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눈앞에 다가온 기회는 잡으려 노력해야 한다.
* * *
"하아... 하아..."
쓰러져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보던 아르웬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덤벼드는 리에티의 병사를 순식간에 베어넘겼다.
"항복하십시요 성녀님."
"...."
기사 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와 아르웬에게 경고하듯 빙글빙글 검을 돌렸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성녀님.. 가셔야 합니다."
"너희들을... 두고 가지... 못해."
".... 성녀님."
자신들을 과거부터 챙겨온 성녀의 앞에 서서 그들은 적들을 막아내려 했지만 그 수가 상당해 오래 막지는 못할 것 같았다.
"가.. 칠러웨이를 데리고."
아르웬은 그들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를 띠며 톤 왕국의 방향을 가리켰지만 기사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키고 서있었다.
".... 아르웬."
"칠러웨이! 괜찮아?"
하지만 그 순간 정신을 차린 칠러웨이가 말에서 내려와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아르웬과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칠러웨이?"
"기사들은 들으세요."
아르웬이 칠러웨이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기사들을 바라봤다.
"아르웬을 데리고 가세요."
"칠러웨이!!!"
"저희는 명령에만.."
"일루안님의 대리인으로 명령합니다!"
칠러웨이가 일루안의 반지를 꺼내들며 소리치자 아르웬의 기사들은 잠시 움찔하더니 아르웬을 번쩍 들어 올렸다.
"놔!! 칠러웨이가!!"
"절대, 절대 다시 오게 하지 마세요."
칠러웨이는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아르웬을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린 채 남은 화살 한 개를 뽑아 바닥에 툭 던졌다.
".... 네가 리에티님과 엘라님이 말한 칠러웨이라는 자로군."
"그 사람들 이름 말도 꺼내지마."
"네놈도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우리를 원망하지 말거라."
"내가 할 소리야."
"저 자를 죽여라! 살리지 않아도 된다!"
달려온 기사들은 칠러웨이의 몸에 검을 꽂으려 했지만 칠러웨이는 능숙하게 피해내며 두 기사의 목을 떨어뜨렸다.
"왜 그렇게 저항하는 거지?"
"저항?"
"그래."
자신에게 말을 건 기사가 물어오자 칠러웨이는 얼굴에 묻은 핏방울을 슥 닦아내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칠라렌 성국은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 나는 그걸 도와주려 왔었던 거고 하지만 지금 도와준 사람들에게 또 배신당하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지킨다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
".... 배신?"
"그래, 절대 안 믿겠지만."
잠시 생각에 빠진 칠라렌의 기사는 칠러웨이에게 덤비려는 기사들을 멈춰세웠다.
"그만."
"벡커님!"
"그만하라고 말했다."
"리에티님이 화내실 겁니다!"
".... 나는 한 번만 얘기하는 게 좋다고 말했는데."
".... 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길 바라겠다, 시체를 수습하고 돌아간다."
"예... 예.."
벡커라고 불린 남자는 기사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자리를 뜬 사이 칠러웨이를 조용히 바라봤다.
"칠러웨이, 왜 다들 당신을 못 놔줘서 안달인지 이제야 알겠군."
"....."
"그 치유력, 분명 키로스 신이 내려주신 거겠지."
"그 신이 다스리는 이 칠라렌 성국이 날 버리고 그의 자식들이 날 죽이려 했으니.. 이 능력을 내려준 게 그 신이라면 저주인가?"
"신을 모욕하지말게."
벡커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칠러웨이는 그 모습이 부담스러워 눈을 피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 내려주신 것이던 뭐든 나는 잘 몰라, 하지만 뭔가 더럽게 꼬였다는 건 알 것 같네."
"결국에는 그 힘에 대한 것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
"으음... 신의 사자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여섯 번째 성녀.. 도 아니겠군."
벡커는 알듯 말듯 한 얼굴로 조용히 턱을 괴더니 결국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칠러웨이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건..?"
"나의 뜻으로는 키로스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 그런 것 같네."
"하지만 리에티가 너를 노릴 때부터.. 칠라렌 성국의 모든 귀와 눈은 자네에게 갔어 그렇다면... 무언가 뜻이 있다는 거겠지."
"...."
