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눈앞에 다가온 기회는 잡으려 노력해야 한다.
* * *
"주변을 경계해라."
"예."
주변을 살피며 고지를 내려오는 병사들은 불에 타 까맣게 변한 키메라들이 일어날세라 창을 꽂아 넣으며 조심스럽게 발을 땠다.
"이제 알아서 척척이네요."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니 어느 정도 숙련이 된 거겠지.. 게다가 용병들도 함께 있으니 이런저런 것들을 배웠을 거야."
몰라보게 변한 병사들의 모습에 칠러웨이는 놀라워했지만 일루안은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 잠깐."
"멈춰!"
일루안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옆을 걷고 있던 클라인과 게리는 병사들을 멈춰세웠고 눈치가 빠른 카일록과 그의 기사들은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 살아있으셨군요."
이윽고 나타난 대규모의 부대는 모두 중무장한 상태로 일루안의 토벌대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들의 사이에서 등장한 리에티 또한 질긴 그들의 목숨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럼! 내가 누군데? 칠라렌 성국의 지휘관 출신 일루안 아닌가!"
"쯧."
일루안의 당당한 태도에 혀를 찬 리에티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병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활을 들어 올렸다.
"무슨 짓이지?"
"모두 그 위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에는 제가 손을 쓰게 만드는군요."
"... 미쳤나?"
일루안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표정으로 리에티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리에티는 그제서야 만족한 듯 씨익 웃었다.
"아뇨,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계획이 망가지는 게 싫을 뿐."
"이런 개같은..!"
"여기 있는 용병들까지 죽이겠다는 소리입니까?"
"흥, 나를 배신한 건 당신들입니다."
클라인이 앞으로 나와 앞을 가로막아봤지만 리에티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기사들도 죽이겠다 이건가?"
"제1 토벌대는 범죄자 집단입니다, 당연히 죽여야죠."
"예상은 했지만.."
칠러웨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카일록을 보며 대신 앞으로 나섰다.
"기사들은 아무 죄도 없지 않나?"
".... 칠러웨이."
리에티는 칠러웨이의 얼굴을 보자 짜증이 난 듯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기세였지만 그저 칠러웨이를 노려보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죄인이라 하더라도 모두 인간이야."
"인간이 됐으면 범죄는 저지르면 안 됐지."
"...."
"기사들은 들으라!"
리에티의 말에 1 토벌대와 함께 섞여있던 기사들은 고개를 번쩍 들고 리에티를 바라봤다.
"1 토벌대에서 고생한 카일록 단장의 공을 인정해 그와 너희까지 살려주겠다, 살고 싶다면 당장 이곳으로 넘어오도록."
그의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지자 기사들은 웅성거렸지만 카일록은 말없이 가만히 있을 뿐 리에티의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카일록님.."
"너희들은 살 거라."
"...."
"나는 지은 죄가 있어 이곳에 남겠다, 나도 범죄자와 마찬가지니.."
"하지만..!"
"너희들도 소문을 알고 있겠지? 내가 기사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걸."
"...."
카일록의 말에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고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거라."
"...."
하지만 어떤 기사도 카일록의 말에 움직이지 않았고 카일록은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뭐 하는 것이냐?"
"저희는 가지 않습니다."
".... 살고 싶지 않나?"
"아닙니다.. 저희도 살고 싶습니다.. 다만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저희가 봤던 카일록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저희 기사단 전원을 챙기시지 않았습니까?"
"....."
"저 고지에 올라가 키메라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기사들을 살리려 노력하신 걸 봤습니다 또한 리에티 저자는 저희를 불태우려고 했고... 저기에 있는 그 누구도 지금은 카일록님보다 믿을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지 않겠습니다.."
"멍청하긴..."
카일록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
리에티는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한 듯 눈을 찌푸렸고 일루안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쩌나? 네가 심어뒀던 기사들도 우리 편인 것 같은데?"
"우쭐대지 마십시요 일루안, 애초에 아무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
"하지만."
리에티는 일루안의 옆에 멀뚱멀뚱 서있던 칠러웨이를 가리켰고 칠러웨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칠러웨이, 네놈에게는 선택을 할 기회를 주겠다."
"... 뭐?"
"엘라님과 에일렌이 너를 꽤나 생각하는 것 같더군..."
"...."
칠러웨이는 두 여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리에티는 그가 흔들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네가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면 성기사 자리를 주도록 하지, 또한 아빌론과 함께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게 해주겠다."
"....."
리에티의 말에 칠러웨이는 침묵했고 일루안과 카일록은 그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 정도라면 저 남자도 올 거다.'
리에티가 들었던 칠러웨이의 특별한 능력은 분명 칠라렌 성국에 쓸모가 있을 것이었고 그의 능력이 있다면 그의 계획은 완벽해질 것이 뻔했기에 그는 대담한 배팅을 했지만 칠러웨이는 생각이 끝난 듯 가운뎃손가락을 그에게 펼쳐 보였다.
"안 가."
"뭐..?"
"안 간다고."
"...."
"한두 번 속는 것도 아니고... 이젠 지쳤어 그리고 여기에는 성녀가 하나 더 있거든."
"아르웬.."
칠러웨이가 가리킨 곳에는 아르웬이 백금으로 만들어진 검을 뽑아들고 리에티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녀의 기사들 또한 당한 것이 있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 뭐 예상은 했다.. 교황님의 검으로써 말한다! 토벌의 명령을 받은 일루안은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고 숲속으로 도망친 후 교황님이 내려주신 제1토벌대를 멋대로 지휘하며 다섯 번째 성녀까지 포섭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니 저들 모두를 이곳에서 처형한다!"
