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화 〉 엮이면 몸만 아프다. (6/90)

〈 6화 〉 엮이면 몸만 아프다.

* * *

[이익!]

손목이 붙잡혀 버린 검은 갑옷은 팔을 빼내려 노력했지만 칠러웨이의 힘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일단.. 한 대."

쩍!

분노에 가득 찬 칠러웨이의 주먹이 검은 투구를 때리자 종잇장 찌그러지듯 일부가 푹 들어갔다.

[자.. 잠깐.]

"두 대."

쩌억!

[으으윽..]

칠러웨이의 주먹에 정신을 잃은 듯 검은 갑옷의 다리가 풀리려 했지만 칠러웨이는 그리 쉽게 그가 쓰러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 대."

쩌어억!

[....]

마지막 주먹을 맞고 나서야 검은 갑옷은 정신을 잃었고 몸이 축 늘어졌다.

"잠깐만요!"

"...?"

칠러웨이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한번 주먹을 들었지만 엘라는 그가 더 이상 주먹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그의 팔을 온몸으로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엘라?"

"그만.. 이만하면 됐잖아요.."

"아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요 저."

자신의 목숨을 몇 번이나 위협했던 이 사람에게 칠러웨이는 자비를 베풀어줄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다.

"폭력은.. 폭력으로 돌아올 뿐이에요."

"먼저 폭력을 사용했으니.. 제가 폭력을 되돌려주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 하지만 칠러웨이는 살아있잖아요."

"물론 엘라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저는 팔과 다리가 합쳐서 네 번이나 날아갔어요."

"...."

"이제 좀 더 패도 됩니까?"

"칠러웨이 그만하게."

"...."

칠러웨이의 말에 엘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아빌론이 나서서 직접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까지 방해하는 겁니까?"

"그만하게, 엘라님 말대로 자네는 죽지 않았어."

"그거야 엘라님이.."

"엘라님은 자네를 회복시켜주긴 했지만 신체까지 재생시켜줄 수 있는 능력까지는 못 가지고 있네."

".... 에?"

"그거 순전히 자네 능력이야."

뚝 떨어지는 신체들이 다시 몸에 달라붙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 생각하기 싫었지만 분명 엘라의 회복에 의해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었다.

"그래서 이 싸움이 끝나면 엘라님과 나는 자네에게 정체를 물어보려 했었네."

"... 정체랄 것까지야..."

"그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도 잘 모르는 것 같군."

".... 저 말들 진짜입니까? 엘라님?"

아빌론의 말에 칠러웨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라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엘라마저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저는 어느 정도의 상처와 피로는 회복이 가능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신체를 회복하게 하는 건 불가능해요.. 칠러웨이님의 능력이 제 치유에 영향을 받은 것뿐.."

"뭐야.."

"일단 자세한 건 더 시간을 가지고 알아봐야겠지만.. 그 사람을 패 죽이기 전에 적의 머리는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아빌론의 말이 맞아요.. 조금만 진정하고 생각해 봐요 칠러웨이님."

".... 후우..."

아빌론과 엘라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설득하자 칠러웨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무줄기를 잘라 검은 갑옷의 기사를 묶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할까.."

칠러웨이는 말없이 검은 기사를 지켜보더니 투구에 손을 올렸다.

"...."

말없이 투구를 벗기자 흰 백발이 검은 기사의 어깨에 흘러내리며 기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 여자.. 네?"

"여자군."

아빌론은 조용히 칠러웨이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왜요."

".... 아닐세."

"지금 이 상황에서 여자를 때린 기사라느니 남자라느니 그런 어이없는 말은 안 하겠죠?"

"음.."

칠러웨이의 말에 아빌론은 들켰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 아니.. 그럼 어떻게 해요?"

"아닐세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 하아.."

칠러웨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검은 기사의 앞에 앉아 얼굴을 천천히 봤다.

'뭐야.. 여기 평균 얼굴 수준이..'

백발의 여인은 결코 엘라와 비교해 뒤지지 않을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볼은 칠러웨이에게 맞아 빨갛게 부어있었지만 그 정도로 가려질 외모가 아니었다.

