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 엮이면 몸만 아프다. (3/90)

〈 3화 〉 엮이면 몸만 아프다.

* * *

"와아..."

시체가 가득한 평야를 지나쳐 강가에 도착하자 엘라는 넘어질세라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려와 물을 만졌다.

"...."

칠러웨이는 말없이 엘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티끌 하나 없는 흰 도화지와 같은 그녀의 모습은 무언가 이상했다.

'밖에 많이 나와본 것 같지는 않아.'

그는 무언가 실수를 했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와 밖을 돌아다닌다면 위험에 빠질 때마다 자신이 엘라를 구해야만 했고 앞으로 고생길은 훤했다.

'제길..'

"칠러웨이님 어때요?"

하지만 머리에 꽃을 꽂은 채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칠러웨이는 절대 엘라를 버릴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이곳에서 그녀를 버리고 간다면 그 우락부락한 기사들이 분명 잡아먹으려 할 것이 뻔했다.

"이쁩니다."

"정말.. 아름다워요..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웠다니.."

몽롱한 눈으로 자연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는 너무나도 황홀해 보였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나오지도 못한 거야?'

칠러웨이는 갑작스럽게 드는 궁금증에 고개를 내저었다.

"칠러웨이님?"

"아..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행이에요."

칠러웨이는 그녀의 인생을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일에 엮이는 게 싫었고 저 펌핑 된 근육으로 달려오는 기사들과 못생긴 키메라들을 더 이상 상대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엮이면 안 된다, 절. 대. 로.'

마음을 다잡은 칠러웨이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주머니에 있는 육포를 꺼내들어 입에 넣었다.

"쯔왑.."

육포가 꽤 커다랬는지 입에 다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생긴 것과는 달리 맛은 괜찮았다.

"꺄아아악!"

"어..?"

그녀가 자유를 모두 만끽할 때까지 기다리려던 칠러웨이는 물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엘라의 허리를 휘어잡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런.. 씨..."

욕지거리가 나오려 했지만 칠러웨이는 분노를 꾹 눌러 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떡하지.. 왠지 엮일 것 같은 느낌인데.."

그녀가 멀리 떨어지기 전 따라가야 했지만 그의 발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엮이기 싫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세상에 혼자 떨어진 지금 상황 파악도 못한 채 죽고 싶지 않았다.

(아들, 너는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나이 중에 사나이였던 아버지가 했던 한마디를 떠올린 칠러웨이는 이를 악물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녀석을 찾아 빠르게 뛰었다.

"찾았다!"

검은 인영이 물속에서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고 칠러웨이는 기사들에게 뺏었던 검을 입에 물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

이미 정신을 잃었는지 녀석의 꼬리에 잡혀 풍선 인형처럼 힘없이 팔랑거리는 엘라가 보이자 칠러웨이는 속도가 줄어든 녀석의 꼬리에 다가가 힘껏 내리쳤다.

퍽!

푸른 피가 물속에 퍼지며 순간 시야가 사라졌지만 칠러웨이는 떠내려가는 엘라를 붙잡고 힘껏 안았다.

"꼬륵?"

하지만 아무리 헤엄쳐도 앞으로 갈 수 없었고 칠러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이유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어?"

몸이 갑자기 물 밖으로 나왔지만 이미 그곳은 공중이었고 자신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아아아악!"

칠러웨이의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곧 물속으로 사라졌고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손 하나가 불쑥 물속에서 튀어 올라왔다.

"이런 제기랄.. 허억.. 허억..."

그의 품에는 완전 물에 젖어 정신을 못 차리는 엘라가 안겨있었고 칠러웨이의 얼굴은 몇 십 년은 늙은 듯 홀쭉해져 있었다.

'기회만 되면 어디다가 놓고 가든지 해야지..'

"흐억.. 흐억.."

겨우 엘라를 물 밖으로 끌어올린 칠러웨이는 예전 생에서 배웠던 심폐소생술을 하려 자세를 잡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꾸륵.."

몇 번이나 가슴을 눌렀을까 엘라가 물을 토해내며 천천히 눈을 떴고 칠러웨이는 그제서야 살았다는 듯 숨을 돌렸다.

