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쳐라.
* * *
"흐억.. 흐억.."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한 남자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얼른 오게 칠러웨이."
'망할 놈이..'
아빌론이 앞에서 자신에게 손짓하자 칠러웨이는 업고 있는 여인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어졌다.
"미.. 미안해요."
"사엘라.. 그냥 조용히.. 해요.. 제발.."
칠러웨이에게 패배하기 전 삐끗한 발목이 아픈지 움직이지 못하던 사엘라는 체력이 약한 엘린과 함께 칠러웨이의 어깨에 얹힌 채로 운반되고 있었다.
"근데.. 헉.. 헉.. 아빌론.. 당신은.. 왜.. 헉.. 같이 안 드는.. 겁니까.."
"성기사인 내가 어찌 여성들의 몸에 손을 댈 수 있겠는가?"
"나도.. 기사인데.. 헉.. 헉.."
"자유 기사들은 자네가 알다시피 도덕적인 것이 다른 기사들보다 자유롭지 않은가? 그 정도는 다른 자유 기사들은 당연히 여기는 것일세."
'... 망할 놈이.. 나중에 거짓말이면.. 한대 쥐어박아 줄 거다..'
칠러웨이는 눈앞에 보이는 목표 지점에 두 사람을 내려놓고 땀범벅이 되어 몸에 달라붙은 가죽 갑옷을 옆으로 휙 집어던졌다.
"흐억.. 흐억..."
"기사라는 사람이 훌러덩 훌러덩 벗으면 되겠나?"
"나랑.. 싸우려면 거기서 한두 마디만 더하쇼."
힘이 들어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칠러웨이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기세로 아빌론을 째려보았지만 아빌론은 피식 웃고 자신의 눈앞에 거대하게 있는 신전의 문에 다가갔다.
"... 여기 맞습니까?"
"... 맞네."
눈앞의 신전은 다 쓰러져가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큰 문은 일부가 썩어 유충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고 힐끗 보이는 신전의 내부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 성국 내에서 권위 있는 성녀라는 사람이.. 도망칠까?'
칠러웨이는 권위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신전을 보며 이리저리 도망갈 곳을 살폈지만 높은 언덕에 있는 이곳에서 이들의 눈을 피해 도망갈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엘라, 발목을 다친 건 잘 안다만 성녀님을 지키고 있거라."
"네 아빌론님."
"칠러웨이 가세."
"제길.. 맨날.. 나야."
결국 아빌론의 부름에 다시 가죽 갑옷을 챙겨 입은 칠러웨이는 혼잣말로 투덜투덜 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신전안에 발을 들여놨다.
"잠깐 아빌론."
"... 칠러웨이 자네도 느꼈나?"
"뒤로 가있으쇼 아빌론!"
앞서가던 아빌론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당긴 칠러웨이는 머리를 노리고 순식간에 날아오는 창들을 피해 냈다.
".... 고블린인가.. 귀찮게 됐군.."
키엑 키에엑!
아빌론은 주변에 모여든 고블린들을 보며 중얼거리더니 마른침을 삼켰다.
"... 이렇게 많다면 아빌론 가서 두 사람 옆에 있으세요."
"... 괜찮겠나? 칠러웨이?"
"어차피 아빌론 당신 두 사람을 더 지키고 싶잖습니까.. 계속 저쪽만 신경 쓰는 사람이 전투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 고맙네."
"여긴 제가 맡을 테니 나가세요."
날아오듯 덤벼오는 고블린을 쳐낸 뒤 아빌론에게 길을 만들어주며 칠러웨이는 고블린들이 세 사람을 노리지 못하도록 신전의 문을 닫았다.
"니들 덕분에 돌파구가 생긴 것 같다."
칠러웨이의 섬뜩한 미소에 고블린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지만 그는 그들을 결코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니네들 처리하고 가면 나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도망치는 것에 은근히 죄책감이 있었던 칠러웨이는 말 그대로 고블린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은 살아나가려 신전의 문을 열려 노력했지만 칠러웨이가 언제 걸어둔지 모를 걸쇠가 문에 걸려있었다.
"키키킥.."
키에에엑! 키엑!
고블린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칠러웨이의 검은 한 마리의 고블린도 놓치지 않았다.
"후욱.. 후욱..."
체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검을 휘두르며 스트레스를 푼 칠러웨이는 정신을 차리고 문에 다가갔다.
"아빌론님.."
"괜찮을 겁니다 엘라님.. 분명 문을 열고 나올 겁니다."
