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미소
* * *
엘리사의 옷은 그녀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옷을 물들인 혈액은 아직 온기를 간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수한 무구들에 스치며 생긴 잔 상처도, 그의 대검에 꽂힌 관통상도 그녀의 피부에는 그런 일이 없던 것 처럼 말끔해졌다.
작게 잘려있고 붉은색으로 물들어버린 옷만이 그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에 대한 증인이 되어 주었다.
물론 그녀가 평소와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몸 주위에는 검고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엘리사의 오른쪽 눈 또한 무언가에 잠식을 당하는 것처럼 점점 검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손톱 또한 조금씩 날카로워 졌다. 마치 짐승처럼.
“큿….!”
그녀는 자신의 그런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누구보다 혐오하고 경계하는 것이었으니까.
엘리사는 자신의 상태를 애써 부정하며 그것을 으스러질 듯이 껴안았다.
「」
그것은 엘리사의 행동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그녀를 떨쳐내지도, 들었던 팔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엘리사는 간절한 듯이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녀는 자신이 엘리사를 멈출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걸고 있는 것은 모래알만 한 희망이었다. 엘리사가 걱정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반 죽여놓은 것 따위는 죽어도 상관없었다. 다만 자스민이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자스민이 되돌아왔을 때, 자신이 했던 일을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것을 놓을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위해서.
「너 나 알아?」
‘그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고 중간중간 끊기는 불쾌한 목소리였다. 인간의 목소리를 애써 따라 하는 그것은 엘리사라는 존재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다른 이라면 두려움과 불쾌함에 빠졌겠지만, 엘리사는 달랐다. 그녀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힘겨운 미소를 띄우며 웃어보았다.
‘그것’이 자신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관심을 아예 가져주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네. 잘 압니다.”
그녀는 힘겨운 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엘리사의 양 손톱은 어느새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그녀의 흰자위는 검게 홍채는 붉게 물들고, 이빨 또한 점점 베일 듯 날카로워졌다.
힘겨운 한숨을 내뱉었지만, 그녀의 입가는 묘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와서야 후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 허리를 굽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유일한 사람이 자스민 이기에 엘리사라는 사람은 자스민에게는 철저하게 지배될 수 밖에 없었다.
“그야 저는 당신의“
침묵.
바닷가에서 절벽을 치는 파도의 소리도, 나뭇잎을 치는 바람의 소리도, 그것의 입가에서도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태초부터 말이 없었던 것 처럼,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
침묵에 숲에서 침묵을 깨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것’이었다. 그것은 감싸 안은 엘리사의 팔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증명해봐」
웃음기가 넘치는 목소리. 하지만 그 파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얼굴에 미소를 띤 그것의 목적은 단순했다. 즐거움. 그것뿐이었다. 증명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댔지만, 그것이 원하는 것은 쾌락 그 자체였다.
“하…… 진짜.”
공중으로 날아올라 손에 번개를 손에 쥔 ‘그것’을 보면서 엘리사는 미소와 함께 한숨을 쉬었다.
말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었었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글러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이 그것에게는 오히려 호기심을 일으키는 장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엘리사는 이 상황까지 모두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일이었다. 특히 그것과의 대치 상황은 차고 넘치게 대처해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것’을 힘으로 제압하면 되는 일이었다. 쉬운 일이라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재주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게는 말로 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아가씨 보고 싶네.”
팍!
그 말을 끝마치자마자 그녀는 땅을 박찼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땅을 치고 올라 높게 뻗은 나무를 향해 나아갔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그것’과 부딪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가 그 위험성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라기보다는 야생의 감이라는 것에 더 가까웠다. 웬만한 야생동물이 번개를 쏘는 미친 인간에게 다가가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그녀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따분해졌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 무관심함을 그녀는 줄곧 노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것’의 뒤편에서 그녀를 향해 질주했다.
그것은 엘리사의 행동을 예측했는지 그녀가 질주하는 경로를 예상해서 뇌창을 쏘았다. 그를 빈사로 만들고 남은 뇌 창이었다.
번개의 속도로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번개의 창.
하지만 그녀는 지금 빛만큼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엘리사는 허공을 디딤돌 삼아 속도를 점점 빠르게 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가 그것에 코앞에 다가온 후였다.
뒤늦게나마 손에 번개를 쏘아보려고 했지만, 그보다 그녀의 손이 그것의 얼굴을 잡는 게 먼저였다.
“........죄송합니다.”
누구한테 하는 사과였을까. 그녀는 작게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콰과광!
그녀는 그것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땅에 메다꽂았다. 유성이 낙하하듯이 내려간 그것은 땅에 닿은 채로 한참을 땅에 머리를 비볐다.
평소라면 그녀 자신이 기겁할 행동이었다. 자스민이었으면 머리를 잡아 메다꽂은 그 순간에 이승과 작별을 고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거침없이 그것의 머리를 땅에 박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가 ‘그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겨우 땅에 메다꽂은 것 정도로 죽지 않을 것이란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는 존재라면 그것은 겨우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그것을 너무나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굳은 믿음은 그것이 입을 열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거침이 없네」
“죄송합니다……”
그것의 말에 엘리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그것을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녀가 자스민의 몸을 땅에 박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사과하는 사람은 그것이 아닌 그것 안에 잠들어 있는 자스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이 정도로 하자」
‘그것’은 장난기가 섞인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그것의 미소에는 약간에 피곤함과 후련함이 달려 있었다.
“웬만하면 나오지 않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싫어」
‘글렀군.’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것은 실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는 제대로」
다음을 기약하는 그것은 자신이 다시 나올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는 그 말과 함께 ‘그것’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한숨을 몰아쉬면서 자스민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몸은 크게 지치지 않았다. 정신이 미칠 듯이 피곤하다고 따지고 있을 뿐이다.
‘제발 다시는 오지마라.’
그녀는 그것이 자스민의 몸을 차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보는 것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
엘리사는 문득 생각이 나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나갔는데 어째서 자스민이 돌아오지 않는 거지?
물론 자스민이 깨어날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수 있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설마 그것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 등등.
그녀의 생각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멈춘 것은 다름 아닌 자스민이었다.
물속에 있는 것 같이 몸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깊은 심해 속에서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른 채 유영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왜 이런 곳으로 왔는지 내가 지금 왜 헤엄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빛 한줄기가 내려왔다.
“아가씨!”
“....엘리사?”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목소리에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엘리사. 항상 내 옆에 있어 주는 메이드였다.
그런데 엘리사는
“하…. 뭐가 문제지?”
생각을 멈췄다.
중요한 것은 엘리사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문은 남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가씨!”
“엘리사…..”
눈을 뜨니 엘리사가 나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늑대처럼 날카로운 이빨. 내 등에서 살짝씩 찌르는 날카로운 손톱. 마족의 눈처럼 검게 물든 오른눈.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검고도 붉은 기운들까지.
내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엘리사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새로운 모습의 영향인지 칼에 찔린 모습이 거짓말처럼 그녀는 멀쩡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내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편하게 풀어지는 듯한 행복한 미소였다.
검은 존재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그는 어떻게 되었는지, 엘리사의 저 모습은 무엇인지 궁금증이 있었다.
하지만, 멀쩡하게 내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엘리사를 보니 딱히 상관없었다.
그녀가 멀쩡하다는 사실.
그 사실이 내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다행이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감겨오는 눈꺼풀에 휩쓸려 내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