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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09화 (109/120)

〈 109화 〉 아이스크림

* * *

“거기 앉아있는 아가씨.”

그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몸이 우락부락한 남자들이었는데 결코 나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다.

“....저요?”

“그래. 너.”

……너무 타이밍이 공교롭지 않은가.

엘리사가 나에게서 멀어지자마자 이런 양아치들이 나한테 다가온다고?

내가 머릿속에서 여러 가설들을 세우고 있을 때 그들은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잠깐 동행해 줘야겠는데.”

그들은 동행이라고 말해지만, 사실상 스스로 납치되라는 것 과 다름이 없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나요…?”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란 것만큼은 알았으면 좋겠군.”

나는 고개를 살짝씩 돌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이를 찾고 있었다. 마법진이 없는 나는 일반인과 다름이 없었다.

내 앞에선 이들의 몸을 보아하니 별것 아닌 반항은 금방 제압될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본의 경비병과 눈이 마주쳤다.

“.........”

하지만 경비병은 누가 봐도 수상한 광경임에도 모른척하며 고개를 틀었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양아치는 나를 비웃었다.

“꼬맹아. 지금 여기에 너를 구해줄 사람이 있어 보이냐?”

그의 비웃음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괜히 말을 내뱉었다가 그들을 자극할지도 있어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군. 이만 순순히 따라와라.”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용 마법진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다. 그랬으면 도망 정도는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들이 내 코앞으로 다가오자 눈을 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음속 깊이 새겨지는 무력감은 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지 다시금 알게 해 주었다.

나는 한숨을 뱉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비했다. 모르고 맞는 것 보다 알고 맞는 게 낮겠지.

“자기야, 여기서 뭐 해?”

“어….?”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내 옆에서 들렸다. 꽤나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지만,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노엘…”

“안녕 자기야.”

갑자기 나타난 그녀에 내 입가는 저절로 호선을 그었다.

본능적으로 벤치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그들 중 한 명에 내 어깨를 잡고 다시 벤치에 앉혔다.

“읏……”

커다란 바위가 누르는 듯한 압박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꽉 옥죄는 악력이 고통스러웠다.

“후…….”

노엘은 안경을 벗고 안경 닦이를 꺼내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 어딘가 신경질 것인 움직임은 그녀의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음을 나타냈다.

“넌 뭐야? 꺼져 계집년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노엘의 안경을 쳐서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노엘의 입가를 보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자기 안경이 부서졌는데 웃고 있는 거지?

노엘은 안경을 떨어트린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평온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나에게는 매우 무서웠다.

파지직!

그의 어깨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어깨에서 출발한 번개는 그의 온몸을 뒤덮었고, 눈 깜빡할 시간에 그는 땅바닥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마법 중에 가장 조용하면서 작은 마법이었다. 소니아의 말도 안 되는 화력과는 달리 영리하게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달려들기 전에 노엘의 손바닥이 그들에게 닿는 것이 먼저였다.

파지지직!

한 명에서 시작한 번개가 그들 모두를 뒤덮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쓰러졌다.

노엘은 그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

“아……. 나는 괜찮아.”

나는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수많은 이들을 손쉽게 해치운 그녀가 오늘따라 멋져 보였다.

나도 저렇게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좀 더 쓸모있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자기야. 자기 옆에 다니던 강아지는 어디 갔어?”

강아지라. 아마 엘리사를 말하는 거겠지. 원래라면은 엘리사는 강아지가 아니라고 항변했겠지만, 지금 노엘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구해준 것만으로도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어디 다녀올 곳이 있다고 하던데….”

“그 녀석이?”

확실히 노엘도 의외였던 것 같았다. 나 또한 엘리사가 다녀올 곳이 있다고 사라질 줄은 몰랐으니까….

“뭐, 중요한 일이 있나 보지.”

노엘은 그렇게 말하며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슬며시 옆을 쳐다보니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자기야. 아본은 처음이지?”

“그렇지?”

“그럼 내가 잘 안내해줄게.”

