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손
* * *
침묵이 찾아온 숲속에 소음을 일으키는 존재는 이제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끄으으윽….”
사지가 타 버린 그가 그 흔하지 않은 부류에 속했다.
그는 사지가 타 버렸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땅을 기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마리안이 산산조각 내었던 배가 있던 곳이었다.
사지를 포함해서 그의 몸 대부분은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타 버리고 말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고통만으로도 죽음을 선택할 정도였다. 허나, 그는 쉽게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았다.
“씹새끼 꼴에 살아보겠다고 기어 다니는 꼴 봐라.”
“하……”
가로막은 이는 다름 아닌 엘리사였다.
그가 계획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폭주하지도 않았고 자스민에게 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자스민.
그의 계획을 가로막고 무산시켰던 인물이었다.
벌써 그런 「힘」을 갖게 됐을 줄은………….
“꼴에 살고는 싶나 봐?”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해변을 향해 움직였다. 그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엘리사나 노엘과는 다른 종류의 광기였다.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뭘 이 새끼야”
“나는 사지가 불태워진 정도로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이야.”
그의 올곧은 눈빛은 정의의 용사의 눈빛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말만을 내뱉고 그는 아까와 같이 해변을 향해 몸을 옮겼다.
그의 그런 행동을 그녀는 매우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 해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그는 의문을 표했다.
“.....뭐 하는 거냐?”
“보면 몰라? 니 새끼 살려 주려고 그러지.”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잡으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녀 또한 그를 살려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라면 그의 사지를 찢고 시체를 불태웠을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는 거지……?”
그의 질문을 합당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서로를 죽일 듯이 싸웠던 사이가 갑자기 돌변해서 살려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내가 널 살려주고 싶겠냐. 시발아.”
그녀는 역겹다는 듯이 욕을 박고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질문으로 그녀의 걸음걸이가 사나워 진 것을 보아하니 그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목덜미를 잡힌 그 상황에서도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주된 생각은 엘리사가 어째서 자신을 구해주는 것일까? 라는 것이었다.
결론을 생각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의견을 굽힐만한 일을 생각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오는 문제였다.
벨리타 자스민.
그녀가 이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벨리타 자스민속에 숨어있었던 ‘그것’. 아마 그로 인한 파장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것’에게 자신이 죽었다고 하면 벨리타 자스민은 충격을 받을 게 분명했다. 살인이라는 것은 본래 그러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겨우 그것으로 이렇게까지 할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이는 자스민밖에 없었다.
파도가 모래를 치고 있는 해안.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이 많이 없었는지, 해안을 떠돌고 있는 게들은 인간의 등장에도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해안에는 마리안이 산산조각 내버린 배의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니 알아서 가라.”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모래사장에 그를 던졌다.
“큿……!”
그는 모래사장에 널브러져 있는 부서진 나무판자에 손을 댔다.
우우웅
그가 손을 대자 부서져 있던 판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모인 판자들은 작은 뗏목으로 변했다.
상처가 깊었기 때문일까, 그의 배는 사람 하나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의 크기였다.
그가 뒤를 돌아보니 엘리사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스민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그는 작은 뗏목에 자신의 몸을 기댔다.
원래라면 뗏목을 자신이 원하는 데로 조종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현재 제정신을 차리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뗏목은 어찌저찌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그가 있었던 카나리아 제도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다시 그의 눈앞에 누군가 가로막았다.
푸른색 머리카락과 무표정한 얼굴. 특히 물을 타고 다닌다는 것을 보면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팔데우스씨.”
마리안을 만난 그, 아니 팔데우스는 허탈함의 한숨을 쉬었다.
“……지랄 났군.”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해변의 모래사장이었다. 눈을 뜰 떼마다 갑작스럽게 바뀌는 환경은 내가 혼란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내 주위에는 내 몸 위를 기어 다니는 게 한 마리가 전부였다. 엘리사는 어딘가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나라는 존재에 흥미가 생긴건지 내 몸을 위에서 방황하는 게를 멍하니 보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간지러웠지만, 그 이상으로 내 몸을 돌아다니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다.
어느새 해는 지평선에게 삼켜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이 섬에서 마을을 찾는데도 반나절 정도 걸린 것이 생각났다.
오히려 지금까지 해가 안 졌다는 것에 신기함을 가져가 하는 게 아닐까.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팔과 다리, 손가락과 머리에 모두 힘을 줘 보아도 힘이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물에 젖은 걸레처럼 축 처진 듯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몸살에 걸렸다기보다는 탈진했을 때에 더 가까워 보였다.
……내가 뭐 했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해도 기억이 안개에 씌인것처럼 잘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몸이 매우 지친 것을 보아하니 몸을 험하게 쓴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기억의 안개가 걷힐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참을성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울음을 삼키고 있던 엘리사의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궁금해한다고 해서 잘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또 항상 하던 것처럼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면서 내 얼굴을 피하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엘리사가 살아있지 않은가. 그 정도는 용서해주고도 남았다.
워낙 비정상적인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해변에 덩그런히 누워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이런 것도 적응이라면 적응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방금 눈을 떴음에도 다시 눈을 감고 싶었다. 허나, 아직 엘리사를 보지 못했다.
눈을 감기 전에는 엘리사를 다시 보고 최소한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까는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해변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누군가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박자를 맞춰서 규칙적으로 걷는 소리를 들으면 누가 오는 건지 보지도 않고 알 수 있었다.
“안녕. 엘리사.”
비록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진심을 가득 담아 인사했다.
“....괜찮으십니까?”
엘리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어루만지는 엘리사의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과 내 손이 맞닿자 내 입가에는 약간의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섬에서 있었던 일들이 워낙 꿈 같아서 그런지 그녀의 손마저도 꿈 같았다.
“그럭저럭.”
나는 대답하며 그녀의 손의 감촉을 즐겁게 느꼈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지만, 괜찮았다.
엘리사에게 물어볼 것도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괜찮았다.
내 곁에서 나를 걱정해 주는 이가 있었으니까.
“.....그러십니까.”
“우왓.”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그녀에게 안겼다.
“엘리사……?”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나를 이런 식으로 않을 줄은 몰랐기에 내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있었다.
“몸이 불편하신 것 같아서.”
엘리사는 별 미동도 없이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무심한 반응에 괜히 내가 과민반응 한 것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어, 어…. 고마워……”
엘리사가 전보다 과감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나를 번쩍 안지는 않았는데…….
아냐. 지금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뭐.
내가 너무 별것 아닌 거에도 신경을 쓰는 거겠지.
엘리사는 나를 우리가 왔던 작은 보트에 앉혔다. 크기가 변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스듬히 누우니 올 때보다는 커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어……. 이 섬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러나 지금 물어보는 것 보다는 푹신한 침대 위에서 물어보는 것이 더 좋아 보였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돌아가는 동안 나는 무표정한 얼굴의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