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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13화 (113/120)

〈 113화 〉 어이없음

* * *

왕궁을 벗어날 때까지 대화가 오가는 일은 없었다. 왕궁을 구경하는 것도 잊은 채 나는 앞으로만 나아갔다. 화려하고 따뜻한 공간이라고 생각되었던 왕궁이 이제는 마물의 둥지 같았다.

소니아는 짜증이 난다는 것을 여실 없이 보여주는 중이었고, 노엘 또한 평소에 짓던 미소가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나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또각또각 울리는 발걸음 소리만을 들으며 왕궁 바깥으로 나왔다. 아까까지는 공기가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는데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저곳에 다시 발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끔찍할 따름이었다.

“하아…. 그냥 그 새끼 얼굴 보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어야 했는데.”

“친구야. 그랬으면 나중에 더 까다로워 지는 거 알잖아.”

“알지. 알고 있어도 좆같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왕궁 밖에 나오자마자 그들은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왕궁에서 말이 너무 없었기 때문인지, 몇 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소니아는 다리아에 대해서는 질색하며 머리를 쓸었다. 그녀의 반응은 엘리사나 카밀라에게 보였던 반응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엘리사와는 견원지간이라는 느낌이었고, 카밀라나 타이렌과는 적이었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소니아가 다리아에게 가지는 감정은 혐오와 역겨움이었다. 소니아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녀가 다리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생각했다. 방금처럼 대놓고 혐오감을 나타낼 줄은 몰랐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리아의 추악한 부분들이 있는 걸까. 웬만한 이들에게는 웃으며 대하는 노엘이 그녀를 볼 때는 표정이 굳어있었던 것도 신기했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그전에 한 명 더 불러야지.”

소니아가 누구를 부를 생각을 하다니 뭐지. 싶었는데 그녀는 대충 허공을 손가락질했다.

엘리사 말하는 거구먼.

“내가 부르면 오겠지?”

평소 같았으면 대충 공중에 손을 휘젓거나 평범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와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와 줄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불러도 그냥 쌩 까는 거 아니야?

“자기야. 일로 와볼래?”

그때 노엘은 나를 그녀의 앞으로 불렀다. 나는 네 자기 아닌데…. 툴툴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가니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오라며 나를 잡아당겼다.

충분히 가까워지자 노엘은 내 몸을 뒤집더니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나는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그녀의 키 차이 때문에 올려다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소니아가 껴안을 때는 그래도 얼굴은 보였는데 노엘은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노엘의 가슴골에 내 목하고 머리가 파묻혀 버려서….

“노엘……………”

“왜 자기야. 뭐 불편한 거 있어?”

불편하다기보다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노엘이 처음 껴안았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올려다보려고 한 순간 느껴지는 가슴의 감촉에 내 머리에는 폭탄이 터졌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왕궁 바로 앞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앞에서 무슨 행동을……. 심지어 이거랑 엘리사 부르는 거랑 무슨 상관인 거야?

“뭐하냐.”

“강아지 소환의식.”

“미친년.”

보다 못한 소니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노엘을 말렸다. 그래. 네가 봐도 여기서 이러는 건 좀 그렇잖아.

하지만 우리의 노엘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자랑스럽게도 말이다.

노엘은 내 오른쪽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내 등에 가해지는 압박도 거세졌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쥐구멍 같은 곳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기야.”

“읏… 왜에….”

내 귓가에 속삭이는 노엘의 목소리에 몸이 움찔거렸다. 내 죽어보라고 이러는 건지 그녀는 ASMR처럼 작고 약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보이쉬한 음색을 가진 노엘의 목소리는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얼굴이 뜨거움도 한계를 넘어 터지기 직전이었다.

“저기 오른쪽에 있는 나무 보여?”

“...나무?”

노엘이 말한 대로 오른쪽에 높게 뻗은 나무를 쳐다보았다. 나무는 바람이 많이 부는 건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나무들을 바라보니 저렇게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뭔가 다른 게….

“설마…….”

나무를 집중해서 바라보니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아니, 왜 나무 위에 있는 거야?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지.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튀어올 것 같지 않아?”

