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누군가는 언제나 나의 적이 된다.
* * *
"...."
거적대기를 쓴 남녀는 계속해서 주변의 눈치를 보며 성문 하나를 지나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아무도 그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합니까?"
"표면적으로는... 톤.. 왕국이.. 릴 왕국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은 동맹국.. 이러고 다니는 게 우리에게 안전해.."
그렇게 이동하는 사이 그들을 눈여겨 본 한 병사가 두 사람이 수상한 듯 다가왔다.
"잠깐 멈추십쇼."
".... 무슨 일입니까?"
"그 천 좀 벗어보시겠습니까?"
"..."
병사가 칠러웨이의 거적대기를 건들자 아르웬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할 기세로 그를 노려봤지만 칠러웨이는 팔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음..."
"어이, 잠깐 나와봐."
"아.. 예."
칠러웨이의 물음에 병사는 딱히 그들이 수상하다는 점 밖에 얘기할 수 없어 머뭇거렸지만 병사들을 통솔하는 수비대장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병사를 뒤로 물렸다.
"거기 두 사람, 천을 좀 벗어줘야겠습니다."
"후우.."
[칠러웨이.. 도망쳐야 해.]
자신의 옷깃을 불안하게 잡아당기는 아르웬의 속삭임이 들렸지만 칠러웨이는 살짝 고개를 내젓고는 얼굴을 드러냈다.
"음.. 이곳에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나는 이곳에서 20년 동안 일했어, 여기서 사는 사람들 얼굴은 다 외웠지."
"... 아 그렇습니까?"
"뭐.. 수비대장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나?"
자신을 수비대장이라 밝힌 남자는 약삭빠르고 자신의 이익만 챙길 듯한 얄미운 얼굴이었는데 칠러웨이를 쉽사리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예.. 뭐 이번에 처음 왔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물어도 되겠나?"
"...."
"씁.. 얼른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수비대장은 칠러웨이를 압박하듯 앞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지만 칠러웨이는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기 위해 입을 닫았다.
"호오.."
하지만 그는 하얀 피부가 천 밖으로 드러난 아르웬에게 관심이 생겼는지 그녀의 얼굴을 가린 천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건들지 마시죠?"
"응?"
"손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수비대장의 손이 아르웬의 천에 닿을 무렵 칠러웨이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으르렁거렸다.
"... 내가 누군지 얘기해 줬을 텐데?"
"내가 알바아닙니다."
"이곳은 내 구역이야 귀족들도 이곳에서는 나한테 빌빌 기는데.. 감히 거지 같은 게.."
수비대장은 칠러웨이의 말에 짜증이 난 듯 얼굴을 팍 찌푸리더니 그의 멱살을 잡았다.
"응? 이게 뭐야?"
칠러웨이의 목에서 나무패가 보이자 그는 피식 웃으며 칠러웨이의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감히 나무패 자유기사가 이곳에서 난동을 피울 셈이냐?"
".... 후회하기 전에 이 사람한테는 손대지 마."
"손대면 어쩔 건데?"
"하아..."
칠러웨이는 남자가 짜증스럽긴 했지만 아르웬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진심 반, 걱정 반으로 충고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 호오."
결국 남자에 의해 아르웬의 천이 벗겨지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나자 수비대장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아르웬의 몸 곳곳을 바라봤다.
"꽤나 반반한 년이군."
'결국...'
터질 일이 터졌다는 듯 칠러웨이는 이마를 탁 짚으며 아르웬의 얼굴을 봤지만 이 상황을 꽤나 많이 겪어본 듯 그녀의 얼굴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아르웬?"
"이제... 죽여도 돼?"
"아뇨 아뇨! 잠깐만..! 방법이..."
"넌 지나가게 해주지, 하지만 이 여자는 안된다."
칠러웨이는 3분의 1쯤 뽑혀 나온 아르웬의 검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수비대장은 눈치 없이 계속해서 말을 했다.
"뭐하느냐! 당장 이 여자를 잡지 않고!"
"칠러웨이.. 더 이상.. 못 참아.."
캉!
아르웬의 검이 결국 뽑혀져 나왔지만 나라 간의 분쟁을 막고 안전하게 칠라렌 성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칠러웨이는 검을 들어야만 했다.
"칠러웨이.."
"잠깐! 잠깐!"
칠러웨이는 아르웬에게 숲에서 만난 남자의 반지를 보여주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건.."
"이걸로 해결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기다려보세요 아르웬님."
"...."
아르웬은 남자가 주었던 반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반지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남자가...."
"아르웬?"
"... 그거면 될 거야.. 칠러웨이."
반지를 본 아르웬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다시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놈들이 감히 내 앞에서 검을 들어!?"
수비대장은 꽤나 화가 많이 난 듯 칠러웨이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반지를 아르웬처럼 유심히 바라봤다.
"... 그... 그건..."
"그.. 그래! 그거다!"
반지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칠러웨이는 이제는 대놓고 수비대장의 면전에 반지를 들이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엥?"
콧대 높던 수비대장이 갑자기 무릎을 꿇자 칠러웨이는 당황한 듯 아르웬을 바라봤지만 아르웬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누군지도 알아뵙지 못하고 이리도 어리석게 굴었습니다!"
"...."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칠러웨이는 드디어 수비대장이 무릎을 꿇고 빌빌 기자 숨을 돌리고는 주변을 바라봤다.
"저.. 거 혹시.."
"그.. 분의 문양 아닌가?"
"저 사람.. 톤 왕국에서 본 적 있나?"
상인들 또한 칠러웨이가 들고 있는 반지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보고 있었고 귀족들은 칠러웨이를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브.. 브라이언 공.. 공작님과는 어떤 사이이십니까..?"
