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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02화 (102/120)

〈 102화 〉 압도

* * *

그는 걸음을 뒤로 옮겼다. 이는 그가 의도한 행동이 전혀 아니었다. 그 자신조차 자기 행동에 놀랄 정도였다.

지금 자스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안감과 음산함은 그의 예상을 옛날 옛적에 벗어난 지 오래였다.

오랫동안 뱀으로서 살아온 그의 본능이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껏 그가 마주쳤던 시련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벨리타 자스민도 그녀의 몸을 빼앗은 자스민도 아닌 다른 것이었다.

‘.......이런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대검을 손에 쥐며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벗어날 길이 없다고는 할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향해 수많은 무구를 조준시켰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갈 수는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깨어날 것을 생각하면 도주라는 선택지는 이미 지워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배에 구멍 한두 개 쯤은 괜찮겠지.”

그녀를 향해 수많은 무구들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방심은 없었다. 엘리사와 대치했을 때와는 달리 그는 전력을 다해 그녀를 상대했다.

원래라면 그녀에게 지나친 상처를 줄 일은 없었다. 그는 검은 존재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말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녀의 신체는 귀한 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돼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숨만 붙어있으면 살릴 수 있기에 숨만 붙여 놓을 생각이었다.

엘리사였기에 튕겨낼 수 있었던 공격이었다. 다른 이들은 피하는데 급급할 정도로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그도 그녀가 자신의 무구들을 버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능이 위험하다고 울린다고 한들 자신이 수습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 것처럼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그것을 향해 수많은 무구들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던 칼과 도끼, 창과 화살은 무구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것에 몸에 닿기 전에 공중에서 멈췄다.

“...........허?”

그것을 향해 나아가던 무구들은 오히려 방향을 바꿔 그에게 날아갔다.

“.....이런… 미친….!”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대검을 휘둘러 날아온 무구들을 쳐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모든 공격을 방어하지는 못했다.

그 증거로 그의 목에는 얇은 상처가 새겨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튕겨낸 무구들은 아까와 같이 조종할 수 있었다. 그로서는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무구들은 그의 몸의 일부와도 같았다.

그의 시작과 끝까지 무구들이 함께했었기에 그가 무구들에게 가지는 애정은 깊고 끈적했다.

그동안 수많은 적을 상대해 왔다. 그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은 자 또한 적지 않았다. 허나 무구의 주도권 자체를 빼앗긴 적은 처음이었다.

대검을 쥔 그의 손이 떨렸다.

세계의 뒤편에 있는 그의 입장에서 미지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너 뭐야.”

자신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허무함.

자신의 무구를 건드렸다는 분노.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무구를 컨트롤했는지 알 수 없다는 공포.

그 모든 것들이 그를 감쌌다.

분명 괜찮은 계획이었다.

엘리사를 무력화 시키고 벨리타 자스민을 확보한 후 그녀를 인질로 삼아 빠져나간다. 실제로 엘리사를 무력화하는 것 까지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변수는 자스민 그 자체였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도 없는 인격. 정신적으로 붕괴하니 튀어나온 ‘그것’. 그의 무구를 무력화 시킨 능력까지.

그는 두려움에 이어 불쾌함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별것 아니었던 일이 이렇게 커지는 것도,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기는 것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칼을 그것을 향해 날려보았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칼은 그것에 닿기 전에 멈추었고, 다시 그에게 되돌아갔다.

되돌아가는 시점에서 그에게 주도권이 되돌아왔지만, 무구들이 그것에 가까이 가는 순간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째서.

미지에 대한 공포.

그는 공포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 없었다.

공포를 주는 존재가 자스민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지금의 자스민은 여신의 신체를 빼앗은 죄인이었다.

저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무구가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식으로 짊어질 뿐이었다.

나와.

그는 검은 이 섬에 있는 검은 존재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무구들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이용할 뿐이다.

그것을 둘러싼 검은 존재들을 그것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손바닥을 하늘을 보게 만들었다. 그것의 표정은 악동 같은 얼굴이었다.

손바닥 위에 작게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법진?’

그에게는 마법진이라는 것 자체가 의문 투 성이었다. 분명 자스민은 마법진을 만들어내지 못한 열등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만들어낸 마법진은 자신이 알던 마법진이었다. 자스민의 마법진도 그의 마법진도 아니었다. 그것은?

“......각인?”

그것이 만들어낸 마법진은 검은 존재에 박혀 있는 마법진의 모양과 같았다. 검은 존재에 새겨진 마법진은 공용마법진을 개조한 것이었다.

