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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화 〉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있다. (16/90)

〈 16화 〉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있다.

* * *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숲 가운데 꽤나 많은 수의 병력이 모여있었다.

"일루안님 어느 정도 모인 것 같군요."

"어느 정도만."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리에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식을 듣고 모인 귀족들은 자신들끼리 모여 이 상황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고 리에티와 일루안은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에티님."

"무슨 일이지?"

"파커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 일단 막사 안으로 들어오라 전하게."

"예."

리에티는 에일렌이 왔다는 소식에 일루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막사 안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 파커입니다."

"들어오세요."

잠시 시간이 지나자 한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고 리에티는 그 목소리가 에일렌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직접 찾아오다니 무슨 일입니까?"

"오지 않으시길래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렇군."

리에티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일렌의 앞에 따듯한 차를 놓아주었다.

"아직도 돌아갈 생각은 없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남아있지?"

"...."

리에티는 자신의 힘으로 그녀를 돌려보내 준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못 알아듣는 것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너의 오빠가 이곳에 남아있어서 인가?"

"피론 때문은 아닙니다."

에일렌은 피론을 언급하는 리에티가 탐탁지 않은 듯 그를 째려보았지만 리에티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너의 첫째 오빠 때문이라면 내가 얘기를 해두지 공작께서도 네가 그냥 돌아왔다고 쉽게 뭐라고 하지 못할 거다."

"필요 없습니다."

"...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고집부리는 건지.."

리에티는 그녀를 보며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빠졌지만 그의 생각은 한 남자에 멈췄다.

"그 때문인가?"

"...."

"칠러웨이, 그 남자?"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어찌 됐던 그도 네가 이곳에 남는 것에 큰 역할을 한다는 뜻이군."

"..."

에일렌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자 리에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거라."

"싫습니다."

"그는 엘라님의 것이다."

".... 엘라.. 말입니까?"

리에티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기분 나쁜 듯 에일렌의 미간이 좁혀졌다.

"당신은 왜 그녀의 곁에 있는 겁니까."

"..."

에일렌의 물음에도 리에티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답답한지 에일렌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은 내 것이 된다 했습니다, 엘라가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여자인지 모르겠지만.. 과거를 생각하세요."

"에일렌."

"그만!"

"...."

"제 이름을 그만 부르세요, 저는 이곳에서 파커입니다."

에일렌의 반응에 리에티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몇 번이나 저는 배신당했습니다, 필러 공작.. 저의 아버지에게도.. 영지에 항상 음흉한 얼굴로 서있는 첫째 오빠에게도 지금 당신에게도..."

"나는 배신한 적이 없다."

리에티는 흥분한 에일렌을 안았고 에일렌은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쳤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찌 너를 잊을 수 있겠느냐."

"거짓말하지 마세요."

"조금만 참고 기다려줄 수 없겠느냐?"

"제 목숨이 위험한데 어찌 기다립니까?"

".... 성녀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기다린다면 날개를 펼 수 있다."

"저는..."

"그러니 돌아가라."

"...."

에일렌은 리에티의 말에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조심스레 다가오고 서로의 입이 맞춰지려는 그때 한 남자가 막사의 천을 걷고 들어왔다.

"저기 에일렌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남자, 칠러웨이는 그들이 서로 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휴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그게 저... 죄송합니다."

"잠시만!"

"하.. 하던 거 마저 하세요."

급하게 막사 안을 나가는 칠러웨이의 뒷모습을 보며 에일렌은 골치 아파졌다는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어쩌실 거에요?"

"무엇을?"

"하아.. 아니에요."

"일단은 내가 따라가보지."

리에티는 에일렌을 조심히 자신의 품에서 놓아주고 어디론가 사라진 칠러웨이를 찾았다.

"자유기사는 어디로 갔지?"

"저 숲속입니다."

한 병사의 말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간 리에티는 바위 위에 멍하니 앉아있는 칠러웨이에게 다가갔다.

"칠러웨이."

".... 아 예."

"못 본척해줬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칠러웨이는 자신의 옆에 자리를 내주었고 리에티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일렌은 어린 시절부터 내 약혼자였네 물론 파혼당하긴 했지만.. 아직 가문끼리의 약속은 유효하고."

"아 그렇군요."

"놀랐나?"

