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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06화 (106/120)

〈 106화 〉 편지

* * *

눈을 감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스민은 꿈속으로 가라앉았다.

어젯밤 ‘그것’이 했던 행동의 영향으로 자스민의 몸은 피곤함에 절여져 있었다. 자스민은 티를 내려 하지 않았지만, 술에 절어있는 루시의 눈에도 그 피곤함이 보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엘리사는 자스민의 이런 배려를 걱정했다. 가장 힘든 사람이 위태롭게 내놓는 호의와 배려는 그녀의 걱정을 불러 일으킬 뿐이었다.

엘리사의 주위를 맴돌던 기운, 사라져 있는 팔데우스, 그녀의 몸속에 있던 ‘그것’까지 물어볼 것들은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자스민은 엘리사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들에서 고개를 돌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자스민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루시는 긴장한 듯이 엘리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녀의 목과 쇄골 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

“......왜.”

루시는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압박에 이기지 못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엘리사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내뱉을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인정하기는 싫었기에 ‘왜’라는 의미 없는 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몰라서 물어?”

엘리사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그녀의 무릎을 베개 삼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시는 자스민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를 표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귀자들끼리 회의가 있는 건 알고 있지?”

“그래. 모를 수가 없지.”

엘리사는 그 회의라는 것에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녀가 모시고 있는 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그녀의 호전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 또한 정기적인 회의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회귀자들이 싹 사라지고 나타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안 가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한데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이미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는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회귀자들이 모이는 것은 단순히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야.

…….세상을 위해 앞으로 일어날, 그리고 일으킬 일들을 의논하기 위해서이기도 해.”

“허.”

엘리사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지들 ㅈ대로 만들겠다는 말을 길게도 설명한다.”

“............”

루시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그녀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회귀자끼리의 정기적인 회의가 만들어진 것은 안전을 위해서였다.

세계의 안정.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기 전, 회귀라는 특수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곳에 있었던 그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현상.

최악을 피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다름 아닌 회귀자들의 수였다.

회귀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최전방에서 싸우던 지휘관에서부터 뒤에서 보조하던 간호사까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 회귀자들로 부대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회귀를 한 시점부터 많은 이들이 생각했다.

‘위험하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이는 다름 아닌 소니아였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망이 두터운 회귀자들과 함께 다른 회귀자를 찾아 나섰다.

회귀의 조건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던 그녀였기에 다른 회귀자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그들의 처분이었다.

전부 죽이면 편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회귀자들은 대부분 중요한 인물들이었기에 함부로 죽이면 후 폭풍이 너무 거세질게 분명했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그때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에 뭉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득만을 위하는 이들이 나타날게 뻔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회귀자들 모두 모이게 했다. 거절한 이들은 강제로 납치해서까지 강제로 모든 회귀자들을 한곳에 모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회귀자들에게 제안했다.

회귀자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이 세계가 무너지게 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회귀자들에게 제약을 부여할 생각이었다.

‘너네도 사지 멀쩡히 살아가고 싶을 거 아니야.’

……사실 제안이라기보다는 협박에 더 가까웠기에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거스르지 못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회귀자들은 소니아가 어떠한 일들을 해 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도 했다.

그 이후 회귀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세계를 위해, 앞으로 찾아올 재앙을 막기 위해 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그녀가 만든 회의는 회귀자들을 가두는 족쇄이자 울타리가 되었다. 소니아는 회의가 자리를 잡자 더 이상 회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이만큼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었기에, 아무도 그녀의 결정을 나무라지 않았다.

회의에서는 기본적으로 미리 일어날 불행을 싹을 제거하는 일과 앞으로 생겨날 이득을 공정하게 조절한다.

다만 이득과 손해를 결정짓는 주체가 회귀자라는 점에서 완벽히 청렴하게 세상을 위하는 것은 아닌 셈이었다.

“이번에 회의 일정이 잡혔어.”

루시는 엘리사의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엘리시아 왕국의 수도 아본에서. 일주일도 남지 않았어.”

“...........”

루시의 말에 엘리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최악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만약 아본에서 자스민에게 적대적인 회귀자들과 마주치게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게 분명했다.

안 들키게 조심히 다닌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회의가 그곳에서 열린다면 도시의 입구에서부터 구석구석 회귀자들이 쫙 깔려 있을 게 분명했다.

“아직 회의가 열리기까지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거로 아는데.”

“맞아. 원래대로라면 네 말대로 몇 달 뒤에나 열려야 하지만, 긴급한 안건이 있다고 해서 앞당겨져 버렸어.”

루시또한 회의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 긴급한 안건이라는 게 뭔데.”

“내가 알기로는 저기 누워있는 자스민과 연관된 내용이라고 알고 있어.”

엘리사는 자기 무릎에서 잠을 자고있는 자스민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불편한 얼굴로 꿈속에 빠져 있었다.

“정확히는 자스민을 모시는 광신도들 때문이라는데.”

엘리사의 머릿속에 하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타이렌.

‘그 빌어먹을 늙은이…….’

물증은 없고 심증뿐이었지만, 그녀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 특유의 날카로운 감은 거의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루시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직 몰라.”

엘리사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대꾸했다.

“하여튼……. 지금 아본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야. 사실 지금 엘리시아에 있는 것도 굉장히 위험한 짓인 거 알지?”

“............”

“자스민이 고집을 부리는 애도 아닌데 네가 알아서 잘 말해줘.”

엘리사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루시의 말이 맞았다. 지금 아본으로 가는 것은 위험한 짓이었다.

“아니. 차라리 지금 바로 아본으로 간다.”

아본올 가는 것은 위험한 짓이 맞았다. 하지만 이미 엘리시아 왕국 안에 있는 이상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괜히 피해 가겠다고 하다가 자스민을 혐오하는 이를 만나는 게 더 위험했다.

“괜히 다른 곳으로 피해 가는 것보다 서둘러 아본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걸.”

“미쳤어? 지금 아본에는”

“그래. 빌어먹을 네 언니가 있지.”

엘리사의 말에 루시는 입을 닫았다. 그녀는 루시의 반응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원래라면 아본에 들어서는 순간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겠지만 지금 아본에는 네 언니만 있는 게 아니거든.”

엘리사는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지는 어딘가에 긁힌 듯이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오는 필체는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 그게 뭐야.”

“편지.”

엘리사는 루시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편지에는 몇 문장 쓰여 있지 않았기에 어지러운 필체에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광견 년아 상처 있으면 죽인다.

“???????”

루시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물음표가 생겼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엘리사를 바라보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누가 쓴 것 같냐?”

“어…………”

귀찮음이 종이를 뚫고 나오는듯한 필체, 여기저기 찢어진 편지지, 엘리사를 광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소니아……?”

엘리사는 루시가 들고 있던 편지를 빼앗아 구겨버렸다. 그녀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편지였던 종이 뭉치를 던졌다.

“네 언니만큼 성질 더러운 년이 아본에 있거든.”

“하, 하지만……”

루시는 조심스럽게 자스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소니아가 자스민을 제대로 보호해줄까?”

“.............”

그 말에 엘리사는 살짝 불쾌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잡고 있는 마차의 창틀은 그녀의 손 모양으로 자국이 생겼다.

엘리사는 소니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무조건 앞장서서 자스민을 보호해 줄 것이다.

당연히 말이다.

“차라리 해주지 않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든 엘리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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