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하늘도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 * *
"왔나?"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낡은 막사 안 일루안과 칠러웨이는 늦은 밤 다가오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들어가겠다."
"잘 왔네, 게리."
듬직한 덩치를 가진 남자 게리는 막사 안을 잠시 살펴보더니 칠러웨이가 가져온 통나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늦게 왔군그래?"
"..."
"뭐.. 저 덩치를 가졌으니.."
일루안의 말을 칠러웨이가 비꼬듯이 받아치자 게리는 기분이 언짢아진 듯 미간을 좁혔다.
"농담이야."
"저 친구가 좀 짓궃으니 이해해 주게."
".... 얘기는?"
게리가 자신을 째려보자 칠러웨이는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그가 이 정도 농담으로 사람을 헤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대충은 알았기에 그가 더 화나기 전에 입을 다물었다.
"아주 짧게 얘기하지, 우리 둘에게 협력했으면 하는군."
"협력?"
"그래."
"싫다."
"... 단칼에?"
일루안은 딱 잘라 거절하는 게리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말을 계속 이어갔다.
"왜 거절하는 거지?"
"당신은 귀족이지 않나?"
"전에도 말했었지만.. 그랬었지."
"내가 아는 귀족 녀석들은 모두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야, 물론 '그랬던' 녀석들도 그렇고 그런데 뭐 때문에 내가 너를 믿고 협력해 주어야 하지?"
"... 음."
일루안이 잠시 생각에 빠지자 칠러웨이는 통나무 하나를 가져와 일루안의 옆에 앉았다.
"뭐.. 그럼 내가 얘기해도 되나?"
"...."
게리는 전에 자신의 검을 막았던 그를 잠시 살펴봤지만 칠러웨이가 던져주는 반으로 부서진 나무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라."
"그래, 뭐.. 귀족이라고 생각해도 되지만 여기 이 아저씨는 토벌대를 전멸시킨 귀족으로 누명을 써서 범죄자가 됐다."
"칠러웨이.. 그 얘기는.."
"저랑 같은 생각이라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일루안님."
"...."
일루안이 조용해지자 칠러웨이는 다시 게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뭐 나도 마찬가지로 누명을 썼고..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저 아저씨도 귀족에서 박탈당해서 귀족은 이 자리에 없다는 얘기지."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결국 뭐지?"
"저 아저씨도 가족이 있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지."
"..."
"그리고 가족 얘기가 나올 때마다 화를 내는 것 같던데.. 게리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다시 한번 게리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었지만 칠러웨이는 아랑곳없이 말을 내뱉었다.
"나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 거절한다."
"이유가 뭔데!"
게리의 완강한 태도에 화가 났는지 결국 칠러웨이는 답답한 듯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너희에게 협력하면 너희는 돌아간다는 목적으로 이곳에 끌려온 녀석들을 이용수단으로만 사용하겠지."
"... 이용수단?"
"그래, 협력하는 건 사실 상관없다 나 또한 가족들에게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얘기고... 하지만 이곳에 끌려온 녀석들이 너희에게 이용당하며 죽어나갈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편하게 협력하지는 못하겠군."
".... 하하하하하!"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일루안은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게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럴 일 없다."
"....?"
"나는 이곳에 있는 녀석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 '최대한' 모두 살려서 칠라렌 성국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제 1 토벌대는 맨 앞에 배치된다고.."
"그렇지."
게리가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고 있자 일루안은 드디어 말이 통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진작 마음을 이야기해주었으면 모두 얘기해 줬을 텐데 그냥 내가 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싫은 것 같아서."
"아니다 그저 거절할 명분이 필요했을 뿐."
게리의 말에 일루안은 마음이 편해진 듯 대강 그려진 숲의 지도를 바닥에 펼쳤다.
"우리는 네 말대로 맨 앞에서 키메라들과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으며 정찰병 겸 방패 역할이 될 거다."
"... 역시 맞군."
"하지만 전에 얘기했던 대로 나는 목표가 있어, 모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면 제1 토벌대에 속한 모두가 나에게 협력을 해야 하지."
".... 쉽지는 않을 텐데?"
"그렇지."
게리는 자신이 봐왔던 1 토벌대의 범죄자 집단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일루안은 그 말에 동의했다.
"지휘관이 가장 필요한 이유를 아나?"
"... 이기기 위해서."
"그 얘기도 맞지, 하지만 승리를 하려면 병사들과 기사들을 통제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걸 위해 지휘관이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당신이 최대한 지휘를 잘 하면 되지 않나?"
"나 혼자서는 절대 못하지."
게리의 말에 일루안은 게리를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내 밑에서 제1 토벌대를 함께 관리해 주면 된다, 저들이 말썽을 부리지 못하게 칠러웨이와 함께 기강을 잡는 거지."
"하아.... 나는 그런 것 잘 못한다."
게리가 한숨을 내쉬며 거절하듯 말했지만 칠러웨이는 그의 말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
"당신 정말 잘할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마."
"...."
"우리 아버지가 그랬지,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으려는 인간이 참된 남자라고."
"남자?"
"사나이 말이야."
"...."
"너를 처음 딱 본 순간 일루안님과 나는 당신을 사나이로 인정했어."