“그냥 평범하게 부르면 안 되는 거야…?”

“재미없잖아.”

이런 방법으로 엘리사를 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노엘이 어이없었고, 그 방법에 넘어갈 것 같은 엘리사도 어이없었다. 가장 어이없는 건 얼굴이 빨개진 나라는 사람이지만.

노엘은 얼굴을 나에게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이제 대꾸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추위를 두려워하는 야생동물처럼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될 대로 되라지…….

쾅!

그 순간 폭발음이 들렸다. 거세게 일은 바람에 나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였다. 노엘의 품 안이라 그런지 내 생각보다 안정감이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이런 행동이 고마워지는 참이었다.

“팔 풀어.”

엘리사는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방금전의 폭발음이 일어난 원인은 아마 그녀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노엘의 얼굴을 잡으며 팔을 풀라고 협박했다.

“친구야. 이런 거에 넘어가면 어떡해.”

노엘은 얼굴을 실실 쪼개면서 나를 더 끌어안았다. 주먹을 꽉 쥐는 엘리사를 보고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히 싸움이 난다. 저번처럼 멍때리다가 싸움이 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왕궁의 입구에서 싸움이 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은 명확했다.

“엘리사. 안녕?”

“아… 안녕하십니까….”

그러니 일단 엘리사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대부분의 싸움이 엘리사가 도발에 넘어가서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그녀만 진정시키면 반은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그녀가 왜 광견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엘리사는 내 얼굴을 보고 부끄럽다는 듯이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래 너하고는 이야기해야 할 것이 많지.

“일단은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엘리사.”

“네…. 알겠습니다…….”

엘리사는 어떻게 해결된 것 같았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 초대에 응해주었다. 내 뒤에 있는 노엘을 보고 다시 표정이 썩어버렸지만 말이다.

나는 한쪽 팔을 위로 뻗었다. 노엘의 어깨를 만지고 싶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만져 버렸다. 만진 김에 괘씸죄로 그녀의 볼을 잡아당겼다. 최대한 힘껏.

“아야야야야……. 자기야 왜 그래. 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녀의 말투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분명 진지할 때는 진지한 것 같은데. 한번 능글거리기 시작하면 녹아내린 버터처럼 느끼해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이제 놔줘.”

“흐음……. 그래. 우리 자기가 원한다는데 어쩔 수 없지.”

……꼭 끝까지 남 속을 긁어요.

식사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맛있었다. 국수를 먹었는데 진한 국물맛과 탱글탱글한 면의 조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 수준의 음식점이 널렸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식사하면서 말다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 점은 꽤나 의외였는데 소니아나 노엘이 엘리사 속을 긁어내는 꼴을 몇 번이나 보았기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오간 대화는 평범한 대화들이었다. 이 음식 맛있다, 저번에 누가 무슨 짓을 했다더라, 어제 아본에서 아는 사람 봤었다. 같은 평범한 대화였다. 식사하면서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으니 음식이 더 잘 넘어가는 것 같았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작은 카페에 왔다. 원래라면 왕궁으로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카페로 발걸음을 돌렸다.

“엘리사. 아까 다리아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아는 사람이야?”

아 표정 썩었다.

솔직히 그녀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회귀자인데 최소한 얼굴은 알겠지. 내가 궁금한 점은 엘리사의 반응이었는데, 질문을 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정말 많이 싫어하는구나.

“될 수 있으면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특히 아가씨에게는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자입니다.”

“그래 보이긴 하더라. 한번 봤는데 불쾌한 느낌이었거든.”

“그래, 친구야. 걔는 천상 정치인이라 얘기해봤자 재밌지 않아. 왕족인 주제에 말하는 건 50년 묵은 지렁이 같다니까.”

뭔가 뒷말을 하는 모양새였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이건 뒷담이라기보다는 소감을 말하는 거니까. 아마.

그런데 왕족이라니? 다리아가 왕족이라는 건가. 나는 의문을 품고 물어보았다.

“왕족?”

“그 새끼 황녀거든. 1 황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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