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버티다가 부러지기 전에
* * *
"이봐요."
"으응.."
"참... 진짜."
한 남녀가 물에 쫄딱 젖은 채 냇가에 앉아 있었는데 여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후우..."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올린 남자는 조용히 누워있는 그녀를 지켜봤다.
"... 아르웬..?"
아르웬이라 불린 여인의 흰 원피스가 젖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자 그는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그녀의 팔을 흔들었다.
"... 으으응.."
"후우.. 칠러웨이.. 아니 김민석... 가만히 있어."
사춘기도 끝나지 않은 18세의 몸을 가지고 있다 보니 칠러웨이는 불쑥 불쑥 올라오는 욕구를 참으며 결국 눈을 감았지만 아르웬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결에 그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어억.."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칠러웨이는 저번에 자신이 아르웬에게 건네준 겉옷을 주워 탈탈 턴 후 그녀에게 덮어주고는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쯧..."
조용히 아르웬과 자신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며 혀를 차던 칠러웨이는 몸이 진정이 되자 다시 아르웬의 옆에 주저앉았다.
"여기가 어딘지..."
"으응.."
"일어나셨습니까?"
칠러웨이가 다정하게 그녀를 보며 물었지만 아르웬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들고 칠러웨이의 목에 겨눴다.
"여긴...?"
"모릅니다 저도."
"...."
겉옷이 툭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주변을 살펴보던 아르웬은 눈을 찌푸렸다.
"내가.. 진 거야?"
"아뇨 지지는 않았고 제가 멋대로 아르웬님을 데리고 도망친 겁니다, 그.. 저.. 큼큼! 옷을 좀.."
"앗..!"
물에 젖은 자신의 옷을 보고는 얼굴을 붉힌 아르웬은 떨어진 겉옷을 주워들고 몸을 가렸다.
"미.. 안."
"아뇨 뭐...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조용히 검을 거두어들인 아르웬은 정말 칠러웨이에게 미안한지 고개를 푹 숙였지만 칠러웨이는 오히려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나저나.. 아르웬님은 어디인지 대충 감이라도 안 오시나요?"
"... 음."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느끼던 아르웬은 조용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예?"
"저쪽...이야."
"뭐가 말입니까?"
"저쪽...에서 바람이 불고... 있어.. 물.. 냄새도 나고..."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응."
짧은 아르웬의 대답에 칠러웨이는 그녀의 성격이 조금 답답한 면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를 따라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시죠?"
"응.."
"왜 그러세요?"
칠러웨이가 먼저 수풀을 헤치고 아르웬이 가리킨 방향으로 가려 했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아르웬이 주춤거리며 움직이지 않자 그는 그녀에게 다시 다가왔다.
"문제 있으신가요?"
"그.. 그게.."
"네?"
칠러웨이는 절뚝거리는 그녀의 반응이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떨어질 때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퉁퉁 부어오른 그녀의 발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업히세요."
"... 업혀?"
"예."
칠러웨이가 등을 내밀자 그녀는 업힌다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뒷걸음질 쳤지만 칠러웨이는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팔을 잡아끌었다.
"어때요?"
"...."
"업히는 건 괜찮으신 거죠?"
"응."
부끄러운 듯 칠러웨이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아르웬은 그의 옷깃을 잡았지만 칠러웨이는 오히려 죽을 맛이었다.
'제.. 제길..'
육감적인 그녀의 몸이 등에 착 달라붙자 그는 계속 심호흡을 하며 수풀을 헤쳐나갔다.
"후우... 풀들이 날카로우니 조심하세요."
"응."
"헉.. 헉... 또 오르막?"
"미안해.."
"아닙니다, 그래도 가벼우셔서 다행이지.."
그녀의 몸이 신경 쓰이는 것도 잠시 칠러웨이는 생각보다 거친 길에 아르웬과 함께 조금씩 대화를 이어나가며 힘든 걸 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성녀는 어쩌다가 되신 겁니까?"
"..."
갑작스러운 칠러웨이의 질문에 아르웬은 입을 다물고는 이마를 툭 그의 등에 가져다 댔다.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곤란.. 하지 않아.."
