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제정신
* * *
“으어어어………….”
내 눈앞에는 술에 떡이 되어있는 루시가 보였다. 흙바닥에서 땅을 기어 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바다에 던져버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 그냥 놔두자.”
엘리사는 내게 달콤한 제안을 건넸다. 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는 내 여행의 가이드였다. 그녀에게 나를 위해서 싸우라고 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물론 이 사건은 내 문제가 아니라 마리안의 일이 걸려있었지만……….
지금은 나 자신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그녀의 얼굴에 물을 뿌려버릴 것 같았기에 참았다.
“헤헤에헹. 고생했겠네에….. ㅁ, 마실래??”
그녀는 땅바닥과 키스를 하고 있는 채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물론 술잔은 기울어져 술이 줄줄 새고 있었다.)
진짜 쓸모가 없구나…….
이 정도면 가이드 자격도 없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뭐 어떤가. 그녀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이미 그녀와 같이 술을 먹었을 때 접어두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땅바닥에 기어 다니던 그녀 대신(루시는 발길질로 저 멀리 차 버렸다.) 마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매력인 그녀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평소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그녀의 마음이 보였다.
표정에 변화가 없던 소니아와 엘리사 속에서 살아온 나다. 웬만한 이들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마리안의 감정은 기쁨과 후련함이었다.
그녀의 감정을 조합해 보면 그녀는 지금 너무나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시와는 다르게 술잔을 목구멍에 들이밀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지만,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에요.”
나는 목덜미를 긁으면서 웃어 보였다.
실제로 내가 한 것은 없었다. 엘리사의 몸에 칼이 꽂힌 것을 보고 정신을 잃은 뒤에 모든 상황이 해결되어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이 사건에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엘리사과 그, 그리고 아직 알 수 없는 ‘그것’ 뿐이었다.
“아닙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저희는 이런 축제도 즐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요?”
나는 그녀의 말이 나를 띄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반응하지 않았다. 허나, 그녀는 내 생각보다 자기 말에 진심이었던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저희는 이 땅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스민. 모두 당신이 우리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아, 아뇨. 저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한동안 기절해 있던 나로서는 마리안의 이런 평가가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겠는가. 그에게 개기다가 엘리사의 부상을 보고 멘탈이 나간 게 전부였다. 나는 이런 찬사를 들을 자격이 없었다.
나는 이런 시선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글쎄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를 끌어낼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저는…”
“아뇨.”
내가 그녀의 말에 끼어들려고 할 때 마리안은 내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그녀의 후련한 표정은 내가 그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은 당신이 있었기에 이루어 질 수 있었던 일입니다. 조금은 자신감을 가지셔도 됩니다.”
이상하다. 마리안이 내게 이렇게 호의적이었나.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내 머릿속에는 의문만 남았다.
이런 의심을 가진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내 옆에 있었던 엘리사는 마리안의 말에 역겹다는 듯이 반응했다.
“지랄하네. 시발련이.”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격하게 반응했지만 말이다.
“........어째서 나에게 이토록 적대감을 드러내는지 모르겠네.”
엘리사의 말에 마리안은 얼굴을 싱긋 웃어 보이며 되물었다.
마리안의 여유로운 태도는 엘리사의 화를 돋우는 추진제가 될 뿐이었다. 나는 엘리사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고 그녀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마리안에게 분노를 토해낼 때 나는 쭈그려 앉아 루시의 흐느적거리는 손을 가지고 놀았다.
술에 취한 루시의 팔은 연체동물 같았다. 그녀의 어디를 잡아 올리든 흐느적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내 따분함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했다.
“루시….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모오몰……….”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웅얼거렸다. 술에 취한 체 집에 오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녀를 연체동물에 비유했었는데 땅바닥에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비유가 아니라 그녀가 연체동물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뭘 몰라. 이 씨발련아. 그 씨발새끼 어디 갔어.”
“네가 처리한 거 아닌가? 나는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
“끝까지 입에서는 거짓말만 해대는 꼬라지는 여전하네.”
엘리사와 마리안의 사이에는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물론 나는 이야기의 맥락도 짚어내는 게 어려웠기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나의 관심은 오직 루시의 흐느적거리는 팔다리였다.
놀이기구를 즐기는 것처럼 그녀의 팔다리를 가지고 놀고 있을 때, 마리안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자스민씨.”
익숙해져야 하지만, 아직까지 익숙해지지 않는 이름. 다름 아닌 내 이름이었다.
마리안은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보아하니 괜스레 잘못한 것도 없지만, 눈이 내려앉았다.
뭐랄까 잘못을 뉘우치게 만드는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엘리사에게는 통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잘 통하는 것 같았다.
“네…….?”
“고생하십니다.”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이 말이다.
감사의 표현도, 사과도 아니었다. 고생하십니다. 라니, 이런 말은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공사판에서 한참은 구른 아저씨에게 할 법한 표현이 어째서 나에게 향하는 걸까.
그때의 나는 안타깝게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축제의 나날이 지나고 나는 다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원래 여행을 계획을 했을 때와는 다르게 틀어져 버렸다.
일단 카나리아 제도에 머무는 것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다. 내 계획대로라면 이쯤이면 엘리시아를 한 바퀴 돌았을 것이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불만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여행은 본래 변수 그 자체였다. 원래 여행하면 이런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갈 줄 알아야 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는 창문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식물을 보는 것은 지루한 마차 안에서의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어디 가는 거야?”
술에서 깨고 나서 목소리가 작아진 루시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오늘 아침 겨우 술에서 깨고 나서는 내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있었다.
술에 꼴으면 기억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취했을 때의 기억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나 엘리사의 말에 아무런 방향도 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말이다.
“시원한 계곡 있다고 해서 그곳만 갈려고.”
내 맞은편에 있는 루시를 향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한숨을 내뱉을만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서사가 내 허파를 움직였을 뿐이었다.
“아…… 그다음은…. 혹시 물어봐도 될까?”
내 얼굴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루시를 보니 괜스레 짜증이 났다. 술에 취했을 때는 내 몸을 잡아끌고 난리가 났으면서 지금은 나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차라리 반대였으면 5배는 편했을 것 같았다.
나는 엘리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앞으로의 여행 계획을 말해 주었다.
“잠깐 계곡에 들리고 수도에서 며칠 있을 것 같아. 엘리시아의 수도에 볼 게 많다고 하니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좀 오래 있으려고.”
원래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닐 계획이었지만, 계획이 틀어진 이상 나는 수도에서 뽕을 뽑기로 했다.
지친 심신을 계곡에서 치유하고 나서는 이 나라의 수도에서 신세를 질 예정이었다. 엘리시아의 수도에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고 들었다.
나는 자연경관뿐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수도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기로 했다.
“어, 어……….”
내 대답에 무언가 불만이라도 있는 것인지 루시는 얼굴을 긁었다.
그녀의 반응은…. 곤란함과 공포….?
갑자기 카나리아 제도로 갔을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반응이었다. 수도에 그녀가 싫어하는 게 있나?
“왜? 수도는 별로야?”
“아…….. 아니…. 그냥…. 사람이 너무 많아서 네가 힘들까봐….”
내가 힘들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힘들어 하는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 같았다.
“.....그래?”
나는 의문스러웠지만, 그녀에게 캐묻지 않았다. 나는 남을 압박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었다. 그런 재주는 내 옆에서 어깨를 빌려주고 있는 사람의 몫이었다.
나는 엘리사의 팔을 툭 치고 그녀의 무릎에 누웠다.
엘리사가 알아서 해 주겠지…….
나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눈을 감고 흘러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