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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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방이었다. 책상에 타고 있는 촛불 또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조용히 자신을 태우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작은 방. 아본이라는 도시의 풍경이 집약된 듯한 이 방에 자매가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얼굴은 자매라고 믿지 못할 만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는 고급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였다. 의자에 앉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는 그녀와는 반대로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특히 표정에서 많은 차이가 일어났다.
의자에 앉아 차분히 루시를 쳐다보는 다리아의 얼굴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혐오, 경멸, 분노 세세한 감정을 들여다보아도 자기 동생에게 내뱉을 감정은 아니었다. 제1 황녀인 그녀의 입장에서 동생이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루시가 왕위에 관심이 없다고 한들 그 혈통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부정한들 그녀는 엘리시아의 왕족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다리아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회귀 전에는 루시가 왕궁에서 뛰쳐나갔기에 괜찮았지만, 지금 루시는 왕궁에 발을 뻔뻔하게 붙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대부분 해결되었다. 미래에서 큰 사건을 일으킬 범죄자들은 미리 처분되었고 논쟁이 벌어질 일들도 회의를 통해 넘어갔었다.
자스민을 모시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들은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았다. 최선을 다해 섬멸했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자스민에게 접촉하기까지 했다.
다리아는 차분히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것을 루시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동생아.”
“......”
루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쥔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다리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내가 너에게 이상한 부탁을 한 것도 아니잖니.”
피식 웃는 다리아의 얼굴에는 루시를 향한 명백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그저 자스민과 엘리사가 팔데우스와 어떤 일들을 했는지 알려주면 된다니까.”
루시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본 것들을 다리아에게 말하게 된다면 자스민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다리아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리아가 무슨 짓을 벌인들 루시에게 있어서 하나뿐인 언니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만큼 소중한 이들이 안전히 걸려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자스민.
다른 이들은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이들이었다. 자신이 그들을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정도였다.
하지만 자스민은 달랐다. 그녀는 아직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사람이었다.
회귀자가 아님에도 회의에 불리는 것 부터 좋지 않은 일이었다. 회의에 참여하는 이들 대부분이 벨리타 자스민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에 회의에서 그녀를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전신이 떨리는 듯한 마력.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존재감. 그 광경은 자스민에게 큰 타격일 게 분명했다.
그러니 루시는 다리아에게 카나리아 제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할 수 없었다. 혈육의 부탁이기 전에 자기 동료들의 안위가 걱정되었기에.
“후……. “
그런 모습이 불편했는지 다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는 표정으로 루시를 재촉했다.
“동생아. 네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 말과 동시에 빛을 내는 다리아의 눈. 그 광경에 루시는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문제였다. 다리아에게는 야망이 있었고, 야망을 이룰 수 있는 능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권력이 있었다.
입을 열기 싫은 상황에서 다리아는 선택을 강요했다. 이대로 입을 열지 않으면 자스민에게 피해를 입힐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말은 하면 자스민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술이나 먹고 싶다.’
루시는 저번에 사두었던 술병을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날려 보냈다.
그녀가 사 두었던 술병은 브레토니아 유명한 술이었다. 살벌한 날씨와는 맞지 않게 향긋한 과일 향이 코끝을 맴돌고 높은 도수 같지 않게 부드러운 술이었다.
적국의 토지에서 나는 술을 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저번 회의에서 브레토니아 출신인 회귀자에게서 사정사정해서 구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루시는 한참의 생각을 한 후에 다리아에게 입을 열었다. 수많은 저울질 끝에 그녀로서 괜찮은 답을 얻었다.
“그날……………”
쾅!
문이 닫히고 루시는 성큼성큼 헤쳐 나갔다.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내뱉었다지만, 죄책감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자스민이 충격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 더욱 죄책감이 가중되었다.
그래, 자스민. 그 순진한 얼굴에 인생을 달관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듯한 그녀. 자스민의 얼굴을 보면 자신이 아무것도 한 게 없을 텐데도 죄책감이 들었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언뜻 보면 활발한듯하지만 중간중간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손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엘리사가 왜 그렇게 미친 듯이 감싸고도는지 알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저번에 만났을 때, 소니아와 노엘의 반응을 보고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소니아와 노엘이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자스민이 그 누구보다 극진히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스민의 위태로운 표정을 생각하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 조금 더 계획이 필요했다.
그녀가 안전할 수 있는 계획이…….
짐승이야 짐승….
나는 아직도 따뜻한 입술을 매만지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빨개진 얼굴은 도저히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내 입술을 3번이나 훔쳐 가다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순간의 따뜻함을 떠올리는 것뿐이었다.
엘리사가 밖으로 나간 지 꽤나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는 얼굴을 진정시켜 놓아야 했다.
그녀가 돌아올 때 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 보여줬다가는 한 번 더 당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랑….
엘리사가 말한 문장들을 씹으면서 나는 침대를 굴러다녔다. 내가 평생 생각해 보지도 못한 단어였기에.
그녀가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보내는 표정과 행동이 나에게 그냥 호의라는 이름에 포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그 포장지가 사랑이라는 것으로 포장될지는 몰랐을 뿐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것이었기에. 나는 더더욱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슬쩍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방문 앞에는 엘리사가 아닌 소니아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의외였기에 나는 소니아에게 말을 걸었다.
“소니아…?”
내 말에 소니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화답했다. 분명 어제도 보았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굉장히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은 미소에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엘리사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고 나갔어.”
“아하…….”
나는 멍하니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장이 덜 깨서 그런가 갑작스럽게 움직이니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너 어제 엘리사랑 무슨 일 있었어?”
“어……?”
“오늘 그 새끼 표정이 너무 좋아서 너하고 있었던 문제가 해결된 건가 했지.”
“하하……….”
그걸 해결됐다고 해야 하나. 그냥 엘리사가 밀어붙였을 뿐이라고 해야 하나. 최소한 그녀가 어째서 나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는 알게 되었으니 해결되었다고 봐야 할까.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화답했다. 뭐, 대충은 해결되었다고 봐도 되는 거겠지.
“........”
소니아는 내 얼굴을 보더니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면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쓸쓸하다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내가 지내는 방에 소니아와 노엘이 앉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노엘과 소니아가 내 양옆에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평소에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이들이었기에 색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옆에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두 명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다르게 앉아있고 싶을 때도 있는거지.
“으음………. 이제 내일이면 회의가 시작되는 거지?”
나는 소니아의 몸에 머리를 기대며 운을 띄웠다.
회의는 바로 내일 시작되었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중요한 것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아무런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내가 따로 준비해 놓은 것은 없었다. 다들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걱정이 쌓여가고 있었다.
회의에서 내가 어떤 취급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에 이런 두려움은 더더욱 증폭되었다.
“너는 그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