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화 〉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쳐라. (11/90)

〈 11화 〉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쳐라.

* * *

"끄으윽..."

구멍 안으로 파커를 따라 뛰어든 칠러웨이는 주변을 돌아봤다, 하지만 어두운 공간은 칠러웨이의 눈을 가리고 있었고 그는 더듬더듬 바닥을 짚으며 파커를 찾아냈다.

"으음.."

그의 옷을 당겨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온 칠러웨이는 파커의 얇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엮이게 해서 미안합니다."

칠러웨이는 자고 있는 파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점점 적응이 되어가는 시야로 주변을 살폈다.

"역시, 안 보이는군."

하지만 칠러웨이는 과거 어두운 집안에서도 잘 돌아다녔기에 이 정도 어둠은 별것 아니었다.

"음.."

턱..

"어어억!"

칠러웨이의 음성이 내부에 울러퍼진 순간 갑작스레 어깨에 올라오는 손에 깜짝 놀란 듯 그는 주저앉았다.

"... 여긴 어디죠?"

"허억.. 허억.. 파커?"

어두운 공간이었지만 틈새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얼굴은 파커의 얼굴이었다.

"칠러웨이.. 여긴.."

"놀랐잖아요... 당신을 구해서 올라왔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왔습니다."

".... 제 기사들은.."

"...."

파커의 슬픈 목소리에 칠러웨이는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 모두 죽은 건가요?"

"....."

"게링턴도.. 모두..?"

"예.. 구할 수 없었습니다."

침울한 칠러웨이의 목소리에 파커는 힘이 풀린 듯 풀썩 쓰러졌다, 그런 그가 걱정된 칠러웨이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흑.. 흑..."

'뭐야.'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청년 파커였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는 분명 여성의 목소리였다.

"... 다들.. 죽었다니.. 흑.."

'키메라 아니야?'

왠지 모를 섬찟함에 칠러웨이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그를 살폈다.

"정말.. 정말 다들 죽은 거예요?"

"아.. 예."

"그럴 순 없어!"

앙칼진 목소리가 파커의 입에서 나오자 칠러웨이는 깜짝 놀란 듯 검자루에 손을 올렸지만 그에게서 공격적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흑.. 흑.."

"괜찮아요.. 다들 파커님 걱정뿐이었습니다."

칠러웨이는 다시 그녀를 위로해 주었고 파커는 칠러웨이에게 기대어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파커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미안해요, 제가 추태를 부렸네요."

"예.."

"전장에서의 죽음은.. 너무나 당연한 건데."

"당연한 죽음이라는 건 없습니다."

"..."

"그들은 파커가 무사해서 기쁠 겁니다."

"네."

다시 돌아온 파커의 남자 목소리에 칠러웨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정체가.. 뭡니까?"

"...."

"키메라?"

"아니에요!"

"헉!"

다시 한번 나온 파커의 원래 목소리에 칠러웨이는 깜짝 놀라 뒤로 철퍼덕 넘어졌다.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그냥 좀 깜짝 놀라서."

"...."

"그럼.. 파커님은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 그건.."

쿵!

".... 잠깐.."

하지만 공간의 안쪽에서 들리는 큰 울림에 칠러웨이는 파커의 입을 막고 검을 뽑아들었다.

"숨어계세요."

"하.. 하지만.."

"그 상태로 어떻게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일단은 숨어서 기다리세요."

자신의 말대로 파커가 돌 뒤로 숨자 칠러웨이는 숨을 죽이고 소리의 주인공을 기다렸다.

그.. 워... 어..

".... 미친."

정체의 주인공을 보자 욕지거리가 칠러웨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쩡!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골렘은 칠러웨이의 머리를 부술 듯 공격을 해왔지만 몸을 빙글 돌려가며 피해냈다.

캉!

"제발 좀!"

검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칠러웨이가 공격할수록 골렘은 더 흥분하여 거칠게 공격해왔다.

"허억.. 허억.. 미친 진짜 어쩌라는 거야!"

이리저리 몸을 굴려대며 피하는 통에 칠러웨이의 몸은 먼지 범벅이 되어버렸다.

"칠러웨이!"

"나오지 말아요!"

"머리! 머리에요!"

파커의 큰 목소리에 칠러웨이는 드디어 답이 나왔다는 표정으로 골렘의 머리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을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맞아라!"

칠러웨이는 온 힘을 다해 큰 돌덩어리를 골렘의 머리에 던졌지만 녀석은 팔을 가볍게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안녕?"

하지만 골렘은 어느새 자신의 몸을 타고 올라와 머리에 검을 꽂아 넣는 칠러웨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파커 나와요."

"괜찮으신가요?"

"아마도.."

피하던 도중 골렘에게 스치듯 맞은 공격에 갈비뼈가 금이 간 것 같았지만 칠러웨이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뭐.. 이 정도 상처로 빛을 얻은 것은 나쁘지는 않네요."

"..."

칠러웨이의 말에 앞을 본 파커는 하나 둘 켜지는 횃불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일단.. 뒤는 없으니.. 뭐가 있는지 가볼까요?"

"네.."

조심히 발을 내디디며 전진하던 파커와 칠러웨이는 갑자기 파고드는 피 냄새에 코를 막았다.

"... 파커, 여기 있으세요.. 아무래도 위험한 냄새가 많이 나니까.."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아뇨, 안됩니다 당신에게는 수십 명의 목숨이 달려있어요."

파커를 뒤에 두고 온 칠러웨이는 자세를 낮추고 점점 짙게 흘러나오는 피 냄새를 따라 이동했다.

"...."

그가 도착한 방에는 많은 시체들이 쌓여있었는데 키메라들은 연신 그곳에 자신이 먹어치운 사람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허어.."