결국 리에티는 혀를 차며 말을 돌렸고 그 순간 수백 개의 화살이 토벌대에게 쏟아졌다.
"... 이런.. 멍청한 새끼가!!!"
"피하십시요! 일루안!"
"끄윽!"
일루안이 리에티에게 욕하려 앞으로 나갔지만 화살 몇 개가 그에게로 떨어졌고 클라인이 나설세도 없이 일루안의 가슴에 화살 하나가 꽂혀버렸다.
"제길!!! 일루안!"
"게리!! 당장 후퇴한다!"
"내가 들지!"
일루안이 바닥에 쓰러지자 게리는 그를 둘러업고 병사들과 함께 숲속으로 뛰어들어갔지만 칠러웨이와 카일록은 방패를 들고 다른 이들이 피할 수 있도록 앞을 막아섰다.
"카일록!"
"제길! 뭔가!"
"당장 가서 기사들과 함께 지휘하세요! 병사들을 모두 죽게 내버려 둬선 안됩니다!"
".... 알겠네! 모두 병사들을 후퇴시킨다!"
"명!"
카일록이 기사들과 함께 병사들을 후퇴시키며 게리를 따라 숲속으로 사라지자 칠러웨이는 핏줄이 선 눈으로 리에티를 바라봤다.
"네 선택이다 칠러웨이."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겠다!"
칠러웨이는 1 토벌대의 병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참지 못하고 방패를 옆으로 집어던졌고 화살들이 그의 온몸에 꽂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떨어진 창을 들어 리에티에게 던졌다.
"이런!"
카앙!
".... 아빌론!"
".... 미안하네 칠러웨이."
방심한 리에티가 창을 늦게 보고 검을 뽑아들었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아빌론은 그 창을 쉽게 쳐내며 리에티의 앞을 지켰다.
"어째서...!"
".... 성녀님의 명령이네."
"엘라가...!"
"잘 가게 칠러웨이."
칠러웨이의 몸에 수백 개의 화살에 꽂히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는지 아빌론은 고개를 돌렸다.
"아빌론!!!! 엘라!!!! 당신들이 어떻게!!!!"
그의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지며 눈에 꽂힌 화살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칠러웨이는 검을 뽑아들었다.
"칠러웨이를 막아!"
그 순간 아르웬의 목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기사들이 칠러웨이의 양 팔을 잡은 채 방패로 화살들을 막았고 아르웬 또한 능숙하게 화살들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아... 르... 웬... 저는..."
"말하지 마.... 칠러웨이, 지금부터.... 일루안 대신... 내가 명령할 거야... 모두.. 도망치는 데만 집중.. 해!"
"명!"
아르웬의 명령이 들리자 그녀의 기사들 또한 쫓아오는 리에티의 병사들의 앞을 막아섰고 수십 개의 창에 찔리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아르웬을 위해 바치며 죽어갔다.
"리.. 에티를... 죽여야.. 합니다.."
"가만히.. 제발.. 기사들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죽어가.. 그리고.. 나는 칠러웨이.. 너도 잃기 싫어..."
아르웬은 말을 몰면서도 칠러웨이의 몸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며 눈물을 흘렸고 칠러웨이는 멍한 얼굴로 검을 놓지 않고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리에티의 이름을 불러댔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새 적들을 따돌렸는지 아르웬의 옆으로 다가온 카일록은 그녀에게 소리쳤지만 아르웬의 머리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톤! 톤 왕국으로 가야 합니다!"
"리타!?"
등에 화살이 꽂힌 채 아르웬과 카일록에게 다가온 리타는 피를 많이 흘렸는지 핏기가 빠진 새하얀 얼굴로 칠러웨이의 반지를 가리켰다.
"칠러웨이님이 낀 반지! 저건 톤 왕국의 브라이언 공작의 반지입니다! 게다가 그는 타국에서 오는 병사들을 가로막지 않고 받아들이니 그곳이 최적의 피난처 일 겁니다!"
"... 하지만.. 톤 왕국은 칠라렌 성국보다 보수적이라는 말이 있어."
"그건 나중의 문제입니다.. 윽!"
"괜찮나?"
"괜찮습니다! 지금은 이 많은 병력을 끌고 후퇴할 가까운 곳은 톤 왕국밖에 없습니다! 그곳으로 가 감옥에 갇힐지 언정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길! 아르웬의 호위 기사들과 기사들은 들으라! 모든 병사들에게 톤 왕국 방향으로 뛰라고!"
"하지만.. 넘어가지도 못하고 모두 죽으면 어쩝니까!?"
"살길만 생각해! 죽을 생각하지 말고!!!"
"제길!"
한 기사가 카일록의 명령에 반박했지만 카일록은 그의 머리를 후려치며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이제 말하지 말고 뛰어!!!! 모두 이 숲에서 죽기 전에!"
"명!"
"무운을 빕니다 아르웬님! 그를 꼭 붙잡으십시요!"
카일록의 명령에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고 아르웬 또한 카일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칠러웨이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꽉 붙잡았다.
"저도 일루안님에게 가보겠습니다 아르웬님! 무운을!"
"응..!"
리타까지 게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말을 몰아 사라지자 주변은 리에티의 기사들의 소리로 가득했고 아르웬은 조용히 검을 뽑아들었다.
"이번에는.. 꼭 내가 너를 살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