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있다.
* * *
"칠러웨이."
"...."
온몸에는 거뭇거뭇 한 핏자국을 묻힌 채 피폐해진 얼굴로 달을 바라보고 있는 칠러웨이에게 다가온 에일렌은 그를 조용히 불렀지만 칠러웨이는 멍하니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칠러웨이?"
"아, 파커."
"둘이 있을 때는 에일렌이라 불러주세요."
에일렌이 눈앞에서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칠러웨이는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
예의상 지은 미소였지만 에일렌은 그 미소를 보며 칠러웨이의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러세요?"
"달이 너무 예쁘지 않습니까?"
"... 그렇네요."
"제가 원래 있던 곳에서는 이렇게 달이 크게 보이지 않았어요 그냥 밤에 떠있는 동그라미 정도로만 인식했는데..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공허 안에서 멍하니 얘기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에일렌은 칠러웨이가 어떤 상태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힘드신가요?"
"...."
"아뇨.. 힘들기는... 아니..."
에일렌의 말에 칠러웨이는 무어라 이야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다양하게 바뀌다가 결국 칠러웨이는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힘듭니다."
"...."
"솔직히 이 짓을 왜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네요.. 멀쩡한 사람들을..."
"죽은 사람들은 멀쩡하지 않아요 칠러웨이."
"하지만..!"
"정신 차리세요, 지금은 쓸데없이 죽은 자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산사람들을 신경 써야죠."
"..."
에일렌의 말에 칠러웨이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죽은 자들이었지만 자신의 손에는 분명 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어 있었고 그는 에일렌처럼 그들의 피가 쓸데없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에일렌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해해 주신 건가요?"
에일렌이 물어왔지만 칠러웨이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 조용히 어디론가 걸어갔다.
"... 어떤가 에일렌?"
칠러웨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숲속에서 조용히 나온 피론은 에일렌의 곁으로 다가왔다.
"... 모르겠어요."
"그저 죽은 자들인데 무엇이 저자를 얽매는지 이해를 못 하겠군."
".... 그러게요."
에일렌에게서 벗어난 칠러웨이는 조용히 숲속을 거닐었다, 기사들은 모닥불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밤늦게 바삐 움직이며 시체를 옮기고 있었다.
"...."
"아, 자유기사님."
"덕분에 오늘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던 칠러웨이가 다가와 함께 시체들을 옮기자 병사들은 그에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닙니다, 별것 안 했습니다."
칠러웨이는 에일렌에게 보이지 않았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고 그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클라인은 물을 건넸다.
"자네가 다했지."
"클라인님."
"무슨 걱정 있나?"
"...."
"있나 보군, 잠깐 얘기 좀 할까?"
"아.. 하지만 클라인님."
"어이! 이 자유기사님이랑 얘기 좀 하려는데 괜찮겠나?"
"예!"
"봤지?"
용병들과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인은 것 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앉게."
"감사합니다."
따듯한 술을 칠러웨이에게 건넨 클라인은 아까 전의 그처럼 멍하니 달을 바라봤다.
"달은 주인으로 삼기에 참 좋지, 빛나고 예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바라는 것도 없고."
"네, 정말로요."
잠시 달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고 이윽고 먼저 입을 땐 건 칠러웨이였다.
"클라인님."
"말하게."
"이게 맞는 겁니까?"
"뭐가 말인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고 죽은 저 사람들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음."
클라인은 칠러웨이의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그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처음 사람을 죽인 건 16살이 되던 해였네."
"...."
"무려 몇 십 년 전 얘기지만 그때는 릴 왕국과 칠라렌 성국의 지속되는 전쟁 때문에 극도로 가난했었어, 나는 뭣도 모르고 밥을 준다는 그 한마디에 한 영지의 병사로 전장에 참여하게 됐지."
"배고픔은 사람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죠."
"맞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냥 농부의 아들로 살고 있을 거야."
"안 어울리십니다."
"하하!"
클라인은 호탕하게 웃은 후 칠러웨이가 손에 쥐고 있는 펜던트를 가리켰다.
"그건 내가 처음 죽인 사람의 유품이야."
".... 왜 이걸.."
"기억하기 위해서지."
"....."
"자네가 무슨 생각 때문에 이리 우울해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아, 저기 널브러져 죽은 사람들을 보며 과연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옳은가? 그들의 목숨을 뺏을 권리가 있는가?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 거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아네."
"예.. 만약 다른 희생을 막기 위해 그들을 죽이는 거라고 해도 그 생각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 그리고 나처럼 그렇게 기억을 못 버리고 지쳐가는 거지.."
"....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후후."
칠러웨이의 물음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클라인은 다시 달을 바라봤다.
"극복 못했네."
"...."
"안고 살아가는 거야."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고통스럽지, 하지만 기억하면 그걸로 되는 거네 저들이 죽는다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나라도 기억해 주어야 해 입장이 바뀌어 내가 저곳에 누워있다고 하면..? 끔찍하지."