"저라도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만히 있어라 사엘라, 그에게는 지금의 너도 방해다."
문의 틈으로 본 세 사람은 문 앞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고 사엘라는 칠러웨이를 벤 것 때문에 상당히 죄책감이 들었는지 문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제길.. 시간이 없어."
칠러웨이는 신전 내부에 빠져나갈 곳을 찾고 있었지만 바위를 깎아 만들어진 신전은 모든 부분이 꽉 막혀 있었다.
"비밀 통로.. 비밀 통로 없나?"
과거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마다 나왔던 비밀 통로를 찾으러 칠러웨이는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비밀 통로의 '비'자도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쾅!
후두둑..
탈출할 기회를 놓친 칠러웨이가 기둥을 힘껏 치자 갑작스레 위에 걸려있던 성국의 깃발이 서서히 내려왔다.
"엉..?"
드드득.. 드드드득...
갑작스레 단상 밑의 공간이 열리며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나오자 칠러웨이는 기쁜 표정으로 다리를 집어넣었다.
"칠러웨이님!!!"
쾅쾅쾅!
"...."
하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엘라의 목소리에 칠러웨이는 몸을 모두 집어넣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칠러웨이님!! 제발! 무사하신가요!? 저의 미약한 힘이라도...!"
"... 아이씨.. 후우..."
칠러웨이는 엘라의 목소리에 가뜩이나 약했던 마음이 점점 더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칠러웨이! 무사한가!?"
"아저씨는.. 빠지지.. 괜히 마음만 약해지잖아.."
무심해 보였던 아빌론의 목소리까지 들려오자 칠러웨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구멍에서 다리를 빼내고 깃발을 원래 있던 위치로 바꿔놨다.
드드드득...
"쩝..."
구멍의 문이 닫히자 칠러웨이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지만 이미 기회는 날아간 뒤였다.
"기다리셨습니까?"
"다친 곳은 없나요 칠러웨이? 회복을...!"
"고블린들 피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고생하셨어요."
엘라의 손수건을 건네받은 칠러웨이는 얼굴에 묻은 고블린의 피를 닦고는 신전 내부에 널브러져 있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바깥으로 빼냈다.
"자네가.. 전부 헤치운 건가?"
"그럼 저 말고 저 안에 누가 있었겠어요, 일단 피곤하니까 조금 쉬도록 합시다."
"그래."
아빌론의 물음에 칠러웨이는 손을 휘휘 저으며 피곤하다는 듯 바닥에 누웠고 엘라와 사엘라는 아빌론이 건넨 천으로 몸을 덮었다.
"쉬십시요 엘라님."
"고마워요 아빌론.."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엘라를 누워서 지켜보던 칠러웨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겉옷을 덮어주었다.
"감사해요.."
"언제 출발할지 모르니 미리 잠을 자요 엘라...?"
칠러웨이가 그녀에게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엘라가 쓰러지듯 잠에 들어버리자 칠러웨이는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놨다.
"사엘라의 발목이 나아질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겁니다.. 아마 이곳은 버려진 곳이니 아무도 모르겠죠."
"그래도 아빌론님 이곳은 엘라님에게 배정된 신전.. 몇몇은 이 신전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겁니다."
"사엘라, 방치된 지 30년도 넘은 신전이다 녀석들이 찾아올 리 없어."
아빌론과 사엘라는 피곤했는지 어느새 칠러웨이의 다리를 베게 삼아 잠이 든 엘라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 이곳이 엘라님에게 배정된 곳입니까?"
엘라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칠러웨이가 조용히 물어오자 아빌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엘라님은 가장 큰 신전을 배정받고 기도하던 성녀님이셨다, 정확히 5년 전의 일이지.. 갑작스레 성국 내에 등장한 성기사들과 자신이 성녀라 주장하는 몇몇 여인들로 인하여 엘라님은 성국 내에서도 가장 뒤로 밀려나셨지."
"... 왜 아무런 반항 없이 물러난 겁니까? 그 사람들.. 가짜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 전에 조금 얘기해 줬지만 그녀들은 굉장한 능력을 보여줬어 엘라님처럼 치료에 특화된 성녀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이 얘기는 제가 하겠습니다."
옛 기억에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하는 아빌론이 답답했는지 사엘라가 다섯 개의 돌을 가져와 바닥에 놓았다.
"이 성국에는 다섯 명의 성녀가 있어요."
"그렇게나 많이..?"
