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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14화 (114/120)

〈 114화 〉 황녀

* * *

다리아가 황녀라니. 쓸데없이 여유로워 보이던 모습은 왕족이라 그랬던 거였나.

하긴 만났을 때부터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설마 황녀, 그것도 1 황녀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잠만 그렇다면…….

“루시도 황녀인 거야?”

“그런 셈이지.”

내 물음에 소니아를 짧게 답했다. 어딘가 씁쓸한 듯이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슬픔이 함유되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루시가 황녀라는 사실은 더더욱 충격 이었다. 다리아는 처음 본 인물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루시는 그동안 우리와 몇 주나 함께 있었기에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루시가 황녀……. 술 먹고 지랄하던 술주정뱅이가 황녀…. 내 머릿속에서 황녀라는 단어 하고 쉽게 매치가 되지는 않았다.

보통 왕족이라고 하면 보통 기품이라는 게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루시에게는 그런 기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로 숨긴 건가? 그게 숨겨지기는 한 걸까.

그것보다 황녀인 것 치고는 너무 쏘다니는 거 아닌가. 황녀치고는 우리랑 이곳저곳 돌아다녔고, 이런 여행에 익숙한 듯 보였는데….

그건 회귀자라서 그런 건가? 하긴 회귀자라면 다 해봤겠지.

황녀치고 루시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건 어째서일까. 솔직히 한두 명 정도는 알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해.”

“그냥……. 갑자기 충격적인 사실을 들으니까 머리가 어지럽네. 다리아는 그렇다고 쳐도 루시가 황녀라는 건 충격이라서.”

“뭐, 걔는 지나치게 순박한 면이 있지.”

소니아는 내 의견에 동조하며 음료를 목구멍에 삼켰다. 순박하다기보다는 노역하는 중년의 냄새가 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뭐…….

“엘리사. 너는 알고 있었지?”

“....네. 다만 그녀가 아가씨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에 말씀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 또한 그것이 조금 더 났다고 생각했고요.”

그런가. 사실 루시가 처음부터 자신을 황녀라고 소개했으면 친해지는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 세계에서 신분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아마 내가 조금 더 거리를 두지 않았을까.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와 루시의 판단이 맞았다는 게 사실이었다.

“친구야, 이번 회의에 참여해야 할 텐데 괜찮아?”

문득 노엘이 내게 물었다. 노엘은 빨대로 음료를 쪽쪽 빨아 이제는 음료는 전부 없어지고 얼음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그럴 필요가 있나? 나는 며칠 정도 관광 삼아 머물다가 테오도르로 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의문으로 가득 찬 눈빛을 담아 물어보았다.

“나는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야 되는거 아니야?”

회의는 회귀자만 참여할 수 있다는 건 엘리사에게 들은 말이었다. 아무리 내가 회귀자들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한들 나는 회귀자가 아니었다. 내가 참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원래는 우리 친구 말이 맞는데. 이번에는 규칙이 살짝 바뀌었다고 들었어. 예외적으로 회귀에 대한 진실을 들은 자들도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이야. 이 규칙이 이번만 허용된건지 앞으로 계속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자스민 너를 회의에 끌고 오겠다는 말이야.”

“나를……? 어째서? 나는 아는 것도 없는데.”

나는 아는 게 없다. 진심으로 나라는 사람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벨리타 자스민이 대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자스민을 데려가려는 그들이 어떤 조직인지 나는 아는 게 없었다.

무지의 극치라고 볼 수 있는 나를 왜 회의에 참석시키려 하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파도처럼 나중에 이유를 듣는 게 편할지도 몰랐다.

“그건 우리도 몰라. 우리는 반대하고는 있지만. 지금 여론을 보면 거의 확정됐다는 분위기라 힘들 것 같아. 미안하지만 친구도 마음의 준비는 해두는 게 나을지도 몰라.”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건 다들 알고 있어. 대부분 이들은 그저 너를 벨리타 자스민이라고 생각해서 조롱하고 욕보이고 싶은 거겠지만……”

소니아는 뒷말을 삼키고 나를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런 눈빛을 받으니 내 어깨가 점점 내려가는 것 같았다.