"네.. 분명 클라인님을 죽인 사람은 클라인님을 기억하지 않겠죠."
"그렇지, 전쟁에 옳고 그름은 없어 이런 토벌도 마찬가지지 이런 것들은 그저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늘리고 지키기 위해 벌이는 거야 나는 전쟁에서 내 것이 피해 입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참여한 거고."
"...."
"그러니 아무 죄도 없이 죽은 이들을 기억해 줘야 하는 거네 그들을 죽인 후라면 더더욱이 책임을 지고 안고 가야 하지."
"감사합니다."
"힘내게."
"어이! 클라인! 교대 좀 하지!"
"아 갑니다 일루안!"
클라인이 한 남자의 부름에 자신의 어깨를 툭 치고 일어나자 칠러웨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넓은 어깨였지만 달빛을 받아서인지 그의 어깨는 위축되어 보였다.
"무얼 그리보고 있나?"
"누구..?"
클라인이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남자가 병사들과 함께 시체를 치우다 더러워진 옷을 한 손에 들고 다가왔다.
"일루안이라고 하네."
"죄송합니다,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끌끌."
칠러웨이의 반응에 일루안은 재밌다는 듯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웃었다.
"클라인 저 친구의 오래된 인연이라고 해두지."
"친구분입니까?"
"친구라.. 뭐 그렇기도 하고 항상 우리 영지에 도움을 주는 친구지 매번 토벌 나올 때마다 만나기도 하고."
"좋은 분이셨군요 클라인님은."
"좋은 사람이지, 그래도 요새는 젊은 용병 녀석들이 기사 작위를 달고 싶어 안달이라 머리 꽤나 아픈 모양이더구만."
"기사 작위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겁니까?"
"....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까먹었네."
"...."
"나이가 드니 아무것도 필요가 없어져서 말이야 허허."
일루안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자 칠러웨이는 그가 이상한 듯 쳐다봤다.
"자네 이름은?"
"칠러웨이라고 합니다."
"그래 칠러웨이 이곳에 왜 왔나? 어려 보이는데."
"어쩌다가요."
"어쩌다가.. 그렇지.. 모든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전쟁터에 발을 들이지."
"...."
"나 또한 어쩌다가 발을 들였고.."
"후회하십니까?"
"후회하진 않아."
"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 덕에 가족들이 편안하니까, 만약에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네."
"그게 고통에 사무쳐도...?"
"당연하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자신을 칠러웨이가 바라보자 일루안은 피식 웃었다.
"나는 이 성국의 영웅이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네 저기 게으르게 모닥불 근처에 앉아 눈을 붙이고 있는 리에티라는 녀석도 똑같지."
"그런 사람이셨습니까?"
"정말 몰랐나 보군?"
"네."
"흠흠..."
일루안은 칠러웨이가 자신의 팬이라며 한 번 이야기 해달라며 부탁한 클라인을 째릿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나나 저 리에티라는 사람이나 많은 사람을 구했던 적이 있어, 내 이야기를 하자면 귀족 출신으로 우리는 편안하게 저택에 머물고 하인들이 수발을 들어주는 것을 받으며 편안히 살 수 있었지만 위험에 빠졌던 그들을 구하려 키로스 신께서 군에 자원하라고 계시를 내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
"은근 높은 사람이라고 자랑하시는군요."
"아 그렇게 들렸나?"
자신에게 벽 없이 이야기하는 칠러웨이에게 장난처럼 돌려 말한 것이었지만 칠러웨이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일루안은 멋쩍은 듯 허허 웃었다.
"결국 그거군요."
"뭐가 말인가?"
"일루안님은 지키고 보호하려 전쟁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검을 드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음... 그렇게 생각하면... 맞겠지?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그들의 자유를 뺏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이 세상은 어쩔 수 없어 누군가를 지키려면 명령을 듣고 전장에 나가 싸우고 죽어야 해 왜냐면 그게 지금 이 세상이니까 만약 싫다고 해도 어쩌겠나? 내 힘으로는 이 모든 것을 바꾸지 못하니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야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뭐 도움이 됐으면 좋겠지만."
잠시 심각한 표정의 칠러웨이를 보던 일루안은 클라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어깨를 툭 쳐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들과 일을 하러 돌아갔다.
"대충 너희들이 나를 이곳에 왜 보냈는지 알겠어."
누구에게 이야기하는지 칠러웨이가 달을 보며 중얼거렸지만 그의 작은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래.. 전쟁이든 뭐든 죽음은 그 사람의 운명이지만 당연한 죽음이 생기지 않게 바꿔달라는 거겠지.. 순응하지 않고 반항하며 저기 어딘가 높은 곳에 앉은 그들에게 알려주라는 것... 나는 그렇게 이해하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