그렇게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수비대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브라이언이라는 이름을 말하자 칠러웨이는 그가 누구였는지 떠올리려 노력했다.
"설마.."
'아빌론이 말하는 사람은 아마 톤의 기둥이라 불리는 사람일 거예요, 현존하는 기사 중에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들었어요.'
엘라가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린 칠러웨이는 숲에서 자신을 상대한 남자가 브라이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쩐지.. 엄청 강하다 했어.'
단 한 합이었지만 공포스럽던 그의 검술과 힘을 느꼈던 칠러웨이는 자신이 들고 있는 반지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고는 수비대장을 내려봤다.
"아까 뭐라 했지?"
"...."
"일어나 봐."
"죄.. 죄송합니다."
"감히 남의 여자를 건드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칠러웨이는 자신의 말에 아르웬의 몸이 순간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 그는 수비대장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잘못하면 용서가 돼?"
"아.. 아닙니다."
"아니야? 그럼 용서 안 해도 되겠네?"
"...."
"어쭈 말을 안 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 끝나?"
"사죄드리겠습니다..."
"정성을 보여봐."
"제.. 제가 어떻게 해야.."
"그냥 정성을 보여보라고."
"그.. 그게.."
"쯧."
당황한 수비대장이 재미가 없어진 듯 칠러웨이는 아르웬의 팔을 잡고 성문으로 이끌었지만 이미 그들이 브라이언 공작과 아는 사이인 것이 밝혀졌기에 그들을 막는 병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르웬님은 그를 못 알아보셨습니까?"
"응.. 나는.. 그를 제대로 본 적 없어.. 전장에만 있었기에.."
"음.. 그래도 본 적은 있다는 거네요?"
"릴 왕국과의.... 전장에서.. 몇 번 검을 주고받았지만.. 모두 졌어.. 그때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사교 쪽으로는 안 나가시는 겁니까?"
".... 응."
"왜..?"
"나는.. 이런 것 빼고는 쓸모가 없으니까.."
'계속해서 이용하기만 한 건가.. 돕는 사람 없이?'
칠러웨이는 칠라렌 성국에서 병기처럼 쓰이는 아르웬을 안타깝게 바라보고는 성문을 지나쳐 저 멀리 보이는 칠라렌 성국의 땅을 바라봤다.
"저기 맞습니까?"
"아마도."
"일단.. 한숨 돌렸으니 빨리 돌아가죠, 아르웬님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
"네 번째 마리아 성녀도 있지 않습니까?"
"응."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아르웬은 그래도 위로가 되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평야에 길쭉하게 난 갈대들을 헤치고 칠러웨이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드디어 멀리 돌아 도착했네요."
얼마나 걸었을까 칠라렌 성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성벽이 기억에 나는 듯 아르웬은 돌아왔다는 기쁨 때문인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멈춰주십시요!"
두 사람이 도착하자 훈련이 잘 된 신참 병사 하나가 뛰어나와 두 사람 앞을 막았다.
"신분을 밝혀주시겠습니까?"
"아르웬."
아르웬이 톤 왕국에서는 쓰지 못했던 하얀 돌로 만들어진 패를 내밀자 병사는 상당히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옆의 분은..?"
"자유 기사."
"그.. 그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요."
그녀의 말에 병사가 당황한 듯 성문 아래에 누워있던 고참들에게 다가가 이야기하자 그들은 벌떡 일어나 아르웬의 앞으로 달려왔다.
"헉.. 헉 죄송합니다! 성녀 아르웬님!"
"괜찮아.. 이제 들어가도 돼?"
"그.. 그게."
고참 병사들은 말을 더듬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고 아르웬은 이야기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교황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칠라렌 성국에 들어오는 모든 자유 기사들의 패를 검사하라고.."
".... 검사?"
"예.. 그게.. 일루안 후작님께서 큰 죄를 지으셨다고 들었는데 함께한 자유 기사가 함께 가담했다고...."
"일루안... 이?"
능글 맞고 귀찮은 일에는 끼지 않으려는 일루안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교황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한 그가 큰 죄를 지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황님께... 가서 물어봐야겠어.."
"아 예! 그럼 이쪽 분의 패를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확인시켜줘 칠러웨이."
"아 여기 있습니다."
칠러웨이는 목에 걸고 있던 나무패를 건넸지만 그것을 받아든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그들은 뒷걸음질 쳤다.
"우.. 움직이지 마!"
"더 이상 움직이면 공격하겠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할세도 없이 허리춤에서 병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아까 다가왔던 신참 병사가 기사들을 불러오자 칠러웨이는 두 팔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르웬님! 물러서십쇼!"
"무슨..."
그동안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던 아르웬마저 병사들과 달려온 기사들에게 둘러싸이자 칠러웨이는 영문도 모르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봐야만 했다.
"묶어라!"
기사의 명령이 떨어지고 수십 명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칠러웨이의 몸에 있던 무기들을 뺏고 무릎을 꿇려 움직이지 못하게 포박했다.
"자.. 잠깐 무슨 일인지는...!"
"죄인에게 해줄 얘기는 없다!"
결국 입에도 재갈이 물려진 칠러웨이가 순식간에 기사들에게 끌려가자 아르웬은 그를 따라가려 했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성기사들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아르웬님, 왕궁까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가.. 무슨 잘못이 있지..?"
"그의 죄목입니다."
성기사들은 아르웬의 질문에 종이 한 장을 그녀에게 건넸고 종이를 읽어내려간 아르웬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 기사 '칠러웨이' 일루안과 함께 토벌대를 전멸까지 몰아간 죄로 수배함, 현재 미네르 숲에서 사라져 행방불명 그를 보는 즉시 '생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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