"그건 교황님이 자네에게 가져다주라는 물건일세."
"라티에니 교황이..?"
"그렇네."
칠러웨이가 건네받은 물건은 키로스 신의 징표였는데 그 천에는 교황의 태양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교황이 이걸 왜.."
"아마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신 모양이네, 리에티가 토벌대를 전멸시키려는 것도 자네 또한 설득시키지 못하는 것도."
"나를 알고 있어..? 교황이?"
"그렇다."
"왜..?"
하지만 갑자기 숲이 소란스러워지자 벡커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칠러웨이에게 손짓했다.
"가게."
"대답은 해주고 가야지!"
".... 나는 모든 걸 알지 못하네 내가 들은 것은 자네가 이 칠라렌 성국을 떠난다는 것."
"...."
"마지막으로 교황님의 말씀이네."
"교황의 말..?"
"그래 이렇게 말씀하셨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짧게 남기네, 무슨 일이 있어도 키로스님을 너무 미워하지 말게.'라고."
"미워하지 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군.. 얼른 자신의 길을 찾아 가게."
"교황은 그렇다 치고 당신은... 누굽니까?"
"나중에 다시 만나지."
벡커는 칠러웨이에게 손을 흔들고는 다가오는 병사들에게 다가갔고 칠러웨이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숨겼다.
"벡커님!"
"아 왔는가?"
"적들은 발견하셨습니까?"
"뭐.. 발견했지만.. 놓쳤네."
".... 알겠습니다! 주변을 뒤져라!"
"곧 만나지 칠러웨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백인대장은 주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벡커는 조용히 칠러웨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허억.. 제길."
기사들과 병사들을 피해 도망가던 칠러웨이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왜 이런 일에 자꾸 휘말리는 건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브라이언의 반지를 보며 칠러웨이는 투덜거렸지만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1분 1초가 아까웠다.
"그래.."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본 칠러웨이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일루안이 자신에게 준 검을 천을 찢어 몸에 꽉 묶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어.. 가야 한다."
크게 심호흡을 한 칠러웨이는 점점 빨라지는 물길에 몸을 맡겼고 그는 순식간에 물에 잠겼다.
"흐으읍!"
겨우 물 밖으로 머리만 빠져나온 칠러웨이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고 아르웬을 데리고 떨어졌을 때의 풍경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두 번째.'
칠러웨이의 생각대로 두 번째 겪는 일이었다, 칠라렌 성국으로 잘 돌아가면 절대 하기 싫었던 것을 또다시 하게 된 자신이 바보 같았지만 목숨이 위험한 이들은 자신에게는 이 세계에서 가족과도 같았다.
'다들 살아있어야 할 텐데.'
칠러웨이가 커다란 폭포에서 떨어지는 순간 든 생각은 자신의 목숨에 대한 안위가 아니었다, 화살에 맞아 쓰러진 일루안과 나머지 이들에 대한 생각뿐.
"...."
이윽고 칠러웨이의 몸이 물속에 떨어졌고 그의 의식이 잠깐 끊겼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고 겨우 물 위로 올라온 곳에는 서있었다.
".... 이봐 올라오는 것을 멈추게."
그의 목에 검이 겨눠졌지만 칠러웨이는 오히려 그의 검을 잡으며 무거운 몸을 끄집어 올렸다.
"여기는.. 어디지?"
"뭐.. 칠라렌과 톤의 국경일세?"
"...."
아직까지도 국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 분했는지 칠러웨이는 한숨을 쉬며 날을 꽉 움켜쥐었다.
"안 아픈가?"
"...."
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칠러웨이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그 모습을 본 남자는 징그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허억... 허억.."
"...."
칠러웨이의 목에 검을 겨눈 남자는 검의 날을 잡으며 올라오는 그의 모습에 감명받은 듯 감탄사를 뱉었지만 이미 몸에 힘이란 힘이 다 빠진 칠러웨이는 그에게 딴죽을 걸 힘도 없었다.
"칠라렌의.. 기사인가?"
"칠라렌? 뭐.. 그렇다고 치지."
"1 토벌대는 어떻게 되었지?"
"뭐.. 알아서 했다."
"...."
물속에 꽤 오래 있어서 인지 고개를 들 힘조차 없던 칠러웨이는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남자의 발목을 잡았다.
