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하늘도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 * *
"공격해!"
둥! 둥!
커다란 북소리가 울리며 많은 수의 병력이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지만 맨 앞의 병사들은 몸을 벌벌 떨며 움직이지 않는 발을 떼어야만 했다.
"제길.."
그중 그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긁적였지만 그는 빠르게 눈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칠러웨이!"
"예!"
"게리와 함께 맨 앞에서 지휘를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믿고 있습니다!"
칠러웨이는 어느새 1만 이상이 되어버린 제1 토벌대의 병사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게리, 믿을 만한 사람들은?"
"못 구했소."
"제길.. 심각하군."
제1 토벌대의 상황은 심각했는데 관리를 위한 기사들은 전투가 일어나면 항상 뒤로 빠져있었고 꽤나 높은 직위의 카일록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래서는 통솔이 되지 않아 쯧.. 개 같은 자식들이 어디까지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칠러웨이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1 토벌대가 도망치지 않도록 창을 세우며 다가오는 병사들을 보고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쩔 수 없지 이게 우리의 현 상황이니."
게리 또한 분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자신이 지휘관이었더라도 범죄자들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에트가 사라지고 구울이 더 날뛰고 있으니.. 제길 잘못 건드렸나."
칠러웨이는 눈을 뻘겋게 물들이고 다가오는 구울을 베어버리고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겁도 없이 앞으로 나온 지휘관을 처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자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말게."
"...."
"일단은 뒤로 물러날 곳이 없으니 일루안님이 얘기했던 대로 최대한 막아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
그렇게 게리와 온몸에 피를 묻히며 얼마나 구울들을 베어냈을까 다시 나타난 일루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 길 헉.. 헉... 말이 없으니 힘들어 죽겠군 쿨럭!"
"어떻게 되셨습니까?"
기침을 하는 일루안의 등을 두들겨 준 칠러웨이는 일루안의 다리를 물려 기어 오는 구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뭘 어떻게 되긴! 안됐지!"
"...."
"병사들에게 알리게, 최대한 죽지 말고 버티라고."
"후우..."
"다시 한번 두 사람에게 얘기하지만 퇴각은 없어, 저들의 공격이 멈출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네."
"제기랄!"
"칠러웨이."
칠러웨이가 일루안의 말에 검을 던지려는 순간 한 여인이 나타나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르웬 언제 오신 겁니까?"
갑자기 나타난 아르웬이 놀라기도 했지만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 같아 칠러웨이의 마음 한편이 편해졌다.
"나는.. 칠러웨이를..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어."
"아니.. 뭐... 예.."
"그러니 앞으로는 이곳에 머무를 거야."
"예? 최전방에 말입니까?"
"그래."
".... 마리아님이나 둘째분께서는 허락하신 겁니까?"
"상관없어."
"... 아니.. 뭐.."
칠러웨이는 자신 때문에 이곳에 온 아르웬에게 감동받기도 했지만 강해 보이는 그녀에게도 체력적인 약한 부분은 있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응?"
"나만 온 게 아니야."
".... 일루안님.. 저거.. 혹시.."
"오호."
아르웬의 뒤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들을 바라본 일루안의 입에 환한 미소가 걸리자 칠러웨이 또한 울먹이며 아르웬을 껴안았다.
"고마워요!"
"아.. 아..."
"정말 고마워요 아르웬!"
"그... 그게.. 놔.. 놔 줘 칠러웨이..."
아르웬이 칠러웨이의 품에서 발버둥 쳤지만 칠러웨이는 그녀를 놓기는커녕 더 강하게 껴안았다.
"그만 놔주게, 더 안고 있다가는 저들에게 죽을 거야."
"아 예."
다가온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칠러웨이를 벨 기세였지만 아르웬은 그들을 멈춰세우고 앞의 키메라들을 가리켰다.
"모두 죽여."
"명."
300기에 가까운 기사들은 구울들을 순식간에 베어내고 앞으로 치고 나갔고 그들의 무력에 힘입어 게리와 병사들 또한 쉽게 남은 구울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르웬님에게도 기사들이 있었습니까?"
"아 아르웬님은 바쁘시니 그건 내가 설명해 주지."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베어내는 아르웬을 보고 일루안은 기사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아마 성녀들에게 배치된 기사단일 거야 첫 번째 성녀 엘라님은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기사 오백 명을 가지고 계시고 전에 만났던 사엘라 기억하나?"
"예."
"그녀가 부단장, 아빌론이 단장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아.."