그녀는 내 목에 팔을 감은 채로 시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엘리사가 곧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지만, 노엘의 팔을 풀 힘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순순히 끌려갔다.

노엘 얘는 연금술사라는데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자기야.”

“어?”

속으로 툴툴대고 있을 때 노엘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애완견은 냄새로 너를 찾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니 엘리사는 진짜 개가 아닌데…….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따져봤자 능구렁이같이 넘어가겠지.

노엘이 다른 이와 다른 점이 바로 이 능글거림이었다. 속에 버터라도 발라놓은 건지 항상 여유가 있는 느낌이었다.

뭐만 하면 돌진하는 엘리사와는 반대의 위치에 있다고나 할까….

“저기 근데….”

“왜, 자기야.”

“왜 자기라고 불러?”

노엘은 말끝에 친구야 친구야 했었는데…. 어째서인지 오늘 나를 구해줄 때부터 자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딱히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냥 궁금증에 물어보았다.

“어……. 개연성?”

“뭔 소리야….”

노엘의 말을 들어보았지만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개연성이라는 건 또 뭔 대답일까. 어차피 대충 대답한 거겠지. 나는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아본은 데우스 대륙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일 년 내내 큰 기온변화가 없는 곳이었다. 일 년 내내 뜨겁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따뜻한 날씨를 유지했다.

거리는 내가 보았던 그 어느 곳보다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북적거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아마 노엘이 나를 꽉 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인파 속에 흘러가 버렸을 수도 있었다.

시장의 풍경도 매우 달랐다. 테오도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과일과 식물들이 넘쳐났다.

주변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듯했다. 안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모습은 내가 역사책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한참을 구경하고 나서 나와 노엘은 나름 한적한 거리로 빠져나왔다. 내 오른손에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쥐어져 있었다. 돈을 주고 사 먹고 싶어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참았었는데 노엘이 자기 돈으로 사 주었다.

“저기에 앉을까?”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안 그래도 다리가 후들거려 풀리기 직전이었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하고 싶었지만, 아이스크림에 정신이 팔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친구야, 어때?”

다시 친구라고 부르는 노엘의 말에 익숙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물어보는 것은 단순히 이 도시의 감상이 아닐 거였다. 그렇지 않다면 노엘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질문을 던지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그냥 도시의 감상을 대답하며 질문에 회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질문의 의도를 알면서 무시하기에는 오늘 내가 그녀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고마움을 표하고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어렵네.”

나는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갖다 대었다. 그토록 달콤했던 아이스크림이 어째서인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래 보이네. 항상 주변에 얼쩡거리던 강아지도 안 보이잖아.”

그러고 보니 엘리사가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서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갑자기 그녀에 관한 생각이 들자마자 걱정이 되었다.

엘리사가 그럴 리는 없지만, 무언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친구야.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걸.”

그때 노엘은 그 말을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머리를 내 쪽으로 가까이 내고 말했다. 그녀의 입이 바로 내 왼쪽 귀에 맞닿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간지러움에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지금 건물 위에서 널 지켜보고 있어.”

“....어?”

그녀의 말에 바로 위를 쳐다보려고 했지만 노엘은 곧바로 제지했다.

“괜히 쳐다보면 바로 다른 곳으로 가 버릴걸.”

노엘의 말을 듣고 나는 위를 쳐다보는 것을 멈췄다. 대신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뭘 그렇게 봐?”

“그, 그냥…….”

나는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역시 회귀자들은 뭔가 다른 게 있는 건가. 아니, 그냥 기량 차이인 걸까.

“둘 사이에 뭔가 있기는 있었구나.”

노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큰 키 때문에 그녀는 기다란 탑 같다고 생각했다.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내 입으로 나와 엘리사 사이에 꺼림직한 일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오기였고 스스로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친구야.”

“엑.”

노엘은 내 허리를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럽게 들려졌기에 이상한 소리가 입에서 나와버리고 말았다.

“일단 소니아나 만나러 가자. 그녀석 안 그런척 해도 널 보고싶어 하고 있거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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