"날.. 보내주면 안 되겠나?"
"국경을 넘어 탈출한 죄인을 보내달라니?"
"...."
"게다가 자네,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 않나?"
"제길.."
"자네를 칠라렌 성국으로 데려가면 큰 상을 받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쪽이 이득이지! 보아하니 돈도 없어서 나한테 줄 것도 없어 보이는구만!"
남자의 말에 반박할 수 없던 칠러웨이는 결국 모든 힘이 빠져 진흙 속에 얼굴을 처박았고 남자는 혀를 차면서도 그를 바라봤다.
"쯧쯧.. 자기가 국경을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도 모르고 쓰러지면 어떡하나?"
어느새 회복된 칠러웨이의 손을 바라본 남자는 그를 끌어당겼지만 칠러웨이가 떨어진 방향에서 나타난 기사들의 기척을 느끼고 그는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아, 반갑군 피론 도련님이었던가?"
"... 그 자를 넘기게."
"으음..."
숲을 수색하던 피론은 물에 떠내려가는 칠러웨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폭포 쪽으로 기사들과 함께 달려왔지만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보며 검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 톤 왕국의 브라이언."
"내 이름을 기억하시는구만!"
"다시 경고하지 그 자를 넘기게, 또한 이곳으로 도망쳐온 1 토벌대를 넘긴다면..."
"1 토벌대건 뭐건 나는 모르네, 이 자는 우리 톤 왕국으로 넘어왔고 만약 그쪽 성국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 선에서 알아서 잘 처리할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멈추게."
피론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사람 좋게 미소를 짓던 브라이언의 표정이 굳더니 검자루 위에 그의 손이 얹어졌다.
"두 번 얘기는 안 하겠네, 만약 한 걸음이라도 이곳으로 넘어오는 자들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을 게야."
"...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죄인.. 만약 넘기지 않는다면 넘어갈 수밖에요."
"전쟁을 하자.. 이 의미인가?"
"필요하다면 교황님께서도 허하실 겁니다.. 브라이언 공작, 그들만 넘긴다면 나라 사이의 문제도 없을뿐더러 저희도 조용히 가겠지만..."
피론의 말을 조용히 듣던 브라이언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협박인가?"
"협박으로 들린다면.."
"해보게."
".... 뭐라...?"
"해보라 이 말일세."
브라이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에서는 지독한 살기가 흘러나오며 칠라렌 성국 기사들의 몸을 옥죄었고 무겁게 짓눌렀다.
"... 후회하지 마십시요, 당신은 혼자입니다."
"안 하네."
".... 죽여라, 당장 칠러웨이를 이 앞으로 끌고 와.. 먼저 저 브라이언 공작의 목을 가져온 자에게는 백작의 자리를 주겠다."
피론의 말이 들리자 기사들은 용수철 튀어나가듯 순식간에 앞으로 뛰어나갔고 그에 맞춰 브라이언은 검자루를 쥐었다.
"끄아악!"
"커.. 어억.."
"뭐..?"
순식간에 브라이언에게 다가간 세 기사의 목이 날아가고 브라이언의 공작의 입가에는 미소가 띠어졌다.
"더 안 오나?"
"...."
"얼른 오게, 내가 시간이 없는 사람이라."
"...."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그의 빠른 검술에 기사들은 앞으로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결국 브라이언의 움직임에 따라 그들은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가라, 칠라렌 성국의 개들아 너희 교황에게 전해라.. 다시 이곳으로 기사를 보낸다면 브뤼헤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직접 모두 쓸어주겠다고."
그의 얼굴은 아까와는 달리 무표정하게 굳어있었고 피론 또한 입술을 꽉 깨물고 뒤돌아섰다.
"후회할게요 브라이언 공작."
피론의 기사들이 길을 따라 칠라렌 성국 방향으로 사라지자 브라이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이, 아직도 안 일어났나?"
"...."
"얼마나 힘이 들었기에.. 하하! 실례를 무릅쓰고 자네를 데려가 주지!"
칠러웨이의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톤 왕국을 향해 걸어가던 브라이언은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듯 얘기했다.
"얼마든지 오게 성국이여, 우리는 너희의 신이 내린 축복으로 상대해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