"두 번째 성녀님은 전장에 많이 나서는 분답게 천명이 넘어가는 기사들을 보유 중이시지 세번째 성녀님께서는 엘라님과 같은 오백 명, 다섯 번째 아르웬님의 경우에는 삼백이지만 그 충성심과 무력은 성국 내에서 최강일거야 톤 왕국의 브라이언 기사단과 맞먹을 수준의 실력들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저렇게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군요."
"불도저?"
"아 순식간에 쓸어버린다 뭐 그 뜻입니다."
"그렇구만, 어쨌든 최고의 기사단이라 생각하면 되네."
"그럼 네 번째 성녀는?"
"그분은 특이하게도 열 명의 기사만 보유 중이시네, 뭐 직접적으로 전장에 나온 적은 없지만 하나하나가 아빌론 급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
"호오.."
"아! 그리고 성기사들은 라티에니 교황님의 직속이네 그들은 교황님의 명령에만 움직이고 명령에 죽지 그렇지 않은 자들도 몇몇 있긴하지."
"잘 알겠습니다."
일루안의 얘기를 듣고 칠러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벌써 20마리가 넘는 키메라를 눕힌 그들과 아르웬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도움이 있으니 우리도 빨리 처리하고 쉬어야겠지!"
"방법이 있으십니까?"
"내가 며칠 동안 밤새 연구해봤는데..."
"예."
일루안은 칠러웨이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독한 술이 담긴 병에 불을 붙였다.
"그건..?"
"제1 토벌대에게만 지급되는 보급 술이지, '취해서 고통도 모른 채 싸우다 죽어라'라는 뜻이겠지만.. 그렇게 쉽게 죽어줄 수 없지 않나?"
일루안은 말이 끝난 후 구울들에게 술을 던졌고 불이 붙은 구울들은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쳤다.
"그리고 미네르 숲은 현재 말라비틀어진 잎이 많이 떨어져 불에 잘 타기도 할 때지! 바람도 딱 좋겠다! 모두 던져!!"
일루안이 데리고 갔던 몇몇 병사들은 병에 불을 붙이고 계속 던졌고 불은 순식간에 숲으로 번져나갔다.
"오우."
"이렇게까지 잘 탈 줄이야."
칠러웨이는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고 일루안 또한 삽시간에 번지는 엄청난 불길에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아르웬! 기사들과 물러나요!"
"응.. 물러나!"
칠러웨이에 외침에 아르웬은 기사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고 불타는 키메라들과 구울들을 바라봤다.
"역하군."
"예.. 역하죠."
인간의 신체로 이루어진 키메라와 수분이 말라 장작과도 비슷한 구울들의 냄새는 일루안의 말대로 역했다.
"게리!"
"예!"
"덤벼드는 녀석들은 창으로 밀어내게!"
"알겠습니다!"
"기다려라!"
"....?"
"왔군."
점점 불이 번지며 숲이 크게 타오르자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에티가 누군가와 함께 일루안을 찾아왔다.
"무슨 짓입니까!"
"무엇을?"
"지금 이 불! 일루안님이 지르신 것 아닙니까!"
"맞네."
일루안은 리에티가 찾아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부정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 불을 지르다니!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 어째서라니.. 저들이 안 보이는가?"
일루안은 키메라와 구울들을 가리키며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리에티는 무언가에 불만이 있는 듯 얼굴을 붉혔다.
"숲에 불을 지른다면 이곳에 있는 많은 식물들은 어떻게 채취를 하며.."
"잠깐잠깐.."
리에티가 무언가 얘기를 하려 하자 일루안은 그의 입을 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말대로 이렇게 불을 지르면 채취는커녕 숲에 드나들지도 못하겠지."
"... 아시는 분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게, 식물은 이렇게 불을 질러도 다시 자라나네 저쪽 톤 왕국에서는 일부로 불을 지르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키메라와 구울은 전부 다 죽이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지 저 녀석들이 남아 있으면 채취는커녕 이 숲에 들어오지도 못하는데 어차피 기왕 이렇게 된 거 모두 태워 죽이고 안전하게 만드는 게 더 좋지 않겠나?"
"...."
"후훗."
리에티를 따라온 라티엘은 긍정이라도 하듯 일루안의 말을 들으며 웃었지만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론과 에일렌은 그렇지 못했다.
"그 말은 말도 안 됩니다! 당장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피론 오라버니도 말씀을..!"
"에일렌 말이 맞습니다."
에일렌의 부름에 피론은 답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루안의 앞으로 나서서 숲을 가리켰다.
"저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급자의 허락'도 없이 불태우라고 명령하시면.. 안 되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루안."
"호오.. 상급자라."
피론의 말에 일루안은 피식 웃으며 불에 붙은 채로 뛰어오는 구울의 목을 베어냈다.
"이봐 필러 공작의 아들 피론."
"..."