"갑옷을 입어 덩치가 커 보였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알았어도 안 싸웠으면 분명 셋 다 죽었을 겁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아빌론과 칠러웨이는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고 엘라는 묶여있는 여인을 말없이 지켜봤다.

"엘라?"

"... 아.. 네?"

"왜 그래요?"

"아.. 그게.."

"....?"

엘라의 복잡 미묘한 표정에 칠러웨이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빌론은 엘라의 반응에 묶여있는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 엘라님."

"...."

"이 사람 혹시.."

"네.. 맞아요."

갑자기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칠러웨이는 두 사람이 대답해 주길 바랬지만 엘라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아빌론?"

"... 칠러웨이, 이 여인은 내가 처리해도 되겠나?"

"갑자기?"

"그래."

"아니 잠깐.. 잠깐..!"

아빌론이 갑작스레 단검을 여인의 목에 가져다 대자 이제는 칠러웨이가 두 사람을 말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냥 눈감아주게 칠러웨이."

"아니 좀.. 무슨 일인데요?"

"...."

"아 답답하네!"

"제가.. 제가 얘기해드릴게요... 아빌론 일단 그녀를 더 꽁꽁 묶어놔주세요."

"알겠습니다."

아빌론이 여인을 묶고 있는 사이 엘라는 돌 위에 풀썩 주저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저 사람은 성국의 기사에요."

"네?"

"성국의 기사로 이번에 저와 함께 파견된 여기사들 중 하나입니다."

"...."

성국의 여기사들은 성국을 위해 싸우고 교황의 명령을 남 기사들과 다르게 성녀들의 직속 기사들로 그녀들의 명령만 이행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제 수발을 계속 옆에서 들어주던 아이예요.. 분명 처음 키메라들을 만났을 때 실종됐던 아이인데.. 어째서.."

"...."

"모습도 상당히 많이 달라졌어요.."

"잠깐.. 그러니까.. 엘라를 따라왔던 여기사들 중에 하나였고.. 다른 성기사들과 함께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저렇게 살아있다?"

"네."

"... 허허.."

'도망갈까?'

칠러웨이는 계속해서 자신을 끌어들이는 늪 같은 상황에 당장이라도 이 숲을 홀로 빠져나가 도망을 가고 싶었다.

'그래.. 이 일만 도와주고 끝내자.'

"그럼.. 일단 깨워보죠."

"네?"

칠러웨이는 엘라와 아빌론을 뒤로하고 허리춤에 매고 있는 수통을 꺼내어 쓰러져 있는 여인의 얼굴에 콸콸콸 부었다.

"허억...!"

차가운 물에 정신을 차렸는지 여인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너.. 이 자식이.."

"당장이라도 머리를 베고 싶은 심정인데..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해야 하니까 깨운 거야."

"...."

정신을 차린 여인은 자신의 몸이 묶여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엘라."

".... 엘라.. 님."

"당신.. 왜.. 그러고 있는 거죠?"

조용히 물어오는 엘라의 목소리에는 분노, 실망감 등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이건..."

"바른 대로 얘기해라."

"아빌론, 잠깐 조용히."

아빌론이 옆에서 거들자 엘라는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여인의 앞에 앉아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신의 이름이.. 분명.."

"사엘라.. 사엘라 입니다."

"... 그래요 저도 알아요 당신을 항상 봤으니까."

".... 죄송합니다."

"할 말은 그게 다 인가요?"

"...."

엘라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이었지만 자신을 사엘라라고 얘기한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자신의 처분을 기다렸다.

"당신과는 십 년 정도 얼굴을 보아왔어요.. 다른 여기사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들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모든 걸 잃은 듯한 엘라의 표정에 아빌론은 그녀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저는...!"

"그만."

"...."

사엘라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아빌론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그녀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죽거라.. 그게 엘라님을 위한 일이니."

"....."

사엘라가 결국 눈을 감고 목을 아빌론에게 내밀자 아빌론은 말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잠깐 아니 진짜 뭐해요?"