갑자기 말이 없어진 아르웬이 걱정됐는지 칠러웨이는 이야기를 돌리려 했지만 아르웬은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성녀들은... 총 다섯이야.."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성녀들을.. 칠라렌 성국에 와서.. 만났어..."
아르웬은 과거 그녀들을 만났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멍하니 숲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작게 느껴졌지만 칠러웨이는 그녀의 말에 최대한 집중하려 노력했다.
"나는 특별한 게 없었어.. 그저 검만 좀... 휘두를 줄 알았지.. 하지만 그것도 둘째 언니에게 모두.. 막혔었어.."
"...."
칠러웨이는 키메라를 순식간에 때려잡는 아르웬을 떠올리며 전투에 특화된 두 번째 성녀는 얼마나 강할지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나로는 이길 수 없었지만.. 다방면에서 나는..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받았어... 그리고..."
"그리고..?"
"방해가 되는 이들을 모두... 죽였어."
".... 후우.."
'몇 년 만에 칠라렌을 강대하게 만들었다는 건... 내 등에 업힌 다섯 번째 성녀가... 썩어나던 귀족들을 처단했다는 건가?"
얼이 빠진 눈빛과 멍한 얼굴로 햇살이 내리쬐는 숲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는 말에 칠러웨이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인 겁니까?"
".... 도움..?"
"성국의 발전 말입니다."
"아."
"..."
"아니.. 네가.. 말하는 것에 속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교황은 내가... 판단하길 원했어.. 성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과... 안되는 사람을.."
"그 뒤에는 키메라를 잡으러 오신 겁니까?"
"응..."
"그렇군요."
칠러웨이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르웬님."
"응."
"아르웬님은 이 성국에 바라는 게 있으십니까?"
".... 바라는 거?"
"네."
"싸움이 없었으면.. 해.. 또... 행복..?"
"음."
첫 번째 성녀 일행은 자신들이 칠라렌 성국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바라고 있다 이야기했고 등에 업힌 아르웬 또한 그걸 바라고 있었다.
"첫 번째 성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엘라?"
"네."
".... 모르겠어."
"모르겠다..?"
"응.. 그녀는... 이 성국의 성녀야.. 하지만... 쓸모없어... 으음.. 그래도.. 성국의 유지에... 도움은 돼."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칠러웨이는 엘라 일행이 이야기한 '성녀들'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전에 만났던 마리아 또한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고 아르웬 또한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
"도대체가.."
"칠러웨이, 잠깐."
그렇게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 때쯤 아르웬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한곳을 가리켰다.
".... 여긴."
"그만 가는 게.. 좋겠어."
"...."
한 쪽에 상당수의 기사들이 모여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두런두런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칠라렌 성국의기사들입니까?"
"아니."
"그럼 뭡니까.. 저 인물들은.."
"톤 왕국의 기사들이야."
"..."
톤 왕국은 릴 왕국, 칠라렌 성국 두 나라와 함께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였는데 제국의 입장에서는 일개 작은 왕국에 불가했지만 기사단장 브라이언이 공작자리에 오른 뒤로 기사들의 실력이 기아급수적으로 올라가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나라였다.
"어째서 이쪽에.."
"... 아마 이곳이.. 숲의 끝일 거야.."
".... 벗어나야겠군요."
"... 응."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발을 돌리던 중 칠러웨이는 자신의 목에 닿아있는 검을 보고는 혀를 찼다.
"쯧..."
"하하하! 어디서 온 사람들이지? 당신들은 이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짧은 머리와 호탕한 얼굴을 가진 기사는 낡은 갑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의 손에 잡힌 굳은살은 그가 얼마나 많은 수련을 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
"보아하니 나무패의 자유기사와... 칠라렌 성국에서 도망 나온 여자인가?"
기사는 칠러웨이의 목에 걸린 나무패를 슥 보더니 그에게 업혀있는 아르웬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칠러웨이.. 내려줘.."
"하지만 아르웬.."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어."
"호오.."
