 나무 패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그들을 천대하는 것은... 전설의 자유 기사인.. 데브라를 욕보이는 것..."
"데브라요?"
"그는.. 헬하임 제국을... 다시 일으키고 제국이라는 칭호를 붙인... 전설의 기사... 무패의 전설..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어..."
"호오..."
"지금은 굉장히 노인이 되었지만... 브라이언과 맞서도 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내가 예전에... 그들의 대련을 본 적 있는데... 그들의 실력은... 최상."
짧은 아르웬의 설명이었지만 칠러웨이의 머리에는 무언가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고 그는 아르웬의 어깨를 붙잡았다.
"생각났어요!"
"....?"
"아르웬님 덕분에 무언가 일이 쉬워질 것도 같아요!"
"그럼... 다행.."
"가요! 일단은 금패가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