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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07화 (107/120)

〈 107화 〉 감정

* * *

마차는 작은 마을 근처에 멈춰 있는 상태였다. 마차에 한동안 먹을 식료품과 생필품 등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루시와 엘리사는 번갈아 마을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러 갔다 왔다. 아까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엘리사가 있었고, 지금은 루시가 내 앞에 있었다.

“.......그래서.”

“......어?”

나는 다리를 떨고 있는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무언가에 쫓기듯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처음에는 굳이 캐묻지 않으려 했다. 내가 잠든 사이 엘리사와 나눈 이야기 때문이겠지 하며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왜 그렇게 다리를 떨어.”

아까부터 계속되는 다리 뒤꿈치가 나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그만 참지 못하고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루시는 내 말을 듣고 떨던 다리를 멈췄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는 다리의 움직임처럼 쉽게 멈출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봐도 돼?”

이 주변에 술이 있다면 그녀에게 먹이고 싶어질 만큼 그녀는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나까지 저 불안에 잠식되어버릴 것 같았다.

나 또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기에 더더욱.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마차에 한 사람이 더 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무게감이 담긴 한숨이었다. 먼저 몇 마디를 꺼내 보려 했지만, 그녀의 한숨을 들으니 먼저 말을 꺼내기보다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엘리사한테 들었던 것 같은데. 맞지?”

“바로 아본까지 간다는 거 말이지………. 어, 아까 일어났을 때 엘리사가 말해주더라.”

남에게 보여주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순간이었지만.

눈을 떴을 때 엘리사는 내게 죄송스럽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루시가 돌아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진한 감정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는 모습은 잠에서 방금 깬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 파괴적이었다. (귀엽다는 의미로.)

덜컹거리던 마차는 멈춰있었고, 루시는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이었다. 엘리사에게 물어보니 근처 마을에서 식료품을 구하러 갔다고 말했다. 그녀 또한 마을로 내려가야 했지만, 내가 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엘리사는 혼자 머릿속에서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말해주었다.

“아가씨…… 문제가 생겨 바로 아본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래?”

심각하게 무게를 잡은 것 치고는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었는데 맥이 바로 풀어져 버리고 말 정도였다.

다른 곳을 가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쉽지만, 원래도 한 곳 정도만 들리고 수도로 갈 계획이었으니까. 바로 아본으로 가야 한다고 해도 엄청 아쉽지는 않았다.

애당초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엘리시아 왕국의 수도 아본이었으니까. 아본만 갈 수 있으면 크게 상관없었다.

“그게 끝이야?”

“........그게.”

엘리사가 겨우 저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이것뿐이라면 아직까지 고개를 숙일 리가 없으니까.

“......아본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이럴 때마다 내가 엘리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엘리사의 얼굴만 봐도 감정은 물론이고 대충은 그녀가 할 말이나 행동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엘리사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자스민의 메이드라는것을 제외하고는 애매모호 하거나 추측일 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빛나는 이유는 뭔지, 망국의 공주는 무슨 소리인지, 내가 눈을 뜰 때 보았던 검은 기운은 무엇인지.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는 것이 더 적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가씨…?”

엘리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상념에 빠져있었나.

“아, 아 그…. 아본에서 해야 하는 일이 뭐야?”

나는 미안함에 얼른 상념을 지워버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아본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엘리사만의 일은 아닐 게 분명했다. 이렇게 끙끙댈 정도면 나도 무언가 해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아본에서”

“으음…….”

엿된거 같은데.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의 감상이었다. 회귀자 들끼리의 회의가 있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그 회의가 지금 아본에서 열린다는 건 머리가 혼미해지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회귀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다행인 점이라면 소니아와 노엘이 아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주인공이 있으면 대놓고 나를 괴롭힐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지금까지 소니아와 있으며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섰기에 이런 판단이 가능했다.

엘리사도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나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이 소식들을 알려주는 거겠지.

“엘리사.”

“.....네. 아가씨.”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

“죄송해서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상황이 심각해지기는 했지만 그게 엘리사 탓 같지는 않은데……

“지금까지 아가씨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는데, 이런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언제나 죄송할 따름입니다.”

“엘리사.”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딱딱한 그녀의 손은 어째서인지 내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딱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지금 내 얼굴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녀가 지금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녀의 단단한 손을 꽉 쥐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매달리듯 간절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있어서 살아있는 거야.”

만약 엘리사가 그날 내가 봤었던 것 처럼 크게 다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면………

싫다. 내 주변 사람이 죽는 건 싫었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다른 이들이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러니까.

절대로.

“나는 네가 그렇게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그런 것보다 네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

“나보다는 너를 신경 쓰는 게 맞잖아. 칼에 찔린 너를 봤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엉망진창이다. 원래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말을 한번 내뱉으니 구멍 뚫린 댐처럼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나왔다.

맥락도 없이 터져 나온 수도꼭지에 나는 입을 닫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분명 이런 이야기를 할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쪽팔려.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은 자꾸만 내 고개를 숙이게 했다. 어째서인지 엘리사의 얼굴을 쳐다볼수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의 팔에 머리를 묻고 아래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루시가 돌아올 때까지 나와 엘리사는 그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그녀 또한 무언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내게 닿지는 않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지만, 그때 생각만 해도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 잘 알고 있는 거 같네.”

루시는 내 표정에서 무언가 읽었던 건지 굳이 무언가를 캐묻지 않았다. 고마웠다.

그녀는 술만 먹지 않으면 세심하고 상냥한 좋은 친구였다. 술만 먹지 않으면.

“아본에는 내 언니가 있어.”

“언니?”

루시에게 언니가 있었구나.

지금까지 얘기하면서 한 번도 듣지 못했었기에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떤 분이야?”

루시의 언니라는 사람에게 나는 흥미가 일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루시처럼 술꾼은 아니겠지?

다른 것보다 루시가 저렇게 질색하는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가 일었다. 루시가 지금까지 질색하는 인물은 그녀의 언니가 처음이었기에 더더욱.

“그게…… 뭐라 해야 할까…….”

루시는 적합한 단어를 찾는 데에 꽤나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루시가 머리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았지. 그녀가 머리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머리를 쓰는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하여튼 그런 느낌이다.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도…….”

얼굴에 티가 났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 언니는…. 잔혹하고 치졸한 사람이야.”

잔혹에 이어 치졸이라. 어떤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 것 같았다.

“어떤 부분이 잔혹하다는 거야?”

“모든 부분이. 언니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이야.”

루시는 자신의 언니를 말하는 것 같지 않게 매우 냉정하게 말했다. 언니라는 말이 없었으면 생판 남에게 하는 말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혐오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자기 자매에 대해 말할 때 할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아, 맞다. 자스민.”

“ㅇ, 어?”

루시는 내 어깨를 잡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한숨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만약 언니하고 만났을 때, 눈을 마주치려고 하면 절대로 마주치지 마.”

“? 그래.”

내 말을 듣고도 루시는 어딘가 찜찜한지 자신의 두 손으로 머리를 긁어댔다.

“아아…… 나는 죽고 말 거야……”

혼자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루시의 언니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럴까. 나는 의문을 머릿속에 담아두며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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