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있다. (14/90)

〈 14화 〉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있다.

* * *

"리에티님."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그는 조용히 말을 몰고 앞으로 나아갔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그를 보며 키메라가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극도의 긴장감에 자신의 무기를 꽉 쥐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리에티님!"

"아."

몇 번의 부름이 있었을까, 리에티는 정신을 차린 듯 자신의 뒤에 있던 기사를 돌아봤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니, 아직까지는."

"저희는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미네르 숲의 한 가운데까지 전진한다."

리에티의 말에 기사는 조금 불안해졌지만 리에티가 누구보다 실력 있는 기사라고 믿고 있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가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

"리에티님 답지 않으십니다."

"속도가 생명일 때도 있다."

"예 이해했습니다."

리에티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굳게 믿은 기사는 다른 기사들에게 명령하며 부대가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지휘했다.

'커다란 보석.'

리에티는 사엘라가 말한 그 자유 기사가 제대로 된 보석이길 빌며 주변을 살폈다.

"리에티."

"예 일루안님."

"자네의 속도 전술은 이해하겠네만... 너무 조용한 것 아닌가?"

칠라렌 성국의 후작 작위를 가지고 있는 일루안은 릴 왕국과의 전쟁에서 몇 번이나 승리한 영웅이었지만 진짜 영웅이라 불리는 리에티를 대하기 어려운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 저도 그렇게 생각해 긴장하고 있습니다."

"속도를 좀만 줄이는 건 어떤가? 모든 부대가 숲 내부에 분포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한 부대도 만나지 못했어."

"....."

"리에티."

일루안의 부름에 그제서야 리에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부대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며 병사들은 넓게 포진하여 기사들의 주변을 에워쌌다.

"고맙네 얘기를 들어줘서."

"아닙니다, 저도 불안하다 생각했으니 오히려 멈춰주셔서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루안 후작님!"

"음."

이윽고 속도가 줄어든 부대로 돌아오는 정찰병의 모습에 두 사람은 '역시나.'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인가?"

"그.. 그게 주.. 주변에 시체들이 널려 있습니다."

"먼저 출발했던 선봉대인가?"

"그.. 그게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제가 가보겠습니다, 일루안님은 부대를 지휘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네."

리에티는 말에서 내려 정찰병과 함께 문제의 장소에 다가갔다.

"이건.."

리에티는 처참한 광경에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는데 귀족들 사이에서는 '고기 방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선봉대의 깃발을 들고 있는 부대와 후에 출발했던 본진 부대가 뒤엉켜 죽어있었는데 주변에는 키메라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너는 이 숲을 가로질러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귀족들의 부대를 모아라 알겠나?"

"예."

"급박한 상황이니 네 부하들과 당장 출발해."

"알겠습니다."

정찰병이 빠른 몸놀림으로 사라지자 리에티는 죽어 있는 키메라, 병사들과 기사들의 시체를 하나하나 살펴봤다.

'분명 키메라들과 전투하다가 죽은 흔적이지만.'

키메라들을 베어낸 흔적이 있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서로가 검으로 베어낸 흔적들이 있었는데 이들끼리의 전투 와중에 키메라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루안님."

"리에티, 무슨 상황이지?"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로 전멸한 부대가 있습니다."

"내부의 일이라면..?"

"이 썩어빠진 토벌대의 정체가 먼저 출발한 선봉대에게 들통난 겁니다."

"...."

일루안은 리에티의 말을 듣고 나서 예상한 일이라는 듯 머리를 짚었다.

"자네가 얘기한 것이 모두 진실이라면 분명 더 큰 문제가 생길 거네."

"예 그렇겠죠."

"대장군은?"

"아마 후방 부대에서 여유롭게 오고 있을 겁니다."

"허어."

"일단 정찰병들을 보내어 모든 귀족들을 한곳에 모으라 명령했습니다, 곧 있으면 그들에게서도 반응이 올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일에 집중해야겠군."

"예."

리에티가 움직이자 그를 따라 기사들과 병사들이 움직였지만 그들의 전진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르륵..

"!?"

"리에티!"

"제길!"

그어어어...

"끄아아악!"

"구울이다!"

갑작스럽게 넓게 퍼져있던 시체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자신의 병사들을 공격하자 리에티는 검을 뽑아들었다.

"제길! 이런 비겁한 수를 쓸 줄이야!"

"어딘가에 조종하는 녀석이 숨어있습니다!"

"기사들은 녀석을 찾아라!"

"명!"

"제길.. 이 광경을 다시 볼 줄이야."

일루안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익숙한 광경에 분노한 듯 이를 갈았다, '죽은 자들의 왕.'이라고 불리며 릴 왕국과의 대규모 전쟁에도 나타났던 정체 모를 남자는 이곳에서도 나타나 그의 기억을 괴롭히고 있었다.

"역시 무언가에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이 숲은.. 그것을 긴 세월 동안 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

"나도 리에티 자네의 말에 동의하지만 교황님께서 네 명의 성녀들이 나타나고 대규모 토벌대를 꾸리면서 마음을 다잡으셨으니 이번 기회에 해결해야 하네."

"예."

엘라가 말한 자유 기사의 존재 덕분에 빠르게 출발하긴 했지만 그들은 새 교황의 직속 부대로써 이곳의 모든 것을 밝히러 온 존재들이기도 했다.