“웬만하면 별일이 없을 거야. 너는 회귀자들이 알던 자스민이 아니니까.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우리 선에서 막을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엘리사는 내 손을 잡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사명감과 분노가 적절히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비율은 처음인걸.

“아가씨. 아본에서 어디를 가실 때에는 꼭 저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뭐, 쟤가 안 되면 나나 소니아를 불러도 되니까.”

하긴 아본에는 지금도 수많은 회귀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얼굴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나를 싫어하는 회귀자가 혼자 다니는 나를 뒤에서 찔러버릴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녀들의 경고를 들으니 뱉어내야 할 한숨이 더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다.

“자스민.”

“어?”

“왕궁에서 네가 지내는 방이 정해지면 나한테 말해 그 옆방으로 옮기게.”

“어. 친구야 그럼 나도 네 옆방으로 갈게.”

나는 왕궁에서 잘 생각이 없었는데…. 원래 내 계획은 아본의 최고급의 숙소에서 머무는 거였다. 마지막 여행지인 만큼 최대한 좋은 방을 잡으려고 했었다.

왕궁에는 하루도 있어 보지 않았지만, 내게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회귀자들과 다리아 때문이었다.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 너를 지키려면 아본 시내가 아니라 왕궁이 제일 안전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곳이 내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까.

그래. 저 넓은 왕궁을 나는 아직 10%도 보지 못했다. 왕궁 여행 패키지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다.

왕궁 안에는 나를 위한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거의 최상층에 있는 방이었다. 창문에는 아본 시내의 전경이 크게 펼쳐져 보일 정도였다. 방의 크기는 소니아가 지내던 곳보다 넓었지만, 가구의 개수는 볼품없을 정도로 적었다.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 의자 두 개, 책장 하나가 이 방의 가구였다. 처음 방의 문을 열었을 때는 창고 열쇠를 준 줄 알았다. 몇 개 없는 가구들은 깨끗이 닦아놓았다는 게 코미디라면 코미디였다.

“지랄 났네.”

“친구가 너 엿먹일려고 작정한 것 같은데?”

내 방을 본 소니아와 노엘의 한 줄 평이었다. 그녀들은 필요한 가구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사실 나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침대는 있었고, 최선을 다해서 가구들을 닦아주지 않았는가.

여기서 평생 살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뭐 어때. 침대에 누워 향기를 맡아보니 이불과 베개도 방금 빤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깨끗한 거면 됐지. 그렇게 생각하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엘리사를 진정시켰다.

이제는 엘리사가 주먹을 쥐고 있을 때마다 불안하다는 말이지.

강아지라면 입마개라도 채워놓을 텐데 엘리사에게 입마개를 씌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니까.

“엘리사 여기에 앉아.”

나는 침대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데 그녀는 꼿꼿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저러다 앉겠지 했는데 이제는 평생 저러고 있을 것 같아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앉아. 네가 서 있는걸 보는 것도 힘들어.”

내 말에 엘리사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와는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밤을 새워도 모자랄지도 모를 정도의 이야기였다.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엘리사와 같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옆에 앉았지만, 나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생기는 일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는 해결한 적은 손에 꼽았다.

“......죄송합니다.”

내가 그녀에게 건넬 말을 찾고 있을 때, 엘리사는 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가씨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됐습니다. 아무리 저와 아가씨의 사이가 어떻게 되든 저는 아가씨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냐. 엘리사.”

나는 그녀의 말을 웃으면서 부정했다. 지금 이 대화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쏟아냈던 감정을 주워 담을 시간이었다.

“사과해야 할 쪽은 나야.”

나는 엘리사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엘리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 전에는 내가 너무 내 감정만 쏟아낸 것 같아. 사실 너의 입장에서 내 말이 워낙 어이없게 들렸을 수 있다고 생각해.”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말이었다. 지켜야 할 대상이 자신의 목숨은 신경을 쓰지 말라고 말하는 꼴이 아닌가.

나라도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나를 부르는 엘리사의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해 보였다. 그녀가 한 말도 내가 한 말도 그 어느 것도 그녀에게 상처를 줄 일이 없었을 텐데.

“당신은 죽고 싶은 건가요?”

그녀는 그 누구보다 아파 보이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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