"... 헉.. 헉.. 엘라.. 당신.. 오랜만에 밖에 나온 건 알겠는데.. 조심 좀 해요.."

"미안.. 해요.."

몸이 축 처진 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엘라가 자신을 쳐다보자 칠러웨이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키에에에!

"움직일 수 있어요?"

"네.. 네.."

"기어서라도 물가에서 빠져나가요, 나무뿌리 밑이던 수풀 속이던 이 근처에 숨어 있으세요."

".. 괘.. 괜찮으시겠어요?"

"엘라가 여기 있는 게 더 방해입니다."

"...."

"가세요!"

칠러웨이는 날아오는 꼬리를 피해냈지만 순식간에 다가오는 괴생명체의 힘을 막지 못하고 뒤로 뒹굴었다.

"욱..!"

피를 울컥하며 뱉어낸 칠러웨이는 짜증 나는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보았다.

"한 번 놓쳤으면 끝이지 왜 자꾸 질척대?"

키게게게게!

마치 칠러웨이의 도발을 알아들은 듯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칠러웨이는 빠르게 괴물을 스캔했다.

"저것도 아닌 것 같고.. 저것도 아니야.. 저거? 아냐.. 저건가?"

공중제비하듯 날렵하게 녀석의 공격을 피해냈지만 칠러웨이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전의 키메라처럼 약점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크에에에엑!

"제.. 엔장!"

그는 결국 눈앞으로 다가온 괴물의 거대한 입에 먹혀버렸고 그제서야 괴물은 만족한 듯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물로 걸어들어갔다.

"기다려!"

키기기기기..

"기다리라고!"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칠러웨이를 되찾으려 엘라는 괴물을 멈춰세웠지만 이미 괴물은 배가 불렀는지 엘라를 무시했다.

"아.. 아아..."

결국 쓰러지듯 주저앉은 엘라는 참던 눈물을 터뜨렸고 자신에게 잘해준 칠러웨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키메라들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

"... 나 때문에.. 또."

크에에에에에에엑!

".....!?"

물속으로 들어갔을 터였던 괴물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갑자기 머리를 드러낸 채 수면 위로 나오자 키메라들은 일제히 도망쳤고 고통스러운 듯 괴물은 무언가를 토해내려 노력했다.

"이런 개 같은 새끼!"

하지만 토해내기 전 어디서 나왔는지 머리가 검에 꿰뚫렸고 끈적한 진액을 뒤집어쓴 채 한 남자가 낑낑대며 거대한 입에서 나오려 노력하고 있었다.

"엘라!"

"아!"

그의 부름에 엘라는 황급히 뛰어가 온 힘을 다해 입을 벌렸고 칠러웨이는 몸을 겨우 빼낼 수 있었다.

"히.. 히히.. 나왔다.."

이제는 정신이 나간 듯한 그의 모습에 엘라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팔목을 잡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만해요, 죄송할 필요 없으니까.. 왜 울어 또.. 사람 마음 아프게.."

진액을 털어낸 후 칠러웨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자신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 키메라들을 훑었다.

"숨어있으라니까 왜 나왔어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냥 숨어있어요..."

"위험한 상황 벗어나니까 다시 위험해졌잖아요."

".... 미안해요."

"앞으로 나랑 같이 다니려면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해요, 일단은 벗어납시다."

"..... 네."

"뒤에 있어요."

엘라의 귀여운 모습에 미소 짓던 칠러웨이는 키메라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자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다섯.. 여섯.. 꽤 많네.. 이 녀석을 두려워하는 놈들인가? 하기야.. 물속에서는 숨쉬기 힘들 테니 끌려가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지.."

키에에엑!

"응?"

하지만 갑작스레 쓰러지는 키메라의 모습에 칠러웨이는 실눈을 뜨고 그 상황을 지켜봤다.

"뭔 일이래?"

백색의 가죽 갑옷을 입은 한 남자가 거대한 덩치로 유유히 키메라들의 사이로 달려 나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황소와 같았다.

"엄마야!"