기괴한 키메라들의 모습과 쌓여있는 시체에 칠러웨이는 참고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몸이 반으로 찢어진 게링턴의 시체가 보이자 그는 숨을 뱉으며 검자루를 움켜잡았다.

"개새끼들.."

칠러웨이는 분노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저 키메라들을 모두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더 감정이 끓어올랐다.

"아르타, 치라렌 피에리."

분노에 몸을 덜덜 떨던 칠러웨이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돌렸다.

파앗!

시체들의 아래에서 검은빛이 쏟아져 나오자 칠러웨이는 눈을 가렸다.

그.. 워어..

그리고 눈을 뜬 순간 수많은 시체들이 뒤엉킨 키메라 하나가 몸을 움직이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번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작인가..? 아니야 움직임을 보아하니 시체의 질이 좋지 않아.. 쓰레기들 같은 것들만 온 건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에게서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칠러웨이는 더 이상 못 참겠는지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왔다.

"어이."

".... 뭐야?"

갑작스레 나타난 칠러웨이에게 깜짝 놀랐는지 남자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너냐?"

"...."

"네가 쟤들 다 만들었냐고."

"킬킬.. 그렇다면?"

능청스럽게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얘기하자 칠러웨이는 품 안에 있는 단검을 집어던졌다.

"끄윽! 무슨 짓이야!!!!"

어깨에 단검이 박히자 남자는 아픈지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순식간에 다가온 칠러웨이가 자신의 목을 노리자 그는 몸을 옆으로 던져 피해냈다.

"네가 만들었으면 죽어야지."

"킬킬.. 네가 나를?"

쿵.. 쿵!

남자가 손짓하자 키메라들이 순식간에 방안에 들이닥쳤지만 칠러웨이는 무섭지도 않은지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네가 이곳을 어떻게 찾아낸지 모르겠지만.. 뭐.. 그냥 죽으면 되니까."

"누가 맘대로 죽어준대?"

서걱..

하급 키메라 하나의 목이 손쉽게 날아가자 남자는 칠러웨이가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기사라 판단됐는지 중급 두 마리를 앞에 세웠다.

"상급은 모두 나가있어서 너희들이 상대해 줘야겠다."

그워어..

키메라들은 방이 꽉 찰 만큼 들어오고 있었지만 칠러웨이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땀방울이 흐르도록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쩡!

하지만 결국 그도 수에 어쩔 수 없었는지 키메라의 발길질에 벽으로 날아가 버렸고 바닥에 처박혀야만 했다.

"... 제길.."

너무나 쉽게 이성을 잃은 자신이 후회됐지만 저 녀석을 잡지 않는 이상 이 키메라들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이곳에 끌고 올게 뻔했다.

"거기서 딱 기다려라.."

"킬킬.."

드륵..

"응?"

하지만 벽면에 손을 올린 칠러웨이는 움직이는 돌 하나를 발견하고 이상하다는 듯 그것을 쳐다봤다.

"아.. 안돼!"

"안돼?"

"그.. 그래! 그건 건들지 마!"

"... 내가 왜?"

드르륵!

칠러웨이는 남자의 반응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돌을 당겼다.

쿵! 쿵! 쿵!

크에에엑!

그러자 순식간에 석벽이 내려오며 방의 입구들이 닫혔고 남자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뭐 하는 짓이야!!!!!"

"왜?"

"이 벽이 닫히면 너도 죽고 나도 죽어!!"

"그럼 좋지 뭐 상대하기 벅찼는데."

"이 미친놈이!!"

"미리 얘기해 주던가."

"죽여!! 죽여서 내 앞에 끌고 와!! 제기랄!!"

큰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귀를 후벼파는 칠러웨이를 보며 남자는 분노를 느끼고 키메라들에게 명령했지만 갑작스레 뜨거워지는 방에 당황한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 이거 왜 이렇게 뜨거워?"

"네놈이 발동한 건 이 방에 고위급 폭발을 일으키는 장치다!"

"오.."

"감탄하지 마!"

크에에엑!

그 순간 바닥에서 불기둥이 치솟으며 키메라들이 녹아 사라지자 칠러웨이는 눈을 번뜩이고 탈출구를 찾는 남자를 뒤쫓았다.

"부.. 분명.. 장치가 이쪽에..."

"어딜 가?"

"커.. 어억.."

벽을 더듬던 남자의 머리가 칠러웨이의 검이 번뜩인 순간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잘 가라 개자식아 지옥에서 평생 고통받아라."

마음의 짐을 덜어낸 칠러웨이는 남자가 떨어뜨린 반지 하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숨을 쉬고 불기둥에 타죽는 키메라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벽에 등을 기댔다.

"뭐.. 좋은 일 했으니까 이 정도 죽음이면 만족해야지."

드륵..

"응?"

하지만 등에 무언가가 눌리자 아래에 공간이 생기며 칠러웨이는 그곳에 떨어졌다.

"허어.. 죽으라는 법은 없네?"

"칠러웨이!"

작은 통로는 여러 곳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거미줄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제길.. 이쪽인가?"

"칠러웨이! 나와요!!"

캉! 캉!

닫힌 석벽을 누군가 두들기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는데 칠러웨이는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턱!

"제길."

칠러웨이가 몸을 돌려 막혀있는 벽을 있는 힘껏 차자 돌은 들썩들썩 들리며 움직였다.

"열려라!"

텅!

"칠러웨이!"

"이름은 그만 부르고 꺼내줘요."

돌을 치우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칠러웨이를 있는 힘껏 밖으로 빼낸 파커는 그를 있는 힘껏 안았다.

"괜찮아요?"

"뭐..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정말.."

"네."

칠러웨이는 파커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안심시켰고 석벽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를 말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벌받은 거라고 생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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