칠러웨이의 칭찬과도 같은 말에 게리는 조금 부끄러운 듯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고 일루안은 그가 거의 다 넘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리, 우리 한 번 모두 살려보도록 하세."
잠시 고민을 하던 게리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일루안과 칠러웨이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고맙네, 합류해 줘서."
".... 오히려 내가 미안합니다 조금 오해를 해버려서."
"나는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아! 하하하하하!"
"앞으로 일루안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고맙네! 하하핫!"
일루안의 기분이 좋아지는 통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칠러웨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고 게리 또한 험상궂은 얼굴에 걸렸던 표정을 조금 풀 수 있었다.
"일루안님 그런데 제가 정확히 지금 해야 할 일이 뭡니까?"
"할 일이라.. 출발하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자네는 내가 계획을 짜고 있을 동안 저 녀석들을 통제할 사람들을 데리고 와주게, 절대 악행이 몸에 베어있어서도 안되고 어느 정도 강자여야 해."
"예,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지금부터 시비를 걸며 덤벼드는 녀석들이나 이미 무리를 이룬 놈들의 리더를 박살 내버려서 모두 자네들 밑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게."
"그거면 됩니까?"
게리의 물음에 일루안을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가리켰다.
"모두 살리려면 명령을 따르게 해야 해, 그것부터 하지 못하면 분명 싸움 도중 이탈자들이 계속해서 나올 것이고 우리는 칠라렌 성국의 군대와 키메라 사이에서 고립되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게리가 나가자 칠러웨이는 만족한다는 눈빛으로 그의 등을 바라봤다.
"듬직하네요."
"그래,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분명 속도 좋은 녀석일 거네."
일루안의 말에 칠러웨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게리가 막사로 올 때까지 지켜본 결과 그는 몸이 노쇠한 이들에게 직접 밥을 가져다주고 있었고 검을 휘두를 줄도 모르는 이들에게 자세를 잡아주며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한시름 놓았지만 잘 할 수 있을지.."
"뭐..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칠러웨이, 마음이 약한 사람 같으니 제대로 기강을 잡지는 못하겠지만 대부분 반항하지 않고 게리의 밑으로 들어올 거야."
"예 저 정도 덩치라면 그래야죠."
"하하핫!"
"그나저나 제가 할 일은 뭡니까?"
"사실 게리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믿을만한 놈들을 데려올 것 같지 않아, 칠러웨이 자네가 조용히 토벌대를 돌아다니며 게리와 같은 이들을 찾아와주길 바라네."
"제일 어려운 걸 저에게 주시는 군요."
"나도 자네를 도울 거니까 너무 뭐라 하진 말게, 출발하기 전에는 모든 준비를 마쳐놔야 하니."
"알고 있습니다."
칠러웨이는 일루안에게 손을 흔들며 막사에서 빠져나와 저 멀리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게리를 쳐다봤다.
"저 정도 주먹에 몇 대 맞았으면 분명 두개골이 부서졌을 거야.."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게리에게 먼지 나도록 맞고 있자 칠러웨이는 그곳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살폈다.
"그나저나..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아무리 봐도 제1 토벌대에는 쓸모 있는 사람이 없었고 눈이 살아있는 것은 범죄자들의 탈영을 방지하기 위해 합류한 카일록의 기사들과 성국의 병사들뿐이었다.
"쯧."
더 얍삽해진 것 같은 카일록의 모습에 칠러웨이는 혀를 차며 주먹을 말아 쥐었지만 그와 싸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종기사면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저 멀리 기사들의 무거운 검을 몇 개나 든 채 뛰어오다가 넘어진 종기사를 때리며 몇몇 기사들이 화를 내고 있었는데 칠러웨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봐."
"뭐야?"
"너무 심한 거 아니냐?"
"1 토벌대의 범죄자 녀석인가? 당장 죽고 싶지 않으면 신경 쓰지 말고 꺼져!"
"..."
칠러웨이는 카일록과 다른 기사들이 주변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모두의 시선이 게리에게 팔려있자 기사들을 순식간에 기절시켰다.
"히.. 히익!"
종기사는 겁을 먹은 듯 칠러웨이를 올려다보며 뒤로 물러났지만 칠러웨이는 조용히 검을 주워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뭘, 고생이 많다.. 저 녀석들이 일어나면 보복 걱정은 하지 마 아마 꿈인 줄 알 거야."
"서..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칠러웨이."
"칠러웨이님.. 저는 리타라고 합니다!"
"리타?"
"예! 톨 기사님의 종기사입니다!"
"톨인지 자일리톨인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너도 힘들게 사는구나."
"헤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합니다."
칠러웨이는 종기사 티라가 불쌍했지만 그가 지금보다 더 이상 엮인다면 카일록이 찾아와 또 자신의 뺨을 칠 것이 뻔했기에 그는 리타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저 멀리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게리에게로 향했다.
"행색은.. 조금 그렇지만... 기사님인가?"
리타는 쓰러진 기사들을 나무에 기대어 둔 뒤 잠시 칠러웨이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신이 검을 운반하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는지 후다닥 어디론가 뛰어가며 중얼거렸다.
"멋진 분이시니 또다시 만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