하지만 그가 멈추지 않고 달려오자 칠러웨이는 엘라를 감싸 안고 옆으로 굴러야 했다.

"뭐야 당신!"

"... 내놓거라."

".... 뭐.. 뭘?"

"성녀님을 돌려달란 말이다!"

부웅!

"히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칠러웨이는 그 빠른 속도에 당황하고 엘라를 옆으로 밀친 후 주먹을 피해냈다.

"무슨.. 누가 성녀라는...!"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 아.. 아빌론.."

반짝이는 대머리를 가지고 있는 기사 아빌론은 칠러웨이를 공격하기 보다 쓰러져 있는 엘라에게 다가갔고 엘라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사라지셔서 놀랐습니다.. 돌아가신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 고마워요 아빌론 찾으러 와줘서.."

".... 저는 지금 이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버러지보다 못한 저 비겁자를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겠습니다.."

"아.. 아빌론.."

"버.. 러지...?"

생전 한 번도 듣지 못한 버러지와 비겁자라는 말에 칠러웨이는 울컥했지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눌렀다.

"사나이도 아닌 녀석."

".... 뭐?"

"비겁하게 여인을 이렇게 납치하다니.. 너는 사나이도 아니다."

쿵..

칠러웨이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으로 아빌론을 쳐다봤다.

"... 내가 비겁해..?"

전에 있던 세계에서 그는 절대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약한 자를 괴롭히지 않았었다, 그런 그에게 친구들이 붙여준 학창 시절 별명은 '정의의 사나이'였었다.

(민석아, 사나이가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면 너는 가문의 수치다.)

"으드득..."

"꼴에 화는 나는가?"

"아빌론.. 그만해요."

"뭐가 그리 화가 나지? 네가 했던 행동은 남자로서 수치인 행동들이었다."

결국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며 칠러웨이의 검이 뽑아졌다.

"내가.. 너 같은 놈에게 칭찬을 바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를 평가하는 것은 참지 못하겠어."

"흥."

칠러웨이의 몸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오자 아빌론은 몸이 저릿저릿했지만 아빌론이 보는 그는 납치범 그 이상도 아니었다.

"지옥에 가서 반성해라."

쩌엉!

"... 무슨!"

검이 휘둘러져오자 아빌론은 손쉽게 막아냈지만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짓이기듯 누르고 있는 칠러웨이의 얼굴은 공포스러웠다.

'사람에게 이런 살기가 나온단 말인가!?'

"나는 사나이야!"

마치 짐승과도 같은 짙은 살기에 아빌론은 뒤로 물러나며 엘라를 보호하듯 앞에 섰다.

"그만해요 아빌론!"

"가만히 계십쇼 성녀님."

"저분은 절 도와주셨어요!"

"저런 자가 말입니까? 도와준 게 아니라 납치당하신 겁니다 성녀님."

"네가 먼저 건드린 거다.. 이발론인가 발냄새인가 뭔가 하는 놈."

"아빌론이다."

쩌억!

"....!"

쩌억! 쩌억!

칠러웨이의 검을 막아냈지만 아빌론은 자신의 검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계속해서 크게 휘자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국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빌론은 어느새 다가왔는지 검을 들고 있는 칠러웨이를 보며 눈을 감았지만 검이 떨어지기 전 엘라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

"....!"

"엘라 비키세요."

"그만하세요 칠러웨이 제가 사과드릴게요!"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을 죽이면 안 돼요!"

"저에게 저런 모욕을 준 건 저 녀석이 처음입니다.. 엘라님이 누구던 저자가 어떤 사람이던 상관없어요."

".....제가.. 제가 이렇게 사과드릴게요 칠러웨이."

"...."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앞에 서있는 엘라의 얼굴을 보며 칠러웨이는 차마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검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사과와 용서는 사나이의 미덕.)

아버지의 말이 생각난 칠러웨이는 검을 거두고 떨어져 있던 자신의 육포 주머니를 주워들고는 아직까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빌론에게 눈을 돌렸다.

"조심해라 너..사나이는 너처럼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지 않아."

"네놈은.. 누구냐.."

"진짜 사나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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