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버티다가 부러지기 전에
* * *
"...."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왕궁의 중앙 홀,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라."
".... 예."
"사상자는?"
가장 앞쪽에 일루안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리에티는 고개를 들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얘기하는 교황을 바라봤다, 그의 옆에는 한 여인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그럴 줄 알았다.'라는 표정이었다.
"으득.."
순간 리에티는 분노가 차올라 당장이라도 검을 그녀에게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여인은 성국에서 유명한 검의 성녀였기에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교황님에게 말씀을 드려야지..? 패배자들?"
"... 그만하거라 라티엘."
".... 칫."
교황은 그녀에게 자중하라는 듯 손을 들어 올리고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라티엘이라 불린 여인은 고개를 픽 돌리며 짜증이 나는 듯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볼 사람은 없는가?"
"...."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자 일루안은 주변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티에니 교황님, 저 일루안 후작은 지휘관으로서 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에게 처벌을..."
"... 자네는 얘기하지 않아도 될 텐데."
라티에니는 어떤 상황인지 대충은 아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이 모든 지휘는 제가..."
"일루안!"
"...."
교황이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갈하자 일루안은 더 얘기하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네 혹시 잊었나? 지휘관은 자네로 하되 실질적 지휘관은 리에티가 맡기로 했었지, 틀리나?"
"... 예."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임을 통감한다는 얘기를 누가 해야겠는가?"
"....."
교황의 말에 일루안은 할 말이 없어진 듯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에티의 몸은 들썩이고 있었다.
"리에티."
".... 예 교황님."
"내 말을 들었나?"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리에티는 교황의 옆에서 검자루를 쥔 채 씨익 미소를 짓는 라티엘을 보며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교황님.. 모든 것은...."
콰앙!
리에티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홀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인이 뛰어들어왔다.
"... 리에티!"
"엘라님.."
"무슨 일입니까? 엘라."
"어째서 그가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는 거죠?"
아빌론과 함께 헐레벌떡 중앙 홀로 들어온 엘라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닭똥 같은 눈물이 맺혀있었고 아빌론 또한 리에티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엘라 성녀, 그는 이번 토벌대의 대장이네."
"하지만! 그가 모든 책임을 지기에는..."
"그건 이곳에 있는 토벌대의 귀족들과 성기사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그는 아무런 죄가..!"
"성녀!"
교황은 결국 화가 터졌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무릎을 꿇은 리에티의 앞으로 다가왔다.
"리에티! 일어나게!"
".... 예."
"말해보라!"
"...."
"자네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가!"
"...."
전대의 교황보다 더 커다란 위압감을 뽐내는 교황의 앞에서 리에티는 압박감을 받았다.
"... 그건.."
"어서 말하게!"
"..... 제가.."
리에티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던 피론과 에일렌을 보았고 에일렌은 리에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살려면 해야 합니다.]
"....!"
그 순간 리에티의 머리가 멍해졌고 자신도 모르게 말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든 일은.. 일루안님의 책임입니다."
".... 뭐라!"
교황은 그의 입에서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다른 말들이 튀어나오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그것은 일루안도 마찬가지였다.
"일루안님의..?"
"지휘한 것은 리에티님이 아니었던가?"
많은 이들이 예상외의 답변에 소란스러워졌지만 교황은 팔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다시 말해보게."
"... 모든 것은 일루안님의 책임입니다."
"허어.. 어찌!"
'여기서 내 말을 거두어들이면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교황은 화가 난 듯 얼굴까지 붉히며 그를 압박했지만 이미 뱉어진 말들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리에티의 입에서는 에일렌이 돌아오기 전 일러준 대로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일루안님은 저에게 지휘를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모든 군권을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키메라와 싸울 때는 잘못된 판단으로 토벌대를 거의 괴멸 상태로 만들으셨고..."
"리에티!!!!!"
그 순간 일루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았지만 리에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결국 토벌대가 모두 쓰러져 갈 때 저에게 지휘권을 다시 넘기셨습니다, 결과는 교황님께서 보신 대로 입니다."
"진실인가 일루안?"
"아닙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리에티의 말들이 믿기 힘들다는 듯 교황은 일루안을 바라봤지만 일루안은 감정이 격해져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 만약 리에티 자네의 말이 진실이라 해도 지휘권은 언제든 다시 넘겨받을 수 있었을 텐데?"
".... 일루안님께서 제가 토벌대를 맡으면 모두 죽인다며 절대 넘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개 같은...!"
결국 참다못한 일루안이 검을 뽑아들고 그에게 휘두르려 했지만 순식간에 다가온 라티엘이 그의 목에 검을 겨눴다.
"계속 들어보지."
"후작님은 저를 지휘관으로 인정하신다 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고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몇몇 작은 실수들이 있을 때마다 트집을 잡고 저에게 명령했고 첫 토벌대에 참여한 한 자유기사에게 검술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지휘권을 일부 넘기셨습니다."
