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다시 한번
* * *
소니아의 아침은 다른 이들에 비해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무리 피곤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금방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도착한 ‘경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녀의 선천적인 체질이기도 했다. 소니아는 남들과 비교하면 수면욕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녀로서는 깨어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니 좋아질 뿐이었다.
소니아는 방에서 나왔다. 항상 하던 대로 왕성의 산책로를 거닐 계획이었다. 아본의 동식물들이 살아 숨 쉬는 산책로는 그녀가 이 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몇 주간 하던 것 같이 간단하게 차려입고 방문을 열고 복도를 바라보았을 때, 의외의 인물이 그녀의 옆에 있었다.
자스민의 시종인 엘리사였다. 보통 이 시간대에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놀라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엘리사는 세상 누가 보아도 기분이 좋다고 생각할 만큼 행복으로 표정이 절여져 있었다. 소니아가 그녀의 이런 표정을 보는 것은 단언컨대 처음 보는 일이었다.
“.....뭐하냐?”
조심스럽게 엘리사에게 물음을 건넨 소니아. 밝은 표정으로 소니아를 쳐다보는 엘리사의 얼굴에 소니아는 괜히 말을 걸었다고 후회했다.
“안녕하십니까. 소니아님.”
‘언제적 호칭을……’
소니아는 말을 삼켰다. 저 행복한 얼굴을 보니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게 만들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죽어가는 표정이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자스민과 엘리사의 관계에 있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엘리사가 저렇게 행복한 웃음을 지을 리가 없었다.
좋은 일이었다. 둘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자스민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행복해하는 꼴을 보니 살짝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스민하고는 잘 해결됐나 보네.”
“그런 셈이지.”
꼬았다.
말이 짧은 것도 그녀의 표정도. 소니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자기 머리만을 계속 쓸어댔다.
분명 기분이 나빠야 할 일이 아닌데. 그녀의 표정, 말투, 행동 하나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야. 네 그지 같은 성격은 병이라니까.’
‘진짜 병인가……’
소니아는 노엘이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로 자신이 그녀의 행동에 이상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소니아는 콧등을 꾹꾹 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더 이상 얘기를 섞었다가는 자신의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복도를 거니는 그녀의 발걸음은 어째서인지 살짝 사나워져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악!!!!!!!”
나는 베개에 입을 막은 채로 비명을 질렀다. 지금 나는 부끄러움과 쪽팔림이라는 감정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좌우로 침대를 굴러 다니며 몸을 뒤틀었다. 내 머릿속에 떠도는 그 순간을 잊기 위해서였지만, 이렇게 몸을 뒤틀수록 점점 선명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 눈을 감고 있는데 엘리사의 얼굴이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는 그녀의 볼이, 이슬이라고 착각할 만큼 촉촉했던 그녀의……
“으으으으으으으으…….”
이런 거밖에 생각을 못하는 건 좀 변태 같잖아…….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엘리사 탓이야. 안 그래도 심란한데 아침에 그런 짓 까지 하는 게 어딨어. 진짜 짜증 나 죽어버리고 싶어……
어젯밤 엘리사의 키스 후에 나는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어, 어……?”
내 입술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도 포근한 감각이 내 입술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입술을 움직일 수 없으니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다.
팔도 다리도 얼굴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얼굴을 붉히는 것뿐이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보았던 그녀의 얼굴 중에서 가장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엘리사의 얼굴에 내 얼굴은 더욱더 빨개질 뿐이었다.
“믿어지십니까?”
후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뺨에는 붉은색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자 못하고 고개를 내렸다.
나를 사랑한다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고백받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리사의 얼굴을 보았다. 저 얼굴에 담긴 감정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사랑. 그뿐이었다.
“일단 알겠으니까…….”
나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만큼으로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데, 그녀의 감정을 마주 보는 것 까지는 너무나 힘들었다.
“그렇네요.”
엘리사는 싱긋 웃으며 나를 침대에 눕혔다. 자애로운 손길로 내 눈을 감겨주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나는 아무런 딴지도 걸지 못하고 엘리사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편안한 밤 되시길.”
너 때문에 다 틀렸거든….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눈이 떠졌을 때, 내 눈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떠졌다. 피곤함과 어색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의 깔끔한 아침이었다.
슬며시 창문을 바라보니 아직 해가 제대로 뜨지도 않은 걸 보아하니 시간대 또한 이른 새벽인 것 같았다.
차라리 엄청나게 늦게 일어나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주말인데 습관적으로 일찍 일어난 날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지금 눈을 감으면 더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기보다는 눈을 놀려 엘리사를 찾았다.
지금 내가 엘리사를 찾지 못하면 나는 잠자리에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일어나셨습니까.”
내가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엘리사 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니, 내가 고개를 뒤트는 각도가 너무 적어 그녀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은은한 욕망이 추가되었던 것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엘리사가 담아두고 있었던 감정은 연모와 성욕이었다.
나를 은은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작정하고 얼굴을 숨기지 않은 이상 내가 알아차릴 수 없을 리가 없었다.
엘리사가 나를 어떻게 쳐다보고 있는지 이제는 모른척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건지, 어째서 지금 진심을 드러내는 건지, 어떡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 처럼 인사를 건네야 하나? 그런다고 지금의 관계가 예전처럼 돌아가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벨리타 자스민은 엘리사와 마주 봐야 했다. 그것이 내가 내린 최선의 판단이었다.
“안녕, 엘리사.”
하룻밤이 지났다고 엘리사에게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내가 입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고 뜨거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마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던 탓이 아닐까.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어째서인지 내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째서일까. 어젯밤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을 터지게 했던 이가 지금은 내 눈치를 쩔쩔매며 보고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나도 웃겼다. 나를 옭아매거나 나에게 쩔쩔매거나 하나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리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편안한 밤 되셨습니까?”
“....그럭저럭.”
엘리사 덕분에 편안하게 잠을 잤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짐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몸에 남은 피곤함이 없었던 탓일까 내 몸은 어떠한 저항도 없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다.
나와 그녀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나는 어젯밤의 일이 계속 떠올라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그녀 또한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나에게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솔직히 아직도 혼란스러워.”
“.......”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단 이유도, 네가 나에게 했던 행동도.”
나는 숨을 뱉으며 그녀의 품에 기댔다.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 보니 우연히 그녀의 품에 들어가게 됐을 뿐이었다.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번 정착지를 찾게 되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네가 슬퍼할 것 같다는 것 만큼은 알 것 같아.”
나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녀의 가슴과 팔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훨씬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만약 엘리사의 얼굴이 내 앞에 있었으면 나는 제대로 말도 못 했겠지.
“일단은, 지금은, 자살하려고 하지 않을게…….”
나는 멍하니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살하려고 애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내가 자살하려고 하면 엘리사가 나에게 어떤 짓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문답 뿐일 때도 키스를 받았다. 지금 그녀 앞에서 위험한 행동을 하면 그녀가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할까. 살짝 생각해 보았지만, 별로 좋은 미래가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엘리사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고도 없이 일어섰기에 나는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간단히 드실 수 있는 과일을 가져오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녀를 제지하려고 했다.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성에서 아침을 먹는 것 보다는 여기서 간단히 아침을 때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허리를 펴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엘리사는 문을 향해 걸어 나가다가 다시 나에게로 다가왔다.
“?”
뭐 놓고 간 게 있나. 나는 멀뚱히 앉아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사는 고개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그대로 내게 다가왔다.
중독적이던 촉촉한 감촉이 다시 한번 내 입가에 느껴졌다.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엘리사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면서 문을 열고 나갔다.
당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