"조용히 있게 칠러웨이 자네가 바라던 대로 죽여줄 테니."

"아니 어이가 없네.. 죽이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죽이려고 하고 뭐야 도대체? 이봐요!"

칠러웨이가 아빌론을 밀치고 사엘라에게 다가오자 사엘라는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아.. 아깐 미안해.."

"후우.."

사엘라가 칠러웨이에게 아까 전 극도의 공포감을 느껴서인지 사과를 하자 칠러웨이는 그녀의 모습에 화를 가라앉히고 질문을 했다.

"아니 미안하고 뭐고.. 일단 들어나 봅시다 죽이려고 한 이유를."

"...."

"말 안 하면 진짜 저거한테 죽어요."

아빌론을 가리키며 칠러웨이가 설득하듯 얘기하자 사엘라는 눈치를 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 엘라님을.. 이 숲 깊숙이 접근시키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어.."

"... 너는 성녀의 직속 기사일 텐데?"

"...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명령에 반대하던 몇몇 여기사들의 목숨과 엘라님을 암살하겠다는 협박 때문에.."

"... 그 말 정말인가?"

"네.."

"어째서.."

"죄송합니다 엘라님.. 저희는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가족도 없는 저희에게 잘해주시던 엘라님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빌론의 물음에 사엘라는 고개를 끄덕인 후 충격을 먹은 엘라를 보며 마음이 아픈 듯 눈물을 흘렸다.

"그럼.. 겁만 주면 되는 거 아니야?"

"...."

사엘라는 왜 자신의 팔을 잘랐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칠러웨이가 무서운지 고개를 돌렸다.

"... 그게.."

사엘라가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않자 칠러웨이는 마음 깊은 속부터 분노가 차올랐다.

"... 대충 알겠군."

".... 뭔데요 알려줘보세요 아빌론."

"아까 얘기했던 대로 자유 기사는 이 대륙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다고 했지?"

"...."

"게다가 자유기사 중 나무 패인 자네는 사엘라가 우리에게 겁주기에 딱 좋은 목표였을거다."

"하아.."

"사엘라는 성국의 여기사들 중 검으로는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이다, 칠러웨이 너와 전투를 할 때 바로 목을 밸 수 있었는데 베지 못한 이유가 뭘 꺼라 생각하나?"

".... 말 그대로 자유 기사의 팔, 다리를 잘라서 죽이지는 않고 겁만 주려 했다는 거네요?"

"그래."

"...."

아빌론의 말에 칠러웨이는 이해가 된 듯 자신의 나무패를 바라봤다, 분명 자신이 금 패나 은 패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엘라는 자신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 또한 그러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결국.. 신분 문제였네."

"... 미안해."

".... 후우.. 됐습니다, 어차피 둘 다 멀쩡하게 붙어있으니.."

칠러웨이는 더 이상 얘기하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는 저분 덕분에 살아있습니다 사엘라."

".... 네.."

"나중에 꼭 저분에게 다시 사과하세요."

"... 나중은 없어요 엘라님 저는 이미 당신을 배신한 기사.. 이 일이 끝나면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졌으니 저를..."

"사엘라!"

갑작스레 엘라가 소리를 빽 지르자 사엘라는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신도 없으면 전 정말 힘들어질 거예요.. 이제는 어떤 상황 때문에 당신이 공격한 줄 알았으니 칠러웨이님이 용서한 이상 계속해서 저를 지키세요."

"엘라님..."

"함께 이 일을 꾸민 여기사들도 당신이 저에게 다시 왔다는 것을 알면 돌아오겠죠."

".... 네."

엘라는 조용히 사엘라를 묶은 줄기들을 풀어주고 그녀의 검은 갑옷을 손수 벗겨주었다.

"당신을 믿을게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꼭 그러길 바랄게요."

"네."

두 사람의 우정에 아빌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물을 슥 닦아냈지만 저 멀리 칠러웨이는 잘렸던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좀.. 억울한데.. 기회 봐서 도망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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