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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 누군가는 언제나 나의 적이 된다. (26/90)

〈 26화 〉 누군가는 언제나 나의 적이 된다.

* * *

"빨리 움직여!"

무장을 한 병사들의 사이로 옷이 해진 죄수들이 쇠사슬에 묶여 어디론가 호송되고 있었다.

"제길."

그중에서도 많은 전투를 겪은 듯 검은 갑옷이 넝마가 되어 너덜너덜해진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멍하니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어쩌다 여기까지.."

"어이.. 빨리 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는 뒤에서 한 죄수가 밀자 다시 발을 움직였다.

"다 모였나?"

거대한 연무장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옷은 남자와 똑같이 헤져있었다.

'모두 죄수인가 보구만.'

클라인이 얘기한 대로 죄수들은 모두 집합해 있었고 그들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삼엄한 감시 아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칠러웨이!"

"....?"

그렇게 주변을 감상하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자신을 반가운 목소리로 부르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반갑네 칠러웨이."

"아 일루안님."

"자네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하하하.."

저번에 봤던 일루안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살이 홀쭉하게 빠져있었고 고생을 꽤나 많이 한 듯 눈 밑에도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일루안님, 이곳에 이들을 모아둔 이유는..."

"클라인에게 들었겠지만.. 교황님의 마지막 배려지."

"배려..입니까?"

"그렇지, 무장으로서 형장의 이슬이 되느니 전장에 나가 성국의 영웅답게 죽어라.. 뭐 이 뜻 아니겠나?"

".... 그게 배려라면.. 충성을 잘못 바치신 것은 아닙니까?"

"하하하하하!"

일루안은 칠러웨이의 말에도 화가 날 법했지만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네는 자네 목숨만 챙기면 되네 내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어, 이게 배려가 아니라 죽으라는 명령이라고 해도 나는 만족하네."

".... 그 사람의 죄를 전부 뒤집에 썼다고 해도 말입니까?"

"음.."

칠러웨이의 질문에 일루안은 대답하기 곤란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리에티가 그렇게 한심하게 보이나?"

"예 아주 많이."

".... 후후.."

일루안은 칠러웨이의 말에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귀찮다는 듯이 칠러웨이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기! 일어서!"

"그만!"

한 기사가 빠르게 다가와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꽤나 높은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저지하고는 일루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네."

"아닙니다."

"자네 이름은?"

"필입니다."

"이런 죄인의 편까지 들어주다니, 내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기억하지 필."

"아닙니다, 당신에게 목숨을 구원받았으니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하하.."

"그리고 옆에서 지휘하시는 것을 지켜봤던 저는 이번 토벌대의 일이 당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쉿, 그런 말을 하면 자네까지 이 죄수들과 함께 토벌대에 편입될 거네."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 죄수들까지 당신이 살릴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일루안님은 영웅입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기사는 자신의 업무가 기억났는지 돌아갔지만 일루안은 그의 뒷모습을 꽤나 오랫동안 바라봤다.

"이래서 죄를 뒤집어써도 상관없다고 하셨군요."

"응? 무슨 소리인가?"

"일루안님이 죄를 지었다 뒤집어쓰더라도 믿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하하하하!"

칠러웨이의 말에 일루안은 기분이 좋은 듯 웃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나도 지금 내 인기를 실감했어, 이렇게 되니 오히려 죄를 뒤집어쓴 게 낫다고 생각이 드는구만."

"이게 영광스러운 죽음, 뭐 그런 거입니까?"

"그럴 수도."

칠러웨이와 농을 주고받던 일루안은 칠러웨이를 조용히 바라봤다.

"자네는 리에티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지?"

"예."

"그는 좋은 지휘관일세, 나도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내 뒤를 이어 성국의 군 지휘권을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전장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왜 그때 그런 선택을..."

"불안."

"...."

"압박, 분노 등등."

"감정..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감정은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네, 만약 공포스러운 상황과 자신도 다스릴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버리면 인간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

"... 예 뭐..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그런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거네."

"그전에는 그런 상황이 없었습니까?"

"있었지, 하지만 이 정도의 압박감은 그는 느끼지 못했을 걸세 그는 군 전체를 통솔해 본 적이 없거든 특히나 몬스터는 그 예측을 하기 굉장히 힘들어 단순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

"하지만 당황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지휘 자체를 잘못했지."

"예.. 뭐.."

"그리고 배신도 했고."

"...."

"자신의 지위를 위해 나를 사지로 몰았지."

일루안의 한탄에 칠러웨이는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자신 또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이곳으로 왔지만 믿고 있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그는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클라인이 감옥에서 마지막에 했던 말, 기억하나?"

"예."

".... 칠러웨이 누군가는 언제나 나의 적이 되네."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편성될 이 토벌대는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하네 이들은 죄수들이야 극악의 범죄자들이지, 분명 통솔을 위해 기사들과 병사들도 함께 숲으로 향하겠지만 그들은 점점 사라지게 될 거야."

"...."

"그러니 내가 이야기했던 대로 기회를 봐서 도망가게 절대 토벌대에 남아있지 마."

"그건..."

"내 지휘를 믿지도 말게, 자네는 앞이 창창한 기사야 토벌대에서 도망쳐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일루안이 거친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칠러웨이는 눈물이 떨어지려 했지만 사나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싫습니다."

"....?"

"만약 저까지 도망가 버리면 일루안님은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살 기회를 주셨으니 끝까지 도와드리다 가렵니다."

"..... 자네.. 정말.."

일루안 또한 감동받은 표정으로 칠러웨이를 바라봤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다가오는 한 남자에 의해 끊길 수밖에 없었다.

"어이."

"...."