"네, 첫 번째는 엘라님.. 원래는 성국의 단 하나밖에 없는 성녀였습니다 전 성녀에 비해서 그 치료 능력이 상당히 미약했지만 엘라님의 뛰어난 신전 관리 능력과 행하는 모든 일들이 칠라렌 성국 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어요."
"음..."
"과거의 일이지만 릴 왕국은 칠라렌 성국을 이교도 취급하며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나라이기도 했는데 결국 교황님께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 감정은 폭발했어요."
바보 같아 보이는 엘라가 그런 사람인지 몰랐다는 듯 칠러웨이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있는 엘라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두 번째 성녀가 나타나면서부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전투에 특히나 특화된 성녀로써 칠라렌 성국과 릴 왕국의 영토 전쟁에서 갑작스레 등장했어요 그 모습은 마치 신이 내려준 전투의 여신과도 같았죠."
".... 사엘라 말이 맞네.. 그녀는 릴 왕국을 거의 구석 끝까지 몰았고 결국 전투의 신처럼 칭송받기 시작했지.."
"그리고 세 번째 성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번째 성녀는 귀족들을 포섭하는데 능했고 그녀의 사교 능력은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죠.. 그녀는 두 번째 성녀를 도와 릴 왕국의 왕의 목까지 노렸고 결국 그 일은 성공하게 됐죠."
".... 네 번째 다섯 번째 또한.."
"칠라웨이님이 생각하는 그대로에요, 네 번째는 환영을 보여주는 마법을 사용했고 다섯 번째는 어떤 능력인지 모르지만 칠라렌 성국을 부유하고 강대하게 만들었어요 단 몇 년 만에.."
"그렇다면 엘라가 밀려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겠군요.."
쾅!
갑자기 아빌론이 바위를 내려치자 칠러웨이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래요? 깜짝 놀랐네.."
"모두 개 같아서 그러네! 가장 힘든 시기에 나라를 꽉 쥐고 버텨준 엘라님을 생각하지 않고 암살로 돌아가신 교황님과 겨우 안정화를 시켰을 때 들어와 성녀 행세를 하다니! 키로스 신께서 이 장면들을 직접 목격했다면 노하셨을 걸세!"
"뭐.. 신의 딸이라고 불리는 성녀니까.. 그랬겠죠."
칠러웨이는 기구한 팔자가 되어버린 엘라를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사엘라, 아빌론은 어떻게 이 일을 헤쳐갈지 생각은 하고 저를 따라오신 겁니까?"
"...."
"아빌론님과는 달리... 저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평생 엘라님을 따라야 합니다."
"... 후.."
칠러웨이는 한숨을 쉬며 신전 내부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이 폐허와 4명의 사람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빌론, 묻겠습니다 엘라는 칠라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 돌아갈 수 있네.. 하지만 그 치욕을 다시 겪는 것을 옆에서 볼 생각을 하니 치가 떨리네.. 오늘처럼 암살 시도 또한 계속 겪으실 거고.. 생각 같아서는 떠나고 싶은 게 내 마음이야."
아빌론의 분노에 찬 표정에 엘라가 성국 내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칠러웨이는 결정한 듯 나무패를 바라봤다.
"사엘라, 성국 내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자유기사가 돼야 하죠?"
"... 금패도 무시당하는 게 자유기사네.. 최상위 등급인 백금패는 돼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금패는 전 대륙에 다섯도 안되는 적은 숫자에요.. 거의 불가능한..."
"그런 건 됐고 백금패 달려면 뭘 해야 합니까?"
"적어도.. 전쟁에서 큰 공적을 세워 왕에게 백금패를 받거나 많은 사람이 알 정도로 큰일을 해야.."
"전쟁 중인 나라는?"
".... 릴 왕국과 저희 칠라렌 성국, 헬하임 제국과 톤 왕국 정도.."
"전쟁은 조금 힘들 것 같고.. 큰일이라면 가능하겠죠."
"... 잠깐.. 칠러웨이 자네 설마?"
아빌론은 절대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칠러웨이는 결정한 듯 엘라의 머리를 들어 담요를 조심스레 베어주었다.
"키메라 토벌대... 분명 오고 있다고 했죠?"
"... 그래."
"세분은 성국으로 돌아가세요, 엘라님에게는 여행은 나중에 하자고 말씀드리고요."
".... 역시 그 생각인가.."
"어차피 이곳에 눌러 앉을 거 저도 편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분명 키메라들한테 성국 내에서도 크게 입고 있다고 얘기했으니... 출발은 내일 아침입니다."
".... 괜찮겠나?"
아빌론의 말에 칠러웨이는 조용히 신전에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남자는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