갑작스럽게 바뀐 일루안의 분위기에 피론은 땀을 삐질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못해서 가만히 있는 줄 아나?"
"후작 자리에서 쫓겨난 당신이 감히..?"
일루안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피론은 무서웠는지 그의 눈을 피해버렸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일루안은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에일렌에게 다가갔다.
"필러 공작가의 딸 에일렌 맞나?"
"...."
"얻을 것이 분명히 많지 나도 모르지는 않아, 하지만 가장 저들을 '쉽고', '빠르게' 처리하는 방법은 이것이라 생각했지, 그리고 저들이 너의 눈에는 보이나?"
일루안이 가리킨 곳에는 범죄자로 이루어진 제1 토벌대가 얼굴에 검댕이를 묻힌 채 열심히 구울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아르웬의 기사단 또한 그들을 도와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 범죄자들이 저런 일을 하는 건..."
"범죄자들 또한 너와 같은 인간이다,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나 또한 저들이 저곳에서 고생하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나 또한 열심히 하는 중이고.. 하지만..."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일루안에 깜짝 놀란 듯 에일렌은 뒤로 물어나려 했지만 일루안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귀에 속삭였다.
[당장이라도 저 1 토벌대로 네 녀석들의 목을 노리고 싶지만 리에티와 함께했던 시간, 라티에니 교황님과 필러 공작의 얼굴을 봐서 가만히 있는 거다.. 더 이상 네 오빠나 네가 반기를 든다면 나로서는 '살려고' 발버둥 칠 수밖에 없어.]
"...."
일루안의 무서운 말에 조용해진 에일렌은 결국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제서야 만족한 듯 일루안은 리에티의 앞에 다시 섰다.
"더 이상 반대할 사람 있나?"
"...."
"좋아, 게리!!"
"예!"
"모두 태워버려."
"알겠습니다!"
"그리고.. 클라인!!!!"
일루안의 부름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용병대장 클라인은 검을 들고 리에티를 지나쳐 일루안의 앞에 섰다.
"고용주로서 명령하지, 용병들을 데리고 이제 제1 토벌대로 오도록 하게."
"예."
"무슨...!"
수천 명에 다다르는 용병들을 그냥 보낼 수 없는 리에티는 눈을 크게 뜨고 일루안의 멱살을 잡았지만 일루안은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1 토벌대의 지휘관으로서 할 일을 하는 거다.."
"으득.."
일루안의 말에 분노한 듯 리에티가 그를 째려봤지만 일루안의 표정은 '어쩔 건데?'라는 얼굴이었다.
"마음대로 해보십쇼."
"그래?"
"예! 마음대로 해보라는 겁니다! 그런다고 당신이 범죄자들 모두를 살릴 수는..."
"아르웬님의 기사단 또한 제1 토벌대로 포함시키겠다."
"....!"
"마음대로 해보라며?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갑자기 짜증이 나서 말이야."
"... 성녀가 왜... 당신의 토벌대로!! 어디서 그런 권한을 당신 멋대로 갖는 겁니까!!!"
결국 화가 터져 나온 리에티의 얼굴을 보며 일루안은 칠러웨이의 곁에 서있는 아르웬에게 얘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일루안에게.. 오고 싶다고.. 했어."
"....!"
"짐승처럼 우리를 대하면 나도 못 참을 것 같구만.. 이제 성녀님이 우리 토벌대로 확실하게 오셨으니.. 우리 1 토벌대는 따로 행동하겠다."
".... 말도 안 되는..!"
일루안의 말에 결국 리에티는 그의 멱살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성녀가 그의 토벌대에 포함되어버린 이상 건들 수 없었다.
"아르웬."
"라티엘.."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라고는 얘기하지 않았는데?"
아르웬은 라티엘이 조금은 무서운지 눈을 피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나도 성인.. 마음대로 행동할.. 권리가 있어."
".... 하아."
아르웬이 무서워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라티엘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자 라티엘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해."
".... 혼내지.. 않는 거야?"
"내가 왜?"
"...."
"너도 어엿한 성녀, 이제는 알아서 할 때가 됐지."
"...."
라티엘이 뒤돌아 자신의 기사단으로 돌아가자 아르웬은 밝은 표정으로 칠러웨이를 바라보았고 칠러웨이도 엄지를 척하고 치켜들었다.
"그럼 얘기는 끝이다 리에티."
"...."
용병들 또한 일루안을 따라 1토벌대로 이동하자 리에티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꽈악 쥐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피론."
"... 예 지휘관."
"그 계획을.. 앞당겨야겠습니다."
"예."
리에티의 얼굴 표정을 보고 피론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사라지자 에일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칠러웨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 어째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