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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12화 (112/120)

〈 112화 〉 다리아

* * *

끼익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문을 열고 복도를 바라보았다. 혹시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어?”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전에는 복도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소니아를 쳐다보았다. 이건 무조건 그녀와 관계된 일이었다.

“소니아?”

“...........”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니 머리가 어지러워 지는 것 같았다.

“친구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소니아는 그냥 설득했을 뿐이거든.”

“설득?”

“그래 설득. 다른 회귀자들에게 ‘너희들도 굳이 마주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라고 말해서 회귀자들은 지금 다른 곳으로 가 있어.”

소니아의 설득…… 엘리사가 설득을 하는 것 보다는 말이 되나?

“노엘 말이 맞아?”

“어….”

소니아에게 다시 물어보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엘이 이렇게까지 말하고 소니아가 대답한 걸 보니 사실이겠지.

“미안 의심해서…….”

그런 줄도 모르고 소니아를 의심하다니.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렇게 나를 소중히 대해주는 이를 믿지 못할 줄이야.

“........”

“그래, 친구야. 우리 소니아가 널 얼마나 생각했는데. 함부로 의심하면 안 되지.”

“으으…….”

“소니아는 누구처럼 주먹만 앞서는 사람이 아?”

“시발아, 제발 좀 닥쳐.”

빡—!

소니아는 노엘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것도 아주 세게. 등짝 세례에도 끄떡없던 노엘도 아팠는지 얼굴을 찡그리고 소니아를 쳐다보았다.

소니아의 얼굴은 살짝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노엘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 손을 잡고 복도로 나아갔다.

그 와중에도 내 손을 꽉 잡지않고 힘을 조절했다는게 나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성큼성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을 쫓아 가기 위해 나는 등산을 한듯 허벅지 근육을 움직였다.

“하이고~ 진짜 죽겠네…..”

뒤에서 노엘의 푸념이 들려왔지만, 소니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걸을 뿐이었다. 옆에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 조금 더 빨간색을 띠고 있었다.

노엘이 너무 신경을 긁은 건가.

내가 패닉에 빠져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복도는 넓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소형차 정도면 이곳에서 레이스를 벌여도 상관없는 정도의 크기였다.

이 정도 크기의 복도에 우리 말고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살짝 기분이 좋았다. 이 공간을 전부 전세를 낸 것 같달까. 캠핑장에 나 말고 아무도 없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겠지.

중간중간 방 대신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부분이 있기도 했었다. 이러니까 다들 복도에 있었지. 쓸데없이 복도를 잘 만들고 난리야.

복도를 지나서 우리는 작은 안뜰에 도착했다. 올 때는 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나무가 햇빛을 막아주는 우산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뜰은 그 모양에 맞춰 출입구가 네 곳이었다.

벤치는 모서리 쪽에 ㄱ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한번 쓱 둘러보고 말 곳이었다. 하지만 벤치에 앉아있는 이가 내가 알던 이와 너무 닮았기에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 자스민!”

의자에 앉아있던 것은 다름 아닌 루시였다. 그녀는 혼이 나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자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바로 내게 다가왔다.

“.....애미.”

내 옆에서 소니아의 자그마한 욕설이 들려왔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실시간으로 표정이 수라의 표정처럼 썩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싫은 건가.

루시와 얘기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면 그리 사이가 나빠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냥 술주정뱅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루시. 일은 다 끝났어?”

루시는 언니에게 가봐야 한다고 말을 한 후 사라졌었다.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아서 왕궁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이 피곤으로 얼룩져 있었다. 누가 보면 이틀 밤을 샌 것 같이 눈에는 다크서클이 배어있었고,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 그래?”

아쉬운 일이었다. 내 옆에 있는 누구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지만.

“소니아하고 노엘도 오랜만이네.”

루시는 살짝 불안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노엘과 소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에 화답했다. 단순히 고개만 끄덕인 것이 아니라 눈빛으로 그녀에게 무언가 신호를 쏘아 보낸 것 같았다.

“........아마 아직까지는 괜찮을걸?”

그녀의 대답에 소니아와 노엘의 어깨가 살짝 내려간 것 같았다.

의미심장한 대화가 끝나고 루시와의 저녁식사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왕궁 바깥을 나가지 못한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에 봐.”

“그래 너도 저녁 잘 먹고 오고.”

“어머. 이게 누구야.”

높고 상냥한 목소리. 한마디를 들었을 뿐이지만,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명확한 기쁨의 감정. 그러나 감정의 끝은 살짝 녹아내린 것처럼 무너져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다리아.”

엘리사보다는 짙은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는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한번 마주 보고 알았다. 이 사람은 정치인이었다. 표정을 숨길 줄 알았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었다. 감정이 아닌 이성의 숭배자였다.

곧은 눈썹. 기다란 눈매. 보라색의 눈동자. 오똑한 코와 차가운 턱선은 그녀를 차가운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어울리지 않은 미소를 띠고 있어서 더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니아는 내 앞으로 나와 그녀를 대면했다. 노엘은 한숨을 쉬며 나를 뒤쪽으로 오게 했다.

가장 큰 반응을 보인 사람은 루시였다. 루시는 매를 맞기 직전의 아이처럼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몸을 떨면서도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점점 뒤로 가는 발걸음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안녕. 소니아 오랜만이네?”

반갑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다리아는 소니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말로 오래간만에 아는 친구를 만난 사람의 표정이라고 생각될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나 같은 사회 부적응자의 눈에는 역겨울 뿐이었지만. 이 공간에 그녀의 가면을 진심으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꿋꿋이 연극을 계속해 나갔다.

“노엘도 오랜만이고……”

그녀의 눈길은 노엘을 지나 나에게 향했다. 끈덕지고 불쾌한 눈빛. 표정까지는 어찌저찌 숨긴 모양이지만 빌어먹을 불쾌한 눈빛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증오인가 혐오인가, 아니면 그거 집착일 뿐인가. 이런 상대는 오랜만이었기에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그녀의 눈빛을 마주치려다 루시의 경고가 생각나서 바로 고개를 내렸다.

“안녕? 네가 자스민이구나.”

내 얼굴을 모를 리가 없으면서도 처음 봤다는 듯이 인사를 하는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만인가, 아니면 정말로 나와는 처음 만났기 때문일까.

내가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악수?

순간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조금의 움직임만으로도 나는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저 인사일 뿐이니까. 나는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소니아.”

“만지지 마라.”

소니아는 다리아의 손을 쳐냈다. 신경질적으로 벌인 일 같았지만, 후회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동의했다.

소니아는 짧게 대답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빨리 다리아와 헤어지고 싶은 것 같았다. 그 마음은 나도 격하게 찬성하는 바였다.

“허.”

다리아는 어이없다는 탄식을 내뱉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쿨하게 넘어가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아까의 탄식으로 그녀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싫어도 회의에서는 마주해야 할 테니까.”

그녀는 저주를 외우듯이 소니아에게 말을 쏟아부었다. 소니아는 그녀의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회의…….

그러고 보니 회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별로 득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리아를 마주치고 난 뒤에 이 생각은 굳혀졌다.

“루시?”

우리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루시만큼은 우리를 쳐다볼 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루시는 전부터 계속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절벽의 끝에 겨우 서 있는듯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동생은 나랑 있어야지. 너마저 저쪽에 붙으면 이 언니가 너무 슬프잖니.”

다리아는 루시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우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루시의 목을 졸라오는 뱀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루시를 대하는 태도까지.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시는 체념한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보자. 자스민.”

루시는 그렇게 말하고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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