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쳐라. (8/90)

〈 8화 〉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쳐라.

* * *

"칠러웨이님.."

"얼른 가세요."

칠러웨이는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세 사람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마시고 가세요."

엘라의 울먹거리는 표정에 칠러웨이는 마음이 약해질까 아예 등을 돌리고 매정하게 얘기했다.

"... 꼭 다시 보도록 하세."

"알겠으니깐.."

아빌론의 마지막 말과 함께 세 사람이 신전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칠러웨이는 아빌론이 남기고 간 육포를 뜯으며 신전 아래의 숲을 바라보았다.

".... 이제 어떻게 한담.."

칠라렌 성국의 토벌대의 현재 위치도 어디인지도 몰랐고 있는 것이라곤 칠러웨이가 토벌대에 쉽게 참가하기 위한 아빌론의 증표뿐.. 칠러웨이는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에 애꿎은 돌멩이만 발로 툭툭 찼다.

"일단.. 내려갈까?"

쿵!

"....?"

칠러웨이가 마음을 다잡고 짐을 챙겨 내려가던 순간 저 멀리 큰 소리가 그의 귀를 강타했다.

"신이 돕는구나."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며 칠러웨이는 저 멀리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고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쿵! 쿵!

"...."

불길의 방향으로 빠르게 산을 내려가고 있었지만 칠러웨이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 그냥 하지 말까?"

마음이 약해지자 칠러웨이의 발은 우뚝 멈춰 서버렸고 갑자기 사라진 자신감에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아들아, 남자는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

'거짓말을 달고 살면 남자가 될 수 없어.'

"... 알겠다구요 정말.."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준 말들이 떠오르자 칠러웨이는 다시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제길! 앞으로 오지 못하게 창으로 막아!"

얼마나 걸었을까? 비명소리와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칠러웨이는 몸을 긴장시키고 사엘라가 마지막에 건네준 검을 뽑아들고 몸을 낮췄다.

".... 저게 뭐야."

시체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것 같은 거대한 키메라가 병사들을 짓이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영화에서 본 괴물의 모습보다 더 기괴했다.

"파커님! 더 이상 못 버팁니다!"

"우리가 후퇴하고 이 괴물을 뒤로 더 보내면 피해만 커진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막아 세운다!"

병사들이 두려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파커라 불린 성기사는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그들의 사기를 높였다.

"키로스님을 위하여!"

파커는 칠라렌 성국이 받들고 있는 신, 키로스의 이름을 외치며 키메라에게 돌진했지만 그의 검은 제대로 박히지도 못하고 튕겨나갔다.

"이런!"

키메라의 손길을 몸을 굴려 겨우겨우 피해냈지만 그는 엉망이 된 옷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키메라의 매서운 공격들을 피해야만 했다.

"아악!"

"저거..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결국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튕겨나간 파커가 나무에 부딪혀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끙끙대자 칠러웨이는 그가 걱정됐다.

"파커님을 지켜라!"

"으으.."

자신들이 믿고 있던 기사마저 무력하게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몇몇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를 돌보는 하인들과 종기사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키메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 죽겠구만.."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섰지만 키메라의 앞을 가로막은 하인들과 종기사들의 검이 덜덜 떨리자 칠러웨이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내버려 두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크르륵...

키메라의 거대한 팔이 그들을 공격하려 올라가는 순간 칠러웨이는 크게 소리치며 그의 주의를 끌었다.

"오우.."

키메라가 자신을 목표로 돌린 채 천천히 걸어오자 그 거대한 모습에 칠러웨이마저 압도되어 감탄사를 뱉었다.

"징그러운 자식!"

텅!

"엑!?"

크라라라락!

품 안에 있던 단검을 휙 던졌지만 키메라에게 상처도 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자 칠러웨이는 이상한 비명소리와 함께 공격을 피해냈다.

"두껍구만.."

칠러웨이는 키메라의 몸뚱어리를 살폈지만 시체들이 섞인 그 몸은 두꺼워 상당히 뚫기 어려워 보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심호흡을 하며 다가오는 키메라에게 집중한 칠러웨이는 유연하게 공격을 회피한 후 힘을 힘껏 끌어내어 검을 키메라의 목 부분에 박아 넣었다.

크에에엑!

반쯤 들어간 검을 빼내려는 듯 몸을 흔들며 키메라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칠러웨이는 파커가 떨어뜨린 검을 들고 다시 키메라에게 달려들었다.

터엉!

"크윽!"

하지만 강한 힘을 가지고 무지성으로 몸을 흔드는 키메라에게 다시 공격을 하기란 무리였고 칠러웨이는 튕겨나가 파커처럼 나무에 처박혀야 했다.

"더럽게 쌔네.."

팔에 금이 간 것 같았지만 칠러웨이의 몸은 엘라가 없어 빠른 회복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더 조심히 움직여야 내가 죽지 않는다.."

칠러웨이는 키메라의 움직임을 살피며 목에 꽂힌 검을 바라봤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키에에엑!

칠러웨이의 턱에 키메라의 공격이 꽂히는듯했지만 그는 허리를 활처럼 휘어 키메라의 공격을 회피했다.

"제발 좀 한 번에 죽어라!"

쩌엉!

크륵.. 크르륵..

