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버티다가 부러지기 전에
* * *
"허억... 허억.."
엉망이 된 군대를 이끌며 한 남자가 비틀 비틀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남자의 눈은 독기가 가득해 기사들조차 말을 걸지 못하고 침묵해야 했다.
"리에티."
"예 일루안님."
"칠라렌으로 돌아가 군대를 재정비해야 하네."
"...."
"리에티?"
일루안의 말에도 리에티는 말없이 조용히 앞만 보고 걸어갈 뿐 그는 일루안을 보지도 않고 그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았다.
"리에티!"
"피론."
꽤나 고생을 했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온몸에 피가 묻어있는 피론이 다가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분명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나?"
"...."
"그런데 결과가 왜 이 모양이지?"
"피론 그만하게."
"일루안님은 나서지 마십시요, 애초에 일루안님이 지휘했더라면.."
퍼억!
피론의 말에 리에티는 그제서야 분노한 듯 그의 얼굴을 후려치며 씩씩댔다.
"그렇게 패배가 아프면 네가 지휘해라."
"...."
"그리고 죽고 싶지 않다면 내 몸을 건들지 마 겨우 공작가의 둘째 도련님 주제에 누구를 잡는 것이냐?"
리에티의 말에 피론 또한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검을 뽑아들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건방진 자식이.. 계속 편을 들어주니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군... 네놈의 그 행동이 나중에 너에게 어떻게 돌아갈지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겨우 버티고 있는 썩은 동아줄 하나 잡고 그런 태도로 나오는 것이냐?"
"... 피론 네놈을 여기서 명령 불복종, 상관에 대한 하극상으로 처리해도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못한다 죽고 싶다면 더 지껄여."
일촉즉발의 상황에 기사들과 병사들 또한 긴장한 모습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보다 못한 일루안이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어 그들을 떨어뜨렸다.
"그만하게."
"비키십시요 일루안님 필러 공작가의 이름으로 저자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저 또한 저자가 엘라님에게 썩은 동아줄이라며 모욕을 했으니 넘어가지는 못하겠군요."
짝!
젊은 두 청년이 서로 으르렁거리자 일루안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지만 어디선가 달려온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뺨을 후려쳤다.
"그만!"
"무슨 짓이지.....? 에일렌 감히 오빠를..."
"그만하라구요!"
"...."
에일렌에게 맞은 피론은 도끼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봤지만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리에티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멸상태까지 간 병사들의 상태가 안 보이시나요!? 지금은 서로 힘을 합쳐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난 그럴 생각 없다 에일렌."
"리에티.... 당신 미친 건가요?"
리에티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에일렌은 주먹을 꽉 쥐고는 들고 있는 검을 내팽개쳤다.
"그렇다면 필러 공작가는 이곳에서 빠지겠습니다, 1차 토벌대에서 전멸을 겪고 2차 토벌대에서도 지휘관이 이 모양이니 더 이상 따를 수 없겠네요."
"...."
"첫 패배와 실패 때문에 두려운 건 압니다, 하지만 당신은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돌아가서 받을 비난들과 자신이 떠받들고 있는 성녀에게 피해가 갈까 봐 이 상황에 대해서 판단도 제대로 못 내리고 있어요."
에일렌의 말에 리에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에일렌은 그를 더더욱 몰아붙였다.
"당신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려면 더 이상 전투는 피해야 합니다, 적의 전력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 더 버티면 모두 죽습니다."
".... 나도 에일렌과 같은 생각이네 자네는 예전에 이러지 않았어, 지금 당장의 현실을 보게 리에티."
"후우..."
일루안마저 그녀의 말을 거들자 리에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후퇴... 합니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피론."
"알겠어 에일렌,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퇴각 준비를 할게."
에일렌이 자신을 째려보자 피론은 피식 웃으며 기사들에게 명령을 했고 귀족들 또한 리에티의 결정에 자신의 영지병과 기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기회는 앞으로 더 있을 거야."
"그래야 합니다.."
일루안의 위로에 리에티는 마음 한구석으로는 편안했지만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 엘라와 아빌론을 떠올리니 갑갑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칠라렌 성국에서 성녀님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할 거다..'
리에티는 명령을 내리고도 계속해서 드는 생각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수를 써야 해.'
주변을 돌아보며 리에티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떠올렸지만 키메라들과 구울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에트에게 지금은 다시 덤빌 수 없었고 칠라렌 성국에서 누군가를 버려야만 자신이 살 수 있었다.
"리에티."
일루안이 기사들을 돌보러 간 사이 리에티가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일렌이 그에게 다시 다가왔다.
"에일렌.. 그냥 퇴각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아."
"..."
"만약 나를 구하려 했다면 더 많은 희생이 있었을 거야, 두 번 다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어나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으니 잘한 선택이고."
".... 그래."
"피론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마 그는 지금 여기서 패배하고 나서 영지로 돌아갔을 때 자신을 공격할 첫째 오라버니 때문에 상당히 예민해져 있으니까."
"그래, 알고 있어 그 또한 걱정이 많겠지."
"돌아가서 어떻게 할지는 정했어?"
에일렌의 말에 리에티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일렌은 그에게 손짓했다.
"... 뭐지?"
"잠깐 귀 좀 빌려주면 고맙겠는데?"