공용마법진을 개조한 것이기에 보통 사람들은 그 마법진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그것은 자연스럽게 마법진을 만들어내었다.

「뇌창」

노이즈가 낀 것같이 지지직거리는 목소리.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지만, 전기음같은 소리 속에서 어째서인지 신성함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마치, 그들이 원했던같이 말이다.

그것이 입을 떼고도 그것의 손바닥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싶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숨이 그리 쉽게 내뱉어지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그것을 습격할 준비를 해야 할 검은 존재들에게 문제가 생겨 버리고 말았다. 검은 존재들의 옆에 검은색의 뇌창이 그를 겨누고 있었다.

검은 뇌창은 검은 존재에 기생하는 것처럼 그들에게서 마나를 빨아내고 있었다. 한치의 자비도 없이 마나를 빨아낸 결과, 일전에 자스민이 만들어냈던 것 보다 커다란 뇌창이 완성되었다.

그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어떤 일을 벌인 것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마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현상이었다. 검은 존재의 마법진을 이용해 그들의 마나를 통해 마법을 사용하다니.

심지어 번개 마법의 문제인 신체에 부담이 가는 것 조차 검은 존재에게 떠넘겼다.

검은 존재의 몸은 하나의 회로라고 할 수 있었다. 강제적으로 몸 안의 혈맥과 신경들을 마력 회로와 연결했기에, 그들이 일반인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일반인과는 신체 구조 자체가 변해 버렸기에 그들을 통해 마법을 발현한다는 것은 자살에 가까운 짓이었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짓은 그의 앞에 있는 그것은 너무나도 쉽게 해내고 있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등 뒤에서 마력이 폭발한다.

세계수의 줄기처럼 깊고 강한 혈관에서 마력이 폭발한다.

실험을 위해 헌신짝처럼 버려진 신경에서 마력이 폭발한다.

번개에 지져져 타들어 가는 허파에서 마력이 폭발한다.

굵은 두 팔과 다리에서, 괴사하여가는 손가락과 뇌줄기에서 마력이 폭발한다.

폭발하는 모든 마력을 먹어 치우며 크기를 불리는 검은 창은 아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저 흑색의 창은 위협적이었다. 창이 하나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의식을 했겠지만, 지금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창의 개수는 수십 개였다.

쓸만한 장기 말이라고 생각했던 검은 존재들은 전부 쓸 수 없게 돼버린 상황.

절망적인 상황.

그는 실시간으로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살아나갈 확률은 희박하기 그지없었다. 아까와 달리 검은 존재들을 사용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것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면

‘직접 마법을 행사한 적은 없다.’

도박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후……….”

그는 주변의 무구들을 전부 내려놓았다.

자신이 쥐고 있는 대검을 제외하고 말이다.

훅!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속도로 그것을 향해 나아갔다.

자스민의 목을 향해 굵은 대검을 휘둘렀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스민의 목숨을 챙길 수 없었다. 다른 이면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이 첫 번째였다.

아무리 여신이 중요하다고 한들 자신보다 중요할까.

그는 미친 광신도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고, 그 부분이 그의 망설임을 지워주었다.

싱긋

그가 휘두른 대검이 그것에 목에 닿기 직전.

그것은 웃었다.

그를 향해. 가소롭다는 듯이.

그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것은 한쪽 손에 번개를 쥐고 그에게 던졌다.

“젠장할.”

그는 가까스로 대검으로 막았다. 하지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그는 벼락을 맞아 자신이 처음 도약했던 곳으로 날아갔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의 몸은 쥐가 난 것처럼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번개를 쏘았던 오른손으로 그것은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내린 대상은 어느새 검은 존재를 전부 빨아먹은 흑색의 뇌 창이었다.

“크아아아악!!!!”

처음에는 한 개가 그의 오른팔에 꽂혔다. 그가 대검을 주로 휘둘렀던 손이었다.

그는 무구들로 창을 막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것은 그의 생각을 전부 읽은 듯 무구들을 피해 가며 그의 사지에 창을 꽂아 넣었다.

다음은 왼팔.

다음은 왼 다리.

다음은 오른 다리.

다음은

그의 사지는 어느새 남아나지를 않았다. 창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기에 그것에게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것’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에는 어떠한 악의도 분노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미소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위로 손을 들었다. 손 위에는 그에게 쏘았던 번개가 있었다.

「죽어」

‘그것’이 손목을 휘두르기 직전

“아가씨!”

일어설 리 없던 그녀가 자스민을 껴안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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