칠러웨이의 검이 정확히 꽂혀 있는 검의 자루에 강타하자 검은 키메라의 몸으로 쑥 들어갔고 키메라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결국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해냈다.

"후우..."

키메라가 쓰러졌는지 발로 툭툭 차 확인한 칠러웨이는 자신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성기사 파커의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다친데 없으십니까?"

"아.. 예!"

"뭐 그럼 다행이고.."

"혹시.. 기사님입니까!? 어느 나라의 기사님입니까?"

종기사가 부담스럽게 다가오며 질문하자 칠러웨이는 살짝 그를 밀친 뒤 고개를 내저었다.

"속한 곳이 없습니다."

"예?"

"속한 나라가 없다구요."

"... 그럼.. 용병..?"

"용병도 아닌데요?"

"아.."

칠러웨이의 말에 그제서야 알아챈 표정으로 종기사는 그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아직 어려 보이는 하인들은 그의 주위로 모여들며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용병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라면 혹시 자유 기사?"

"자유 기사들은 모두 그렇게 강하답니까?"

"이분이 특별한 거 아닐까?"

"그만! 너희들은 파커님을 돌보거라!"

하지만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노기사가 그들에게 소리치자 모두 흩어졌다.

"자유 기사라고 하셨습니까?"

"예."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파커님의 기사 게링턴이라고 합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상급과 중급 정도 사이의 키메라인데.. 금패를 가지고 있는 자유 기사들도 어려워하는 저 녀석을 이리 쉽게 잡으시니 깜짝 놀랐습니다."

"쉽게 잡은 것 같아 보이십니까?"

"하하.. 죄송합니다, 저 녀석을 만났을 때는 파커님과 여기 있는 모두를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나타나서 구해주신 후에 마음이 편해져서 농담을 해봤습니다."

칠러웨이는 게링턴의 말에 툴툴거리며 말을 내뱉었지만 게링턴은 웃으며 그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성함이..?"

"칠러웨이입니다."

"그런 이름의 금패나 백금패 자유 기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게링턴이 곰곰이 생각하며 기억을 떠올리자 칠러웨이는 역시나 패 얘기를 하는구나 싶어 자신의 품 안에서 주섬주섬 나무패를 꺼내들었다.

"... 나무패..?"

"예 나무패입니다."

"허어.."

상당히 놀란듯한 게링턴의 모습에 어차피 전처럼 천대받을 것 같아 칠러웨이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요!"

"...?"

"헉.. 헉.. 감사합니다!"

"파커님 아직 움직이시면...!"

"괜찮네 잠깐 물러나 있게."

성기사 파커가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붙잡고 감사 인사를 하자 칠러웨이는 손을 내저었다.

"별거 아닙니다, 몸부터 챙기세요."

"이 정도는 멀쩡합니다, 지난번 토벌 때는 더 많이 상처 입었었는데요."

"아 예."

"칠러웨이님이라고 하셨습니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파커의 모습에 칠러웨이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름은 어떻게 들으시고.."

"제가 귀는 조금 밝습니다, 혹시 지금 고용된 기사단이 있으십니까?"

"아뇨.."

칠러웨이의 대답에 파커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고 파커는 칠러웨이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파커님!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더라도.."

"조용히 하게 게링턴!"

"파커님.."

게링턴이 파커를 일으키려 했지만 파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칠러웨이에게 납작 엎드렸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급 키메라들 밖에 퇴치할 수 없습니다! 상급을 홀로 처리하는 당신이라면 분명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부디 저의 부탁을...!"

"아.."

칠러웨이는 진심으로 부탁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뒷걸음질 쳤지만 게링턴마저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아까는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게 해 죄송했습니다, 나무패의 자유 기사들 중 당신처럼 강한 사람은 없으니.. 제 무례를 용서하시고 부디 파커님에게 힘을 빌려주세요."

자신을 천대할 줄 알았던 게링턴 또한 고개를 숙이자 칠러웨이는 주변의 하인들과 남아있는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

모두 어려 보이는 청년들과 나이가 꽤 많은 병사, 늙은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상처투성이에 성한 대가 하나도 없었지만 칠러웨이라는 실력자가 자신들을 돕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그들의 눈은 똘망 똘망해졌다.

'어디서 시작하던 똑같지 뭐.. 오히려 안찾아 다녀도 되고 잘 됐어.'

"그래요 뭐.. 같이합시다."

"감사합니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칠러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파커는 어린아이같이 기쁜 얼굴로 그의 두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향수?'

자신에게 다가온 파커에게서 꽃향기가 올라오자 칠러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꾀죄죄한 그의 얼굴은 영락없는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었다.

"뭐.. 이제 그러면 어떤 거 하면 됩니까? 이제 쉬러 갑니까?"

칠러웨이가 그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자 파커는 순진한 얼굴로 숲 안쪽을 가리켰다.

"아니요! 앞으로 한 달간 저 숲 안쪽에서 머물며 키메라를 처리해야 합니다!"

"하?"

"상급 키메라를 하나를 처리했으니.. 중급, 하급 합쳐 백마리 정도만 더 잡으면 일찍 복귀할 수 있습니다!"

"...."

칠러웨이는 엘라 일행과 함께 있을 때의 피로감이 몰려와 비틀거렸지만 반짝이는 파커의 눈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이동하는 파커의 부대를 터덜터덜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제길.. 역시.. 나갔어야 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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