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화 〉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있다. (18/90)

〈 18화 〉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있다.

* * *

"음."

원피스가 피에 젖어 소름 끼치는 모습의 여인의 앞에 어울리지 않게도 멍한 얼굴을 한 남자는 답답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뭡니까?"

"...."

"아니 아르웬이라고 했나? 저한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하지만 대답하려는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꺼풀은 피곤한 듯 계속 내려왔고 몸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 하아."

"손대지 마."

"히익!"

결국 한숨을 내쉰 칠러웨이는 그녀를 눕히려 어깨를 잡았지만 갑작스레 눈을 뜬 그녀에게 제지당해야만 했다.

"손.. 대.. 지... 마아..."

목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검을 옆으로 슥 밀쳐낸 칠러웨이는 그녀를 안아들고 짚이 쌓여 있는 곳으로 가 그녀를 조심스레 눕혔다.

"쯧.. 성녀들은 다 이런 옷차림인가?"

"이봐~."

"어억...!"

얇은 원피스 차림의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칠러웨이는 옆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뭐... 뭐야."

"으응~ 귀여운 자유 기사네?"

저 멀리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마리아가 보였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칠러웨이의 앞으로 이동한 뒤 미소를 지었다..

"뭐.. 뭡니까 당신.."

"나는 마리아, 칠라렌 성국에서는 네 번째 성녀라고 불리고 있는 여자야."

"아.. 예."

"그나저나 내 동생을 건드린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를.. 누구 죽을 일 있습니까?"

칠러웨이는 툴툴대며 자신의 겉옷을 벗은 뒤 아르웬에게 덮어주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은 들었어?"

"아뇨.. 못 들었습니다."

"흐응~ 이 아이가 잠이 많긴 하지만 할 말도 못 하고 쓰러질 정도면 엄청 피곤했다는 건데.."

"예.. 계속 졸더라구요."

마리아는 칠러웨이의 옆에 앉아 아르웬의 볼을 톡톡 건들며 잠을 자고 있는 그녀가 귀여운 듯 계속해서 빙글거리며 웃었다.

"이 아이 대신에 내가 얘기해줄게."

"아.. 예."

"에일렌과 리에티와는 무슨 관계야?"

"뭐..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얘기하자면 일시적인 협력관계?"

"으응~."

자신의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칠러웨이는 자신의 육포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먹을래요?"

"이건.. 뭐야?"

"육포."

"육포..?"

칠러웨이가 육포를 입 에넣고 씹자 마리아는 조심스레 그 행동을 따라 했다.

"으응~ 맛있는 고기네?"

"뭐.. 간은 다 되어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두 사람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아빌론과 엘라는 알고 있어?"

".... 예."

칠러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아는 웃음기를 없애고 아르웬을 바라봤다.

"주인은?"

"없는데요?"

"없다고?"

"네.."

"그럼 엘라와의 관계는 뭐지?"

"제가 그 엘라라는 사람의 생명의 은인인데..?"

"흐응~."

갑작스럽게 바뀐 그녀의 말투에 칠러웨이는 당황했지만 자신을 쉽사리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아 칠러웨이는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그들에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 갑자기 그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우리를 이교도 취급하며 너를 칠라렌 성국 전체와 싸우게 할 거야."

"...."

"일루안은 중립에 서있는 기사지만 다른 녀석들은 그렇지 않지."

"당신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요?"

"흐응~."

칠러웨이가 물어왔지만 마리아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죽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길 바라.."

"무슨.."

"흐응.. 설명을 해주자면... '개'가 되지 말고 '늑대'가 되라는 거야 얼빵한 기사님~."

"어어 그거.."

"먹어보니 맛있네 내가 다음번에 더 맛있는 걸 대접할게~."

"그게 마지막이라구요!"

"아르웬 그 아이를 잘 부탁할게~."

마리아는 어느새 칠러웨이에게 훔친 육포 주머니를 흔들며 숲속으로 사라졌고 칠러웨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으음.."

"일어나셨어요?"

"... 여긴.. 날 어떻게 데려온 거지?"

"직접 본인 발로 오셨습니다만.. 물론 눕힌 건 저지만."

"...."

아르웬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지만 자신의 몸에 덮어진 칠러웨이의 옷을 보고는 그를 바라봤다.

"....?"

"네 거..?"

"네.. 뭐 그쪽 거는 아니잖아요?"

"...."

아르웬은 조용히 옷을 보더니 돌려주려 했지만 칠러웨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어깨에 옷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렇게 얇은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그거라도 입고 돌아다니세요, 저는 막사 안에 새 걸로 하나 더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고마워."

짧은 감사 인사였지만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며 칠러웨이는 문득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네.. 살인 병기를..'

