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준비(3)
* * *
카밀라. 내가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를 납치했던 인물이었다. 나를 납치 했을 때도 나를 작정하고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때의 나는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에(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녀의 협박에 살짝은 기쁘다는 듯이 반응했었다.
그 반응이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걸까. 극적으로 엘리사와 소니아가 나를 구출한 뒤에도 그녀는 나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다.
그동안에는 그녀가 나에게 가지는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없는 게 신기하다 그랬나. 나는 금방 꺼질 관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내가 위험할 때 자신이 위험할 수 있음에도 맞서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인 모습. 나를 지켜주려고 하던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녀를 마냥 나쁜 인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이 말을 엘리사가 들으면 거품을 물겠지만 말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되었던 나는 그녀에게 은혜를 입은 몸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웬만한 패악질에는 눈을 감아주고 싶었다. 주로 나에게 하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지만.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지금 신나 있다는 것. 그뿐이었다.
“기분이 어때.”
내 앞에 앉은 카밀라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게 물어보았다. 원래라면 그녀의 씰룩거리는 표정을 보고 화가 나야 정상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동안 셀 수도 없는 억까를 견뎌온 사람이었다. 이 정도는 모른 척 넘길 수 있었다.
이런 일차원적인 도발에 넘어가기에는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발자국이 걸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 표정이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보통 연륜이라고 하나. 나에게는 연륜이라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나이를 따져보면 아직 30대인 주제에 말이다.
“슬퍼 죽겠네요.”
나는 퉁명스럽게 그녀의 질문에 튕기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에 와서 그녀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것은 아니었다. 그냥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그녀가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는 알고 있을 텐데도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살짝만.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슬픔보다는……. 다른 감정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 같은데?”
쓸데없이 감만 좋아서.
“알아서 뭐 하게요.”
“그냥. 궁금하니까 물어보는 거지 딱히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편안하다는 얼굴을 하는 그녀를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침대로 오라는 손짓을 보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굳이 그녀의 옆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사실 이미 이 방에 들인 순간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음에도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녀를 경계하려고 했다.
이건 뭐랄까. 내 정조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까.
내 시선을 인식한다고 해도 바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그녀를 향하게 되었다.
“우리 아가씨가 말을 안 해도 대충은 알 것도 같고, 말이지.”
“......제가 대체 왜 당신한테 아가씨라고 불리는 거죠.”
엘리사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아가씨라고 부른다는 건 내게는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카밀라기에 더더욱. 엘리사가 부르는 아가씨와 그녀가 부르는 아가씨는 큰 차이가 있었다.
차라리 이름을 부르는 게 났지.
아무리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녀가 괜히 엘리사가 나를 부르는 느낌이 나서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가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싫어?”
“싫다기보단…. 살짝 꺼려지는 거죠. 당신도 굳이 저를 아가씨라고 부를 필요는 없잖아요.”
“흐음.”
카밀라는 혼자 무언가를 생각하는듯하더니 얄밉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방금 굳이 그럴 필요가 생긴 거 같네.”
“......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방금 대화에서 그럴 이유가 생겼다고? 한참을 생각하려다 나는 이제 생각을 끊었다.
어차피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겠지.
“뭐……. 그러면 맘대로 부르세요.”
딱히 호칭에 집착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굳이 저렇게 불러야 할 필요가 있나 해서 물어본 거지. 카밀라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그거는 그거대로 쇼크지.
“그래서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에요.”
“내가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인가?”
“아뇨.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죠. 제 말은 굳이 제 방에 들어온 이유를 묻는 거잖아요.”
지금 왕성에 있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이야기였다. 카밀라 역시 회귀자 라는 거겠지. 사실 한참 전부터 짐작했던 일이었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엘리사랑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들을 막 하고, 소니아랑도 노엘이랑도, 심지어 타이렌과도 아는 척을 했으니 내가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로 싸우고 있으면 그들은 회귀자일 가능성이 컸다.
망국의 공주니, 이 세계의 진실이니, 유일신을 위해 어쩌구 저쩌구……. 처음에는 흥미가 솟았어도 이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한숨만 나왔다.
들어도 뭔 소리인지 모르는걸. 아마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당연히 우리 아가씨 보러 온 거지.”
여전히 쓸데없이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 카밀라. 내가 그녀를 지금 처음 보는 거였으면 반해버렸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카사노바가 따로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말을 내뱉을까.
싫다는 건 아니지만, 저런 말을 들으면 두 뺨이 살짝 뜨거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굳이 지금 보러 왔다고요?”
어차피 회의에서 보게 될 텐데. 굳이 창문을 두드리면서까지 나를 만나려 한 이유가 있는 건가.
만약 이 방에 엘리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엘리사를 말릴 자신이 없었다. 특히 카밀라만 만나면 눈이 돌아가 버리는 그녀이기에 더더욱.
“엘리사가 있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없었잖아? 그러면 된 거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넘기는 카밀라의 얼굴은 여전히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내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정도로 말이다.
자기 외모에 자신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녀의 외모가 아름다운 건 나도 알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저렇게 당당하게 넘어가려는 그녀에게 살짝 짜증이 났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거 하나하나에 반응하기에는 지금 내 뇌에는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회의 한 번만 하면 아가씨는 정신이 나가 있을걸. 그때 인사하는 것보다 지금 얼굴 봐두는 게 났지.”
“......그런가요.”
카밀라의 입에서 회의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회의까지는 단 사흘만이 남아 있는 상황. 여러 상황 때문에 잊어버리고 잊어버렸었다고 해서 회의가 미뤄지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어깨가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겨우 잊고 있었다기에는 뭐하고, 정말로 신경도 쓰지 못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그냥……
아직 나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일 뿐이다.
“왜 이렇게 축 처져 있어.”
나도 모르게 표정에 감정이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감정을 숨기는 것을 잘하지 못하기는 했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카밀라.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평소라면 뭐라고 한마디 했을 것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해서 심란하게 만들어.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서 악의라는 감정은 읽을 수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카밀라가 나에게 악의를 가진 적은 없었지.
오히려 호기심에 둘러싸여 있었지. 그때의 나는 그것도 악의의 일종으로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나는 악의라는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안전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악의라는 감정 없이 나에게 다가오는 이런 인간들에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차라리 나를 증오하고 싫어해 주면 좋을 텐데. 나는 멍하니 그녀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 뺨에는 그녀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전해서 왔다.
내가 손을 치우라고 해봤자 듣지도 않겠지. 나는 멍하니 그녀의 손길에 내 머리를 의지하고 있었다.
“다 알고 말하는 거면서….”
내 투정에 카밀라는 웃으면서 내 뺨을 쓸어내렸다. 그래 저 미소. 쓸데없이 자상한척해서 짜증 난다니까.
“뭐, 그렇긴 하지만.”
거봐. 내 직감을 대부분 맞아떨어진다니까.
“사실 오늘 온건 아가씨를 구해주러 온 거거든.”
“.......네?”
그녀의 뜻 모를 소리와 함께 앞으로의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