"아뇨, 제가 놀랄게 뭐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리에티는 말이 없어진 칠러웨이를 조용히 바라봤다,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꽤나 검을 오래 잡은 듯 거친 손과 숲 안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보여주는 찢어진 옷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자유기사라고 들었네."

"네."

"아빌론님과 엘라님에게 자네의 얘기를 많이 들었네,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맞나?"

"뭐...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거면 맞지 않을까요?"

왠지 모를 퉁명스러운 대답이었지만 리에티는 신경 쓰지 않고 그에게 엘라의 증표를 건네주려 했다.

"이건 뭡니까?"

"엘라님의 증표네."

"이걸 왜 저에게?"

"칠라렌 성국의 유일한.. 아니 유일했던 성녀님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

"우리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칠라렌 성국을 구하려면 자네 같은 인재들의 도움이 필요해 성녀들은 이 성국을 망치고 있어."

"아직 성녀들을 본 적이 없어서."

칠러웨이는 조용히 리에티의 손위에 있는 증표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을 했다 과연 이것을 받는 게 맞는 일인지 그들이 정말 칠라렌 성국을 위해 일하는지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거절하겠습니다."

".... 어째서? 성녀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일 일세."

"저는 주인이 없어도 됩니다, 괜히 자유기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는 게 아니라서."

".... 정말 선택을 하지 않겠다.. 이건가?"

"뭡니까 갑자기 그런 표정을 하고?"

리에티의 표정이 순간 무섭게 변하자 칠러웨이는 당황한 듯 그에게 물었지만 리에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회하게 될 거네."

"안 해요."

"고집부리지 마."

"... 아니 뭔.. 모시지는 않는다고 했지 안 돕는다고 안 했는데."

"성녀님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면 성국을 구원하는 것조차 힘들 거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죠 그쪽이 뭔데.."

"우리는 '충성'을 바칠 사람들을 찾고 있어, 그대가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건 성녀님을 배신할 수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지."

"아니.. 참 답답하게 말을 안 듣네."

"나 또한 답답해, 성녀님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따르기만 한다고 얘기하던 인간들은 모두 배신했거든."

"계속 배신을 하니까 이제는... 의심부터 한다는 거네..? 파블로프의 개.. 뭐 이런 건가?"

리에티의 차가운 눈빛에 칠러웨이는 골치가 아픈 듯 한숨을 내쉬었고 그 증표를 받지 않는 이상 분위기는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묻지, 받겠나?"

'왜 이렇게 증표에 집착하는 거지?'

그의 증표 집착증에 칠러웨이는 증표를 받으려는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역시 안 받을래요."

"...."

"그쪽 때문에 안 받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나는 핑계이고.. 결국 에일렌 때문인가?"

"...?"

"자네가 그녀를 구했다는 얘기는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얼마나 구했던 그녀는 내 약혼자네 자네 같은 평민이 넘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뭐 이런 개새끼가..'

칠러웨이는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머리에 물을 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선택하지 않는군."

"예, 안 합니다."

"사엘라가 잘못 본 것 같군."

"... 그 사람은 어떻게 아십니까?"

뒤돌아 가려는 칠러웨이의 발이 멈추자 리에티는 자신이 잘못 말한 것을 인지한 듯 자신의 입을 막았다.

"어떻게 아냐고 물었습니다?"

"후우... 엘라님의 호위 기사인 동시에 내 부하니까."

".... 아."

칠러웨이는 그제서야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알겠구만.. 사엘라가 협박을 받으면서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이유를... 그런 실력자를 손에 쥐고 농락할 수 있을 만큼 큰 존재가 여기 있었구만.. 대단하네."

칠러웨이는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리에티의 앞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당신이랑 에일렌이 요 며칠간 하는 행동을 보면 나를 노리고 있다는 건 잘 알겠어..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대충 알겠고.."

"...."

"그쪽이랑 에일렌, 두쪽 다 안 따라가."

"진심인가?"

"하지만 에일렌에게는 약속한 게 있어서 도울 거다, 엘라 또한 마찬가지고.."

칠러웨이는 리에티가 들고 있는 증표를 뺏어들고는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받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 그래."

칠러웨이가 클라인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리에티는 조용히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지만 어디선가 나타났을지 모를 키메라에게 눈을 돌렸다.

"네가 아무리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건 네 생각대로 되지 않을 거다."

키에에엑..

키메라를 반으로 갈라버린 뒤 리에티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조용히 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다봤다.

"그 증표를 받은 이상 너는 내 일에 동참하게 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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