칠러웨이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잡생각을 떨쳐낸 후 그녀의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 왜...?"

"할 얘기가 있으시다고 했는데요."

"아.."

아르웬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지만 칠러웨이에게 할 얘기를 까먹은 듯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땠다.

"너.. 괜찮아?"

"... 뭐가 말입니까?"

"음.. 그러니까.."

"그쪽한테 공격당한 거..?"

"그건.. 사과할게..."

"아 예 뭐.. 좀 다치긴 했는데 문제는 없으니깐.."

"아까 그 녀석들.. 널 이용하지.. 않았어?"

칠러웨이에게 미안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말에 집중한 칠러웨이는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아는 거지? 아니.. 그전에 내가 이용당했었나..?'

"그들이.. 널... 이용.. 했어?"

"뭐..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제 스스로 한 거기도 하고.."

"그래... 역시... 이용.. 했구나."

아르웬은 칠러웨이의 대답에 입을 꾹 다물었고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자신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왜.. 돌아가서.. 나를... 찾지 않았어..?"

"그거야 뭐.. 저도 할 일이 있었고, 아르웬과 싸우기만 했지 소개도 못 들었고 성녀인지 누구인지 몰랐는걸요?"

"아.."

아르웬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가 생각난 듯 얼굴을 다시 한번 붉히고 칠러웨이에게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뭐~ 지나간 일이고.. 신경 안 써요 지금은 저 숲에 있는 키메라들과 뭐.. '그 남자'를 처리하는 게 제 일입니다."

"그 남자?"

"예.. 뭐 저는 잘 모르지만 다들 릴 왕국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 그.. 남자라면.."

그 얘기를 듣자 아르웬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칠러웨이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아르웬은 그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옷.. 고마워.. 나중에... 돌려줄게."

"아뇨.. 뭐 가지셔도 된다고.."

"기회가.. 된다면... 성국으로... 돌아가.."

"예.. 뭐."

"이곳은.. 위험해.. 그 사람들이.. 말한.. 남자가 여기 있다면... 더더욱..."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제대로... 된... 대답..."

"예예."

그의 대답을 듣자 안심이 된 듯한 얼굴로 아르웬은 칠러웨이의 옷을 입고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음.."

마리아와 아르웬이 사라지자 칠러웨이는 조용히 자신만의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가.."

알듯하면서도 말듯한 이 성국의 상황에 그는 머리를 벅벅 긁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칠러웨이!"

"아 일루안님."

"걱정했네, 마리아님이 혹시라도 해코지 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는 중년의 남자 일루안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 칠러웨이는 그와 눈을 마주친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큼큼.. 뭔가? 나는 남자는 싫네만..."

"오해 마십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누가 오해를 안 하겠나?"

"저는 여자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약간의 농담이 오간 후 두 사람은 자신들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일루안님은.. 아십니까? 이 성국의 제대로 된 상황을?"

".... 칠라렌 성국의.. 상황 말인가?"

"예 칠라렌 성국의 제대로 된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

칠러웨이의 물음에 웃고 있던 일루안을 순간 입을 다물었고 그의 표정 또한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모르네."

"에일렌과 리에티 두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칠러웨이."

"예?"

일루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있네 칠러웨이."

"... 사정... 말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러해, 나도 그렇고 자네 또한 아무도 모르는 자네만의 사정이 있지 않나?"

"뭐 그렇죠...?"

"성국 또한 마찬가지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다양한 사정이 있고 또 '실력있는 이방인'에게 모든 걸 알려주지 못할 만큼 성국의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군."

"... 그 정도 입니까?"

"그러니 웬만하면 칠라렌 성국에 대해 파헤치려 들지 말게,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위험해지는 게 이 나라야."

"그렇다면..."

"적당히.. 모든 걸 적당히 하라는 얘기일세."

"예."

"기억하게, 새로 나타난 네 성녀도 위험하고 자네가 믿고 있는 사람들 또한 제대로 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어.. 살아남으려면 아무도 믿지 말게 절대로."

"...."

자신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칠러웨이를 보며 만족한 듯 일루안은 주변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지, 아마 모두 기다릴걸세."

"...."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게, 그저 키메라를 처리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자네가 성녀들과 한 얘기도 발설하지 말고 엘라님과 있었던 일 리에티와 했던 말들... 이 시간부로 절대 이야기하면 안되네."

"예."

"그럼 난 먼저 가보도록 하지."

일루안은 칠러웨이의 대답을 들었지만 성에 차지 않는 듯 그에게 단단히 일러두며 일을 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다가갔고 칠러웨이는 복잡한 심경에 조용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 정도인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