"자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
일루안이 소리쳤지만 리에티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였고 다른 귀족들 또한 일루안을 감쌀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입이 있으면 누군가 얘기해보게! 내가! 이 내가 모든 걸 망쳤다고 얘기하고 싶은 건가!"
피를 토하는 듯한 그의 말에도 어떤 귀족들도 입을 뻥끗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일루안의 눈을 피하며 다른 곳을 볼 뿐이었다.
"일루안님."
"....?"
중앙 홀의 시선은 모두 일루안에게 가있었지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피론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교황님 귀족 대표로서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허하지."
"귀족들 또한 모두 봤습니다, 당신이 멋대로 행동하며 리에티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채 토벌대를 괴멸 직전까지 몰아넣는 것을.. 당신의 독단적인 행동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 용기 있게 말하는 겁니다."
"허어.."
피론의 말에 동의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들을 보며 일루안은 결국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고 피론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교황 폐하 조금 더 진상을 알아봐야 합니다."
"으음.."
하지만 일루안과 친분이 있던 아빌론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나서며 교황에게 이야기하자 피론은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상을 알아봐도 똑같을 것입니다, 일루안을 존경하던 귀족들과 기사들은 얼마든 있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사실입니다."
"기사들은 말해보라, 사실인가?"
"예."
"확실합니다."
교황은 몇몇 기사들에게 추궁을 했지만 기사들 또한 일루안의 눈을 피한 채로 피론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일루안."
"폐하."
"더 이상 할 말은 없는가?"
"... 어차피 모든 책임은 제가 지려고 생각했으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책임은 후에 묻도록 하지."
".... 하지만 저를 믿어주십시요 교황님 그것이면 됐습니다."
"... 알겠네."
중앙 홀에 있는 모든 기사들과 귀족들에게 묻고 나서야 교황은 일루안을 안타깝게 보며 성기사들을 불렀고 그들은 일루안을 일으켜 세웠다.
"잠깐, 내가.. 스스로 가지."
"그렇게 하도록 해주게."
일루안의 말에 교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기사들을 뒤로 물렸고 일루안은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자네를 봤을 때 올바른 사람인 줄만 알고 챙겼는데... 나를 이렇게 대하는군."
".... 당신은 패배했습니다."
"후후... 그렇지.. 나는 패배했지 사람또한 잃었고.."
"...."
바로 옆으로 일루안이 다가오자 리에티는 움찔했지만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리에티."
".... 예."
"자네의 죄를 모두 쓰는 조건으로 칠러웨이만은 건들지 말게, 그는 아무런 잘못 없이 도우러 온 사람이네.. 만약 자네가 그를 죽이거나 한다면 나는 지금 상황을 더욱이 용서할 수 없어."
"...."
그의 말에 리에티가 대답하지 않자 일루안은 화가 난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성기사들이 자신의 걸음을 재촉하는 통에 결국 일루안은 성기사들과 함께 터덜터덜 홀에서 빠져나갔고 홀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 리에티."
"... 라티엘님 저는..."
"너를 그리 보지 않았는데 중요한 인재를 이렇게 내보내는구나? 아주 재밌어."
"..."
라티엘은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리에티의 어깨를 검으로 툭툭 건드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상황이 재밌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든 이들의 뜻은 알겠다, 일루안은 후에 죄목을 따지도록 하고... 리에티."
"예."
"이번 토벌대에서는 일루안의 방해가 있었지만, 다음 토벌대에서 자네가 지휘관을 맡았을 때 실수가 있다면..."
"....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또한 자네에게 명령을 하나 내리지."
"... 예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교황이 벽에 걸려있던 검을 건네자 리에티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검을 조심스레 받았다.
"일루안과 함께 토벌대를 망쳐둔 그 자유기사를 산 채로 내 앞에 데려오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여서 데리고 온다면 나는 자네에게 실망을 할 것 같아."
"...."
"대답은?"
"알겠습니다."
"자, 토벌대 모두 고생했네 가서 쉬도록 하게."
교황의 말에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교황이 자리에서 사라지자 엘라와 아빌론은 리에티에게 다가왔다.
"리에티 무슨 소리입니까? 자유기사라니."
".... 아빌론."
"설마.. 그 자유기사라는 사람이.. 칠러웨이?"
"..."
아빌론과 엘라의 물음에 리에티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 그가 왜.. 도대체.."
"그는 이제 죄인입니다."
".... 자네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빌론이 분노한 듯 그의 멱살을 잡았지만 리에티는 주변 귀족들을 의식하고는 조용히 그에게 속삭였다.
[아빌론.. 엘라님을 이 성국의 첫 번째 성녀로 세우고 싶다면 이 흐름을 따라가십시요 만약 성녀님보다 겨우 며칠만 봤던 칠러웨이가 더 중요하다면... 진실을 말씀하세요.]
그의 말에 아빌론은 멍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지만 엘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엘라님, 모든 일은 잘 풀릴 겁니다."
"그래야만... 그래야만 할 텐데.."
엘라의 등을 토닥거려준 리에티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에일렌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에게는 그녀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내 것을 버렸으니 이제 더 큰 것을 취할 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