"누가 이렇게 잡담을 허락했지?"

다가온 남자는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남자였는데 그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죄수들은 죄수답게 있으면 되는 거야."

"나는 일루안이네, 이 토벌대의 지휘를 맡게 될 걸세."

일루안이 나서서 손을 내밀었지만 남자는 그의 손목에 감겨있는 쇠사슬을 보고는 더러운 듯 뒤로 물러서며 피식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놈도 누군지 알고."

".... 난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데.."

짜악!

칠러웨이가 입을 여는 순간 남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고 칠러웨이의 고개는 획 돌아갔다.

"나는 카일록이다."

".... 그게 누구.."

짜악!

"너에게 물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우..."

칠러웨이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한 표정으로 카일록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재밌다는 듯 손에 낀 체인 장갑을 매만졌다.

"엘라님을 멋대로 채간 네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네 덕에 얼굴도 이렇게 작살이 났는데."

'X됐네.'

"어떤가 반갑지?"

칠러웨이는 카일록과 과거에 마주쳤던 기억이 떠오른 듯 한숨을 쉬었지만 다시 한번 그의 손에 돌아가는 고개에 정신을 차렸다.

"그만 때리쇼."

짜악!

"어디 명령이지?"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그만 손대는 게 좋을 텐데?"

이를 부드득 갈며 칠러웨이는 부어있는 뺨을 매만졌지만 카일록은 키득대며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만하게."

"...."

하지만 일루안이 앞으로 나서서 카일록을 막자 칠러웨이는 일루안이 뺨을 맞을까 걱정했지만 카일록은 그저 미간만 찌푸릴 뿐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만하시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는 자살하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런 곳에서 힘 빼지 말고 숲에 들어가 살 궁리나 하게."

".... 지금은 이 분 때문에 봐주는 것이니 숲에 들어가면 재밌게 놀도록 하지."

일루안의 명성을 잘 아는 듯 카일록은 더 이상 칠러웨이를 건들지 않고 뒤를 돌아갔지만 칠러웨이는 분이 안 풀리는 듯 땅을 내려쳤다.

"자네 인생도 참 기구하구만.. 어떻게 엮인 건가?"

"엘라 성녀를 구하려다가.."

"쯧.. 좋은 일을 했는데도 키로스님이 돕지 않았군."

".... 예.. 키로스라는 신은 참 비정한 것 같습니다."

"뭐.. 부정하지 않겠네."

"성국의 귀족이라는 사람이 신을 부정하면 어떡합니까?"

"뭐... 이제 귀족이라 하지도 못하는 몸일세... 쯧.. 나를 부르는구만 조금 있다가 보지."

"잘 다녀오십쇼."

성기사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발언이었지만 일루안은 그저 칠러웨이의 말을 들으며 허허 웃고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반갑다."

"....."

일루안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지만 죄수들은 그저 험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난 너희들의 지휘관 일루안이라고 한다."

"일루안..?"

"일루안이면.."

일루안의 이름을 아는 듯 죄수들이 웅성거렸지만 기사들이 다가와 그들의 대화를 제지하자 그들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다시 일루안을 봐야만 했다.

"너희들이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모르지?"

"...."

"제3 토벌대에 온 걸 환영한다."

"뭐?"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다고!"

"어이! 이거 당장 풀어!"

일루안의 말에 죄수들이 다시 웅성거리며 도망가려 했지만 병사들이 창으로 자신들을 위협하자 그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하하! 어차피 처형 아니면 감옥에 평생을 갇혀있어야 할 너희들이 선택할 것은 토벌대 밖에 없다!"

"이 인원으로 토벌대에 들어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다들 공포에 질린 것 같으니 제대로 얘기해 주지."

"제기랄! 일루안이고 뭐고 죽여버리기 전에 빨리 말해!"

"재촉하지 마! 말이 늘어날수록 내 대답은 늦어져."

몇몇 죄수들이 반항했지만 일루안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그들은 씩씩대면서도 일루안의 대답을 들으려 말을 아꼈다.

"좋아 이제야 조용해졌구만.. 너희들'만' 숲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병사들과 기사들도 함께 저 숲에 함께 들어갈 것이고 자네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내 밑에서 전투를 하는 것이야!"

"...."

"검 또한 지급될 것이고 자네들은 나만 따라오면 된다, 저 숲에서 토벌대로써 공을 세우고 살아남는다면 죄수 신분에서 풀려날 것이고 잘하면 기사 작위까지 내려지니 쓰레기들인 너희들은 신분상승할 기회가 되는 거야!"

"기사..?"

"작위를 내린다고?"

"그래! 감옥에서 썩어들어가는 것보단 토벌대가 되는 것이 나쁘지 않지 않나? 게다가 칠라렌 성국의 최고 지휘관이라 불리는 나와 함께하니 모두가 살아남아서 기사가 될 수 있다! 이런 기회는 없어! 만약 저 냄새 나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 당장 가라! 의욕이 없는 새끼들은 나에게 필요 없어!"

일루안의 말에 죄수들은 조용해졌고 아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칠라렌 성국의 범죄자로 낙인찍힌 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일루안의 밑에서 몬스터와 싸우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좋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알겠다."

일루안은 흡족한 얼굴로 단상을 내려갔고 칠러웨이와 눈을 마주치자 윙크를 하며 씨익 웃었다.

"저 인간도 미친 인간이야."

하지만 그런 일루안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는지 칠러웨이는 허허 웃었다.

"받아라."

"...."

이윽고 쇠사슬이 풀리자 병사들이 나눠주는 낡은 검을 받아든 칠러웨이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다짐한 듯 검자루를 꽈악 움켜쥐었다.

"그래 일단.. 살아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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