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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19화 (119/120)

〈 119화 〉 준비(2)

* * *

…..요즘 내가 모르는 유행이라도 있나?

나는 이마에 남은 온기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불을 깔아뭉개고 위에 누워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이불 안으로 들어갈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마구잡이로 구겨진 이불 위에 누워있었기에 하반신이 상반신보다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일은 어제와 방금 벌어진 일들이었다.

엘리사 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소니아까지 이럴 줄이야. 소니아는 입술이 아닌 이마에 했다지만 충격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침대에 누워 몸을 비틀어 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숨이 차올라서 얼마 안 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의미였던 걸까.

도망칠 길이 없었던 엘리사와는 달리 소니아의 행동은 나에게 도주로가 많이 남아있었다.

그냥 친애의 표시겠지.

그냥 그만큼 나를 아낀다는 거겠지.

내가 나 같은 건 상관없다고 말해서 그렇게 충격적인 행동은 한 거겠지.

“하…”

베개를 내 얼굴 위에 올리고 그 위에 한숨을 내뱉었다.

짧게 내뱉은 한숨은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베개에 막혀 금방 사라졌다. 남아있는 흔적이라고는 입김으로 따뜻해진 베개의 감촉뿐이었다.

겨울철에 손에 입김을 불어 넣듯이 따뜻해진 베개를 인형을 대하듯이 끌어안았다.

소니아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고 나서 그녀가 보인 멋쩍은 표정은 내가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표정이었다.

뭐랄까……. 쪽팔려 하는 것 같았달까.

그때 당시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천천히 생각해 보니 아마 그런 얼굴이었던 것 같았다. 아마.

이러다가 노엘도 내 얼굴에다가 입술 박치기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노엘까지 그러면 바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야겠다.

숨을 들이쉬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많은 일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중간고사 때의 일을 제외하면 나 자신이 열심히 임한 일들도 없었다.

내가 스스로를 돌아봐도 괜찮았던 적이 없었는데 과연 그녀들은 내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든 걸까.

도저히 풀리지 않을 질문이었다.

그나마 볼만한 부분은 자스민의 얼굴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소니아나 엘리사, 노엘의 얼굴과 비교하면 부끄러워질 뿐이었다. 얼굴에 반할 거라면 자기들끼리 반했겠지.

나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이들보다 아름다웠던 이들이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진 게 모두 그녀들의 장난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자꾸만 냉정한 이성 한 조각이 내 생각에 딴지를 걸었다.

장난이라기에는 진지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나 하찮은 존재였다.

그러면 뭐 어떡하자는 건데………

아무리 중얼거린다고 해도 그럴듯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 방에는 나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틀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간다고 바뀔 것도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틀 전으로 돌아간다면 엘리사의 고백도, 소니아의 입술도, 다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인제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정이었지만.

지금까지 잘 지내왔던 그녀들과의 기억을 생각해 보니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일종의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똑똑똑

“어……?”

그때, 창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두드릴 때와 달리 높고 청명한 소리.

누군가 창문에 노크하고 있었다.

똑똑똑

한 번 더.

나는 방금 들린 소리가 환청이 아니라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긴 엘리시아의 왕성이었다. 심지어 내가 위치한 방은 왕성 최상층에 있는 방이었기에 창문에 누군가 올라온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커튼을 열면 작은 테라스가 있었지만, 그곳에 누군가 함부로 들어온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소니아와 노엘이 마법으로 이 방에 함부로 못 오게 막아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의 방해를 뚫고 이곳에 온 가객들인가?

창문에 커튼을 쳐 두었기에 누가 노크하는지 보이지는 않았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은 몇 배나 증폭되었다.

커튼을 걷어볼까 생각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납치 비스름한 것을 몇 번이나 당해온 입장에서 괜히 궁금증을 가지고 다가갔다가 큰일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언제 오는 거지.

엘리사가 올 때까지는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무섭다고 방 밖으로 나가기에는 밖에는 더 무서운 회귀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단은 최대한 버텨보다가 너무 무서워지거나 창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옆방에 있는 노엘 방으로 피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창문 밖에서 소리가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창문과 커튼에 막혀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근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 같은데.

두 개의 방벽에 막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방금 들렸던 목소리는 몇 번 정도 들어보았던 목소리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혹시 모르니까 커튼만 걷어보자. 커튼만.

내가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면 바로 다시 치면 되는 거고. 내가 아는 사람이면 창문을 열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뚜벅뚜벅

내 발걸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 방에 소리를 내는 존재가 나 뿐이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공포 영화의 무서운 장면이 있기 전에 있는 상황 같아서 자꾸만 걸음이 빨라졌다.

“?????????????”

“안녕. 꼬마 아가씨.”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내 예상을 뒤엎는 인물이었다.

고혹적인 미소, 눈을 두기 어려운 복장, 눈 밑의 점. 내가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카밀라.

방학 전까지만 해도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던 사람이었다. 방학 때는 엘리시아로 넘어가서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회귀자 같았는데. 혹시 회의에 참여하려고 온 걸까?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유혹?”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한쪽 손에는 꽃송이가 모여 있었다. 방금 딴 듯 생생해 보이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자신들을 뽐내고 있었다.

창문이 열리지도 않았지만, 향기가 풍기는 것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꽃이었다.

물론 내가 그 정도에 넘어갈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도 납치를 당해서 그런지 요즈음 모든 것을 의심하는 병이 생긴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혹시 창문 좀 열어줄래?”

“....왜요.”

카밀라는 뻔뻔하게 나에게 창문을 열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내가 열어주겠냐고……………

“방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당신이 들어오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내가 팔을 뻗어 커튼을 닫으려고 하자 카밀라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가씨. 내가 아가씨를 위해서 열심히 싸웠는데 그렇게 내치기야?”

“.........”

그…. 그런가?

생각해 보면 전에 타이렌이 왔을 때 같이 싸워줬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생각했던 상황 중에는 최고의 상황 같은데. 지금 그녀에게 너무 쌀쌀맞게 대하는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거죠?”

“우리 아가씨가 꼬시지만 않으면 안전하지 않을까?”

누가 우리 아가씨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문을 향해 다가갔다. 카밀라의 말대로 그녀는 나를 도와주었던 인물이었다. 한 번쯤은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문을 열어줬다고 바로 나를 덮치지도 않을 것 같고 말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카밀라라는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아가씨. 선물.”

“아……. 고마워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나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종이로 포장된 꽃다발에는 빨간 리본이 묶여 있었다. 알록달록한 꽃들은 제각기 향기로운 냄새를 뽐내고 있었다.

딱 봐도 상당히 가격이 나가는 것 같은데. 나는 꽃다발을 들고 향기를 맡으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이거 어디서 산 거에요?”

“? 내가 만든 건데?”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꽃다발을 쳐다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가지들과 땅에 뿌리내린 듯 활기찬 꽃잎들, 너무 부드러워 비단 같다고 착각할 만한 종이까지.

이런걸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동반돼야 할 게 분명했다.

“..........정말로요?”

“당연하지. 아가씨 날 못 믿어?”

“믿겠어요….?”

이 사람은 왜 이리 당연한 말을 하는 걸까.

“그런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고민하는 표정을 보니 더욱 기가 막혔다. 그게 고민할만한 문제야?

“그럼 믿으려고 노력해봐.”

카밀라는 나름의 답을 냈는지 입에서 손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누가 보면 그녀가 이 방의 주인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는걸 보아하니 앞에 앉으라는 뜻이겠지.

“노력은 해볼게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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