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화 〉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쳐라. (12/90)

〈 12화 〉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쳐라.

* * *

"허어.."

파커와 칠러웨이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출구는 막힌 것 같은데.."

"생각 중인데.. 영 답이 없네요."

새어들어오는 달빛에 비치는 것이라고는 닫혀버린 석벽과 아무것도 없는 벽뿐이었다.

"아까 탈출하신 곳은..."

"분명히 앞이 막혀있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불길이 뿜어져 나오고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이곳에 있을 수는.."

"그럼 찾아보죠 나갈 방법."

칠러웨이는 불안해하는 파커가 걱정이 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음."

'적어도 나갈 공간은 만들어 뒀을 것 같은데..'

칠러웨이는 애꿎은 벽을 툭툭 두들겨보며 죽은 남자가 숨겨뒀을 만한 공간을 찾아다녔다.

"파커님."

"네.."

"찾는 동안에 그쪽 정체 먼저 얘기해 줄래요?"

"... 정체.. 요?"

"네."

"..."

"그냥 얘기 안 하셔도 됩니다."

파커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자 칠러웨이는 무언가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린 것 같아 손을 내저었다.

"저는.. 칠라렌 성국 필러 공작가의 딸이에요."

"공작이라면 좋은 직위 아닙니까?"

"네.. 표면상 필러 공작가는 굉장히 좋은 집안으로 소문나 있죠."

"오호."

"하지만 저는... 여기에 오빠 대신 '파커'라는 이름으로 공작가의 아들로 온 사람이에요."

'역시나.'

칠러웨이는 예상했던 대로 그녀가 여자였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 맡았던 향기와 가냘픈 몸, 목소리는 절대 남자에게서 나올 것들이 아니었다.

"근데 어쩌다가.."

"토벌대는 적어도 귀족들의 남자가 두 사람이 나오게 정해져 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집안은 셋째, 넷째 오빠가 죽고 나서 후대를 이을 남자가 귀해졌어요.. 그래서 결국 둘째 오빠와 검술에는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제가 전쟁터로 나왔어요 저는 첫째 오빠 대신 숨겨진 다섯째 아들이 됐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군요.."

"네.. 게링턴은 오랜 시간 저희 집안의 집사였지만 아버지가 저를 지키라는 명목으로 보낸 사람이었어요.. 그가 이야기해 주길 실상은 제가 도망치지는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 감시역으로 붙여졌다고 했죠.. 제가 도망치면 첫째 오빠가 전쟁터로 나와야 하거든요."

"쯧."

"저를 보호한다며 경험 많은 기사들을 붙여주긴 했지만.."

'경험 많은 기사들이 아니라 퇴역 기사들만 붙여준 거겠지.. 자신이 전장에 나가지는 못할망정 아버지란 인간이 자식을 방패로 내세워서.. 쯧..'

벽을 두들기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그녀의 아버지를 속으로 욕했지만 그녀의 집안 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게링턴은 오래전부터 집안에서 따돌림당하는 저를 돌봐줘 왔어요 제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런데.. 흑흑..."

"울지 마요."

칠러웨이는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보며 마음이 약해졌다.

"살아서 돌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 저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모두 잃었어요.."

"일단 살아만 있으면 뭐든지 해결될 겁니다."

".... 네."

"일어나요."

"하지만... 아직 나갈 곳은.."

"찾았어요."

"네?"

그녀의 물음에 칠러웨이는 씨익 웃으며 벽 하나를 두들겼다, 벽에서는 텅텅 소리가 나며 뒤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저는 파커.."

"가짜 이름 말고요, 당신의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

".... 에일렌.."

"그래요 에일렌, 칠라렌 성국까지 보호해 줄게요 살아 돌아가면 꼭 보답하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칠러웨이가 검을 있는 힘껏 휘두르자 벽이 우수수 무너지며 새로운 공간이 나왔다.

"멍청한 녀석은 아니라 이런저런 곳을 많이 숨겨뒀어요, 얼른 빠져나가서 빛 좀 봅시다."

칠러웨이는 그녀를 업어들고 통로를 내달렸다, 골렘처럼 이곳을 지키는 키메라가 한두 마리쯤 있을 것 같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 텅 비워둔 상태라 그들은 쉽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음?"

'쉬울 리가 없지.'

하지만 통로의 앞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칠러웨이는 파커를 조심히 내려놓고는 검에 손을 올렸다.

"뭐야?"

"그냥 지나가는 사람?"

"거기서 어떻게 나왔나?"

"그냥 지나가다가?"

"말장난하는 거 봐라?"

칠러웨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럽게 얘기하자 우락부락한 얼굴을 가진 남자들은 자신의 검을 들고 칠러웨이의 주변을 감쌌다.

"잠깐만 친구, 나 돈 없어."

"그래 보이는군.. 이름은?"

"칠러웨이, 근데 왜 시비 거는 거야?"

"이곳은 과거부터 키메라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 우리가 막아두고 있었는데.. 들어갔다가 멀쩡히 나온 인간은 처음 봐서."

"솔직하게 얘기해 주니 고맙구만.. 근데 이쪽은 막혀있었는데?"

"뭐 그건 됐고 칠러웨이라고 했나? 이곳에서 죽기 싫으면 얘기해봐 어떻게 저곳에서 나왔고 뒤에 있는 녀석은 누구인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튀어나오니까 깜짝 놀란 것 아냐?"

"우리는 정체를 물었다."

남자의 압박에 칠러웨이는 한숨을 쉬며 에일렌을 가리켰다.

"저 남자는 파커, 칠라렌 성국의 필러 공작가 도련님이다."

".... 필러.."

남자는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얼굴 표정이 하얗게 질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

칠러웨이는 에일렌을 돌아봤지만 파커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다리를 절뚝이며 앞으로 나왔다.