"기사들은 들으라! 당황하지 말고 대형을 갖춘 뒤 천천히 처리하며 다른 토벌대를 기다린다!"

"명!"

"일루안님은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리에티는 다가오는 구울의 목을 베어낸 뒤 조심스럽게 그들의 상처를 확인했다.

"확실히."

구울의 상처는 검에 베여져 넓게 벌어져 있었고 리에티는 그들이 서로 검을 들고 싸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반대했건만.'

리에티는 희생자로 선봉대를 보낸 새 교황을 원망하며 눈을 뜨고 죽은 구울의 눈을 감겨주었다.

"키로스님의 곁에서 영원하길."

잠시 기도를 하던 리에티는 감았던 눈을 뜨고 뛰어나가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구울들을 눕히기 시작했다, 그의 몸놀림에 놀란 기사들은 멍하니 그의 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러웨이! 그만!"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리에티는 얼굴에 묻은 피를 슥 닦아내고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칠러웨이 그만 나가세요! 더 이상은 뭐가 있을지 몰라요!"

"파커 수적으로 저희만으로는 못 이겨요! 다른 토벌대와 합류해야 합니다!"

"칠러웨이.. 라고 했지 분명."

리에티는 사엘라가 이야기한 이름을 곱씹으며 몰려드는 구울에도 무서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음."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몸, 특별할 것이 없는 그였지만 무엇 때문인지 굉장히 화가 난 듯 새빨게진 얼굴로 달려드는 구울들을 맨몸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어?"

그 순간 날뛰던 칠러웨이와 리에티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칠러웨이는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헉.. 헉 칠러웨이! 다른 기사들이 당신의 속도를 못 따라오고 있어요."

"파커 여기 다른 토벌대입니다!"

"..."

파커라 불린 남자, 아니 에일렌은 리에티를 보고는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네가 이곳에 왜 있지 에일렌?"

".... 알 것 없어요, 그리고 이곳에서 저는 파커입니다."

"에일렌."

고개를 돌리는 에일렌에게 다가간 리에티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그녀의 몸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다시 묻겠다 에일렌."

"...."

"왜 여기 있나?"

"이봐요."

리에티의 강압적인 태도도 잠시 칠러웨이가 그의 손을 튕겨내고는 에일렌의 앞에 서자 리에티는 불편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 하는 짓이지?"

"예의가 없네, 파커 이 사람 알아요?"

".... 아뇨 모르겠어요 칠러웨이."

"에일렌!"

에일렌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리에티는 화가 난 듯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칠러웨이는 그의 앞을 다시 가로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

"그만 멈추고 거기 서있어 모른다는데 왜 자꾸 건드려?"

"... 나중에 시간 좀 내주지 에일렌."

"...."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에일렌의 모습에 리에티는 그녀에게서 눈을때고 칠러웨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가 칠러웨이인가?"

"그렇다면?"

"엘라님과 사엘라를 아는가?"

".... 그런데?"

"나는 두 사람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칠러웨이는 엘라, 사엘라와는 달리 귀족 옷차림의 리에티를 보며 잠시 의심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두 사람이 보낸 토벌대입니까?"

"그렇기도하지만 정확히는 아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더 이상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겠다, 지금 이 길로 곧장 성국으로 가서 엘라님의 곁을 지키거라, 자네는 아빌론님과 내 재량으로 이곳에서 빼주도록 하지."

"잠깐만."

리에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일렌은 다가와서 리에티를 뒤로 밀쳤다.

"왜 칠러웨이를 당신이 마음대로 데려가려고 하는 거죠?"

"에일렌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나는 스스로 가라고 했다."

"그건 명령이에요."

"다시 말하지 에일렌 끼어들지 말라고 얘기했다."

"칠러웨이는 내 사람입니다, 끼어드는 건 당연해요."

"누구 맘대로 너의 사람이라는 거지?"

"제 마음대로요."

에일렌과 리에티가 서로 눈에 불꽃을 튀기며 얘기하자 칠러웨이는 불편한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다가오는 구울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봐요 두 사람."

"....?"

"가서 병사들이나 지휘하세요 내가 왜 당신들 것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사나 병사들이면 이 상황에 이렇게 놀고 있으면 죽이고 싶을 것 같은데?"

"...."

"자네도 좀 이따 나와 얘기하지."

"저 사람 말 듣지 마세요 칠러웨이."

칠러웨이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더 노려보더니 서로의 진형으로 사라졌다.

"..."

잠시 멍하니 다가오는 구울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칠러웨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기랄.."

이곳에 온 뒤로 칠러웨이는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몬스터로 취급되는 구울들을 처음 베어낼 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전에는 사람이었던 이들을 베어내면서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 그런 생각이 들수록 키메라들을 만들어 낸 인간의 얼굴까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욱.."

몇 마리의 구울이 다시 다가오자 칠러웨이는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 하지만 에일렌도 리에티도 자신의 부대에만 신경 쓸 뿐 비틀거리며 넘어진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결국 칠러웨이는 홀로 일어나 입가를 슥 닦아내며 멍하니 서있었다.

그워어어!

"후우.. 후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칠러웨이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그래 일단..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고 생각하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