칠러웨이의 등에서 내려온 아르웬이 검을 뽑아들자 남자는 그녀의 자세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좀 배웠나 보군! 칠라렌 성국에 여기사들이 많다더니 흥미로워."
"우리는... 지나갈 거야.."
"어디 한 번 뚫고 가보도록."
아르웬에게 흥미가 생긴듯 남자 또한 투기를 뿜으며 검을 뽑자 그녀는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간다!"
쩡!
지이이잉...
검의 울림과 함께 엄청난 힘의 압박을 느낀 아르웬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지만 남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재밌다는 듯이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만!"
쩌억!
"... 호.. 실력자가 또 있다고?"
아르웬의 실력에도 남자는 놀라고 있었지만 강한 힘으로 능숙하게 오히려 자신의 검을 튕겨내는 칠러웨이를 보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르웬."
"나는.. 괜찮아.. 문제없어."
".... 하하하하! 뭐 자네 말대로 여기까지만 하지."
조용히 아르웬을 살펴보던 남자는 이내 그녀의 발목이 퉁퉁 부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웃더니 투기를 없애고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뭐 그쪽 여자의 이름은 아르웬인거 같고... 자네 이름을 들어볼 수 있을까?"
"... 칠러웨이."
"칠러웨이."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칠러웨이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었고 아르웬은 버티기 힘들었는지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하하하! 제가 강한 자만 보면 싸움을 걸고 싶어져서... 칠러웨이! 자네는 그녀를 주인으로 두고 있나?"
".... 주인 같은 거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톤 왕국을 더 강대하게 키워보지 않겠나! 자네가 있다면 든든할걸세!"
"...."
"너무 어렵게 얘기했나!? 나의 기사가 되라는 얘기일세! 하하하하!"
칠러웨이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젓고는 아르웬을 부축했다.
"안 합니다, 그런 거."
"흠! 아깝군."
아쉬운 듯 남자는 돌아가는 칠러웨이를 바라봤지만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안장에 걸린 자신의 짐에서 무언가를 빼내 그에게 달려왔다.
"칠러웨이!"
그는 끙끙대며 아르웬을 부축하는 칠러웨이의 어깨를 잡고 무언가를 건넸다.
"뭡니까?"
"가지고 가게! 도움이 될 거야! 하하하!"
"...."
"만약 길을 잘못 들어 톤 왕국에 들어오게 된거라면 나 같은 녀석들이 많은 거니 가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네!"
"... 감사합니다."
"아니야! 내가 실수를 했는걸! 하하하핫!"
호탕하게 웃고 있는 남자는 두 사람이 적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해하는 듯했지만 칠러웨이는 괜찮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남자가 건네는 반지를 받아들었다.
"혹시 칠라렌 성국으로 돌아가는 방법.. 아십니까?"
"음.. 칠라렌 성국!"
"네."
"미안하지만 나는 잘 모르네! 하하하!"
"...."
남자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품 안을 뒤적거려 지도 하나를 꺼내어 칠러웨이에게 다시 건넸다.
"내가 알기로는 이 숲을 통해서 가는 방법은 없어, 모두 절벽들뿐이네! 아마 톤 왕국을 통해 돌아서 평야 쪽으로 가야 할 거야!"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히 가게! 칠러웨이! 아! 그리고.."
칠러웨이는 아르웬의 눈치를 보며 자신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남자에게 깜짝 놀랐지만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그건 내 증표라네, 만약 '기사'가 되고 싶으면 다시 톤 왕국으로 찾아와 나를 찾게 내가 좀 유명해서 톤 왕국으로 오면 모두가 날 알 거야.]
"아.. 예."
칠러웨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를 한 후 어두운 숲속으로 아르웬과 함께 다시 사라지자 남자는 조용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더니 말에 올라탔다.
"공작님."
"왔나! 하하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닐세! 키메라가 내려왔을 수도 있으니 주변을 살피면서 가도록 하세!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 진군 속도도 늦추고! 하하하!"
공작이라 불린 남자는 능숙하게 병사들을 살피며 기사에게 명령했고 기사 또한 그런 그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명령을 전달했다.
"자! 준비는 됐나!"
"예!"
"출발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