"소속은?"

"필러.. 필러 공작가에 고용된 용병입니다."

".... 묻겠다."

"네.. 뭐든지 물어보십시요."

"이곳에서 키메라가 한 마리라도 나온 적이 있는가?"

"아.. 없습니다.."

"... 형님은 참 쉬운 곳으로 배치받았나 보군요."

"...."

"당신은 누구죠?"

"요.. 용병.. 클라인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이곳에서는 키메라가 나올 리 없었는데 칠라웨이가 벽을 뚫기 전에는 입구가 막혀있었으며 자주 나온다는 곳에서 이 용병들은 너무나도 여유롭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쯧, 자식들이 거짓말은.."

"저.. 저희가 도련님께 안내하겠습니다."

"...."

에일렌은 뒤에 있는 칠러웨이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이 두 사람의 주변을 호위하며 가고 있는 동안 에일렌의 말대로 그녀의 오빠가 쉬운 곳에 배치받았는지 단 한 마리의 키메라도 공격해오지 않았다.

"도련님."

"무슨 일이냐?"

클라인의 부름에 안쪽에서는 급하게 일어났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 파커라는 형제 분이 찾아왔습니다.."

"파커..? 파커라는 형제는 없는... 아!"

무언가 생각났는지 남자는 막사에서 빠르게 뛰어나와 에일렌을 바라봤다.

"에일렌... 아니! 파커..! 살아있었구나!"

"피론 형님.. 어째서 이곳에 계십니까? 분명히 상급 키메라들을 상대한다고.."

"아.. 그게..."

피론이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자 파커는 고개를 내젓고는 자신의 품에서 죽어간 병사들과 기사들의 쇠로 만든 패를 꺼내들었다.

"모두 전사했습니다."

"....."

"형님이 이곳에서 편하게 있는 사이 겨우 상급 키메라 둘을 만나 모두 전멸했습니다.. 저를 지킨다고."

"미안.. 하구나.."

"죽음이 그리도 두려우셨습니까?"

"이..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보호해 주마..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거라.."

"필요 없습니다."

"...."

"영지에서 나올 때도 그리 말씀하셨죠.. 하지만 지금 저는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에일렌.. 제발.. 이 오라비를 미워하지 말거라."

피론은 에일렌에게 미움을 받는 게 싫었는지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뚝 흐를듯한 눈으로 그의 팔에 매달렸다.

"... 후우.. 됐습니다, 그만하세요 이 기사가 없었으면 저도 키메라에게 먹혀 그들의 육체가 됐을 겁니다."

"정말.. 이 기사 하나가 너를 살렸다고?"

놀라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피론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칠러웨이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칠러웨이를 껴안았다.

"고맙네! 내 하나 남은 동생을 살려줘서.."

'걱정된다는 사람이 하나 남은 동생을 어찌 찾지를 않았을까.'

칠러웨이는 그의 역겨움에 얼굴을 팍 찌푸리고는 그를 옆으로 때어놓았다.

"누가 제 몸 만지는 걸 싫어해서."

칠러웨이의 말에 순간 피론의 표정이 바뀌었지만 그는 다시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오빠의 얼굴로 금방 돌아왔다.

"피곤했을 텐데 얼른 쉬게, 에일렌 잠깐 얘기하지 않겠어?"

분명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얼음이 끼어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라..'

"이봐."

피론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잠시 용병들이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자 칠러웨이는 그들을 돌아봤다.

"아깐 미안했어, 파커 도련님에게는 잘 얘기해 주겠나?"

"아, 나도 무례했으니 사과하겠습니다."

자신이 내민 손을 칠러웨이가 잡아주자 클라인은 다행이라는 듯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내주고 육포 몇 개를 내주었다.

"고맙습니다 클라인."

"고맙기는 내가 고맙지, 자네가 내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파커님에게 모두 벌해달라 말했다면 우리는 저기 저 기사님들 손에 목이 날아갔을 걸세."

칠러웨이는 클라인이 가리킨 곳에 은백색 갑옷을 입고 모여있는 기사들을 보았다.

"젊군요."

"젊지.. 근데 자네 어떻게 살아남은 건가?"

'역시.'

칠러웨이는 클라인의 물음에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커 저분이 끌고 간 부대는 노병들과 신참 병사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들었네.. 자네를 보니 범상치 않는데.. 혹시 게링턴이라는 그 집사인가?"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그렇군.. 그럼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당신들이 여기서 시간을 보내며 앞의 부대가 키메라들의 힘을 빼기를 기다릴 때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가 이곳으로 넘어오게 됐습니다."

"음..."

클라인이 괜한 걸 물었다는 듯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칠러웨이는 피식 웃었다.

"당신들이 무슨 잘못입니까, 용병들이라면 돈을 받고 싸워주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도 쓰레기처럼 보지 않고...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군."

"클라인 당신이 이 용병단의 대장입니까?"

"그렇네만..?"

"당신 피론이라는 저 도련님 믿습니까?"

".... 뭐.. 아직까지는.."

"잠시만."

칠러웨이는 손짓으로 그를 부르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의 동료들을 생각한다면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마세요 이곳에서 용병은 그저 고기 방패일 뿐입니다.)

"....!"

(기회가 있을 때 너무 많은 전력을 소비하지 말고 도망치세요 그게 당신들이 저 기사들과 키메라들 사이에서 살 길입니다.)

"나에게 그걸 알려주는 이유가 뭔가?"

"...."

칠러웨이는 클라인의 눈을 본 처음 그 순간부터 왜인지 모를 믿음이 생겼지만 칠러웨이는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씨익 웃을 뿐이었다.

"아까 먼저 사과해 준 거에 대한 답례입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