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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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을 따라 도착한 곳은 엘리시아의 왕궁이었다.
테오도르의 왕궁과는 달리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중앙의 둥근 돔과 밝은 갈색의 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되게 했다.
놀라운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왕궁의 규모였다. 테오도르의 왕궁은 작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크다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의 왕궁은 웬만한 도시 하나의 크기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게 또 하나의 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의 왕궁인가.
“노엘. 여기에는 왜 가는 거야?”
“나랑 소니아는 여기에서 머물고 있거든.”
궁금증에 물어보았던 대답에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하긴 주인공과 주인공의 동료 정도 되면 이 정도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한 거겠지.
문제는 내 심장이 하도 떨려서 미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게 맞나? 자스민은 브레토니아의 귀족 아닌가? 문제는 없겠지?
왕궁의 입구에 서자 별의별 걱정이 들었다. 그중 대부분이 합당한 걱정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거…. 내가 가도 괜찮은 거야?”
“안될 건 뭐야?”
내가 한참을 고민하고 내뱉은 질문에 그녀는 너무나 쉽게 대답했다. 그래, 노엘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지.
그녀의 여유로움을 보다 보면 내 긴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이 노엘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 부분이 아닐까.
그것이 그녀가 의도했든 아니든 말이다.
왕궁의 정문으로 들어서자 끝이 잘 보이지도 않는 높은 복도가 나를 맞이했다. 고개를 한참을 들어야 천장이 보일 정도로 복도의 높이가 상당했다.
이 정도의 기술력이라니……. 볼 때마다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것 또한 작가의 설정에 지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느낀 이 세계는 한 작가의 창작물이라는 족쇄에 가두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러니 이 광경 또한 작가의 설정이 아니라 엘리시아 인들의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냉소적인 태도는 삶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동안의 인생을 살며 배운 교훈 중 하나였다. 냉소적인 태도보다는 뭐라도 배우려는 태도가 인생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나는 삶에 대부분의 냉소로 뒤덮여서 살던 사람이기에 배우려는 태도가 아직 어색한 느낌이 있기는 했다.
“친구야. 뭘 그렇게 봐.”
노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팔에 감겨있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 광경이 별것도 아닌 것처럼 걸음을 재촉했다. 확실히 그녀에게는 이 광경이 너무나 많이 본 광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노엘의 대단함이 느껴졌다. 내가 읽지 못한 나머지 페이지에 이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괜시리 마음이 울적해 지는 것 같았다.
….나 너무 감성적인 사람이 된게 아닐까.
노엘은 복잡한 왕궁을 자기 집 안방인 것처럼 움직였다.
상당히 많은 계단을 올라왔다. 꽤나 많은 통로를 지나치면서 나는 노엘의 인기를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곳의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이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건네 왔고 그녀 또한 진심을 담아 대답해 주었다.
이윽고 우리는 고급스러운 복도에 도착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최근에 인테리어를 새로 한 곳 같았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이번에는 주변에 있는 이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째서인지 노엘을 쳐다보기보다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엄청난 적개심과 분노를 담은 채로. 노엘의 표정도 살짝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반응에 나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회귀자.
엘리사에게 조심하라고 들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데 가 있지 왜 복도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
나는 그들의 시선에 당황에 바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노를 받는 것은 익숙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이들이 보이는 혐오의 감정은 지금껏 내가 받아왔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의 수위였다.
그들 중에는 검집에 있는 칼의 칼자루를 꽉 잡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그가 얼마나 자스민을 혐오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혐오하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벨리타 자스민이었다. ‘나’는 벨리타 자스민이 아니니까.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내 몸은 계속해서 떨려오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들의 표정에는 분노가 더해져 갔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그래, 벨리타 자스민의 몸에 들어와 버렸지.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죽여야 할 벌레 취급이 내가 자스민의 몸에 들어온 대가인가. 처음으로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다. 진짜.
아카데미의 교수인 마르셀린이 떠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가 나에게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진정한 교수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실없는 생각으로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비워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뒤엉켰다.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하고 싶었다. 누군가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이 고개가 내려갔다.
“고개 숙이지 말고.”
노엘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녀의 왼팔을 옷깃을 잡았다. 뭐라도 잡아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친구야. 앞을 봐야지.”
그녀는 상냥했다. 내 목을 감던 팔은 살짝 내려와 내 어깨를 감쌌다.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는 녹아버릴 듯 따뜻했다.
“여기야.”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복도의 끝에 있었던 방이었다. 다른 방들의 간격보다 몇 배는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뒤에서 노려보는 시선에 내 등이 뚫릴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기 싫어 서둘러 문을 열었다.
창문은 점점 붉어지는 하늘을 비춰 주고 있었다. 파란색과 붉은색 사이의 색깔을 온몸에 받으며 책을 읽고 있는 이가 있었다.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었기에 내가 문을 열자마자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깜짝 놀랐다는 듯한 눈빛이 나는 너무나 오랜만에 보았다. 나는 반가움에 웃음을 지었다.
“안녕.”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 또한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 몸을 이곳저곳 살폈다. 심각한 얼굴을 한 채로 말이다. 한참을 수색한 뒤에야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생했네.”
그녀, 소니아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쓰다듬고 있는 그녀의 손을 매만졌다.
좋았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아까 가슴 아팠던 일이 치유되는 것 같았다.
소니아는 한마디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걱정이 너무나 좋았다.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지다니. 나란 사람도 정상은 아닌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거의 우울증이지.
그녀의 방은 웬만한 가정집보다 큰 규모를 자랑했다. 이래서 복도의 끝에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귀족의 방 그 자체라고 해야 할까. 책상과 식탁 하나하나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소니아는 나를 침대에 앉혔다. 노엘과 소니아는 의자를 끌고 와 내 앞에 앉았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나는 무릎을 끌어모으고 턱을 그 위에 댔다.
“.....그래서 달고 다니는 거는 어디다 때놓고 온 거야?”
“으음……. 일단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고는 하는데….”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냐. 나도 말하는 게 편할 것 같아….”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단순히 엘리사와 있었던 일 뿐만 아니라 마리안의 부탁을 받고 카나리아 제도에 갔었던 일까지 전부 말이다.
소니아와 노엘은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경청해 주었다.
마리안 이야기가 나올 때 노엘의 표정이 좋지 않았고, 팔데우스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때는 소니아의 분노가 느껴졌었다.
나 스스로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별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잘 들어주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럭저럭 잘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내 얘기가 다 끝날 때까지 소니아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말하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진짜 강아지 쓰다듬는 것 같이 나를 쓰다듬는 소니아 때문에 목소리가 떨릴 때도 있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기에 제지하지는 않았다.
“힘들었겠네.”
“어……”
나는 소니아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내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고개가 스스로 내려갔다.
여행이나 가려고 했었다. 너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기에 숨을 좀 돌리고 싶었다. 심지어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와 있었다.
힘들다. 힘들었다.
“후…….”
살짝 울음이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벌써 질질 싸기에는 쪽팔린 감이 있었다. 울더라도 이런 거로는 울지 말아야지.
“소니아, 노엘.”
내 부름에 그녀들은 내 눈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눈 이었다. 내가 이런 눈빛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