"...."
"예전에는 잘만 주더니... 역시 그 성녀님 때문에 나를..."
"아니라고 얘기했지 않았나.."
리에티는 에일렌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잘 들어.."
에일렌이 하는 귓속말에 리에티의 눈이 점점 커졌고 리에티는 진심이냐는 듯 그녀를 바라봤지만 에일렌의 표정은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평온했다.
"진심인가?"
"그래."
"왜..."
"줄 건 줘야지."
"하지만..."
"적들이 우리에게 검을 쥐여주었지만 그 검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아니 오히려 부러뜨리고 말았지."
"...."
"그렇다면 우리는 그 검을 고치기 위해 무언가를 내주어야 하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에일렌."
"리에티."
에일렌은 리에티의 얼굴을 붙잡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리에티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에일렌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또다시 실수할 생각이야?"
"....."
"더 이상의 실수는 모두의 죽음이야 칠라렌 성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또 더 나은 나라를 위해서 이건 꼭 해야만 하는 희생이야."
"희생을 꼭 해야 한다면..."
"리에티."
리에티가 계속해서 그녀의 말을 피하자 에일렌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 정도도 못한다면 여기서 버티다가 죽어버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
"너도 희생이 싫어서 이곳에서 죽어서라도 버티려 했겠지, 하지만 퇴각 명령을 내린 이상 모두를 죽이는 것보다 살려야 해 내 말이 틀려?"
"아니.."
"그럼 해."
"...."
"너도 네 것을 지켜 네 것도 아닌 것을 위해 힘을 쓸 필요는 없어."
"그래."
"좋아 리에티."
에일렌은 그의 대답을 듣고 그제서야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리에티는 한숨을 내쉬며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이봐 리에티! 칠러웨이 봤나? 분명히.. 함께 따라온다고.."
"일루안님이 저를 업고 오실 때 함께 온 게 아닙니까?"
"아니네 분명 자네를 데리고 먼저 가라고.."
정비를 하던 일루안이 다가와 말하자 리에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되물었지만 일루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해 보니.. 에일렌 자네를 구하러 갔었는데.. 칠러웨이는 어디로 갔나?"
일루안의 물음에 에일렌의 표정이 굳어가자 리에티는 무언가 알아챈 듯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에일렌?"
"나도 몰라 리에티.... 저는 정말 몰라요."
"모른다니?"
일루안이 얼굴을 찌푸리자 그녀는 연신 고개만 내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설마.. 그곳에 남은 건가?"
"...."
"하아.."
"괜찮다 에일렌."
일루안은 그제서야 칠러웨이가 없는 것을 알아챈 자신이 한심한 듯 이마를 짚었지만 리에티는 오히려 에일렌을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
"기사들을 내어주게 리에티."
".... 설마 찾으러 가실 작정입니까?"
"가야겠네."
"안됩니다."
"그가 이 병력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어 용병 단장인 클라인도 대기 중이니 금방 다녀오겠네."
일루안이 고집을 피우자 리에티는 에일렌을 토닥거려주는 것을 멈추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퇴 명령을 부탁한 것은 일루안님입니다."
"...."
"에일렌과 일루안님의 말대로 저는 더 이상의 희생은 막기로 했습니다, 만약 그를 찾는다고 하면 칠라렌 성국에 도착한 후 재정비를 하고 나서입니다."
"그건 너무 늦지 않나!"
"지금 가봤자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
일루안은 홀로 남은 칠러웨이가 걱정되는 듯 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지만 그런다고 칠러웨이가 바로 돌아올 일은 없었다.
"그래도 살아있다면.. 가야 하지 않겠나?"
"일루안님 저도 재능 있는 기사를 잃어 안타깝지만 지금은 물러날 때입니다."
"하지만."
"칠러웨이의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매정하게 에일렌을 이끌고 가는 리에티의 뒷모습을 보며 일루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루안님."
"클라인 정비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칠러웨이는 찾으셨습니까?"
클라인의 질문에 일루안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뭘 하시는 겁니까..? 당장 그를 찾으러..."
"지휘관이 찾는 걸 거부했네."
".... 무슨..?"
"리에티가 그를 찾는 것을 거부했어.."
"설마.. 자신의 명령을 거부했다고... 그를 버리는 겁니까?"
"감정적인 대처일 수도 있네만.. 우리는 리에티의 명령을 계속해서 말렸고 칠러웨이를 찾기 위해서는 리에티를 퇴각시켰듯이 그에 맞는 반박도 필요해 아마 그를 찾으러 가는 건 불가능할 걸세."
"그럼 저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클라인이 자신의 검을 들고 용병들과 함께 돌아가려 하자 일루안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돼 클라인, 일단은 칠라렌 성국으로 돌아가세."
"어째서입니까!"
"자네 또한 용병이지만 성국과 계약을 맺은 사람 중 한 명이야, 운이 좋아 찾는다고 해도 자네를 포함한 다른 용병들이 칠라렌 성국으로 못 돌아갈 수 있네."
"제길!"
클라인이 들고 있던 물통을 바닥에 패대기 치자 일루안은 한숨을 내쉬며 그림자가 진 숲 안쪽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칠러웨이.. 미안하네 자네가 구한 두 사람이 자네를 거부하고 있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