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강아지
* * *
마을 안쪽은 내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참혹했다. 건물들은 원래의 모습이 뭐였는지 알아볼 수도 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무너져 내린 건물에는 불길이 기생하는듯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 탔음에도 건물의 크기 때문인지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다.
아까 보였던 연기는 여기서 보였던 거였구나.
이 마을 안에 검은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긴장해서 올라간 어깨를 살짝 내렸다. 아직 확신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엘리사 어때 보여?”
“이 주변에는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엘리사도 나와 그리 의견이 다르지는 않았다. 그녀도 말을 흐리는 것을 보면 아마 그녀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마을을 몇 바퀴나 돌아다녔을까. 반대쪽 입구가 부서져 있던 것을 제외하면 검은 존재는 고사하고 혈흔 같은 흔적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는 시체를 볼 각오까지 했지만, 피 한 방울 볼 수가 없었다.
검은 존재들을 눈치채자마자 도망을 친 건가. 그런데 어째서 건물들을 부신 거지? 딱히 의미가 있어 보이는 행동은 아닌 거 같은데.
이 마을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부서진 입구 쪽으로 나아가 보기로 했다.
이 섬 어딘가에는 있는 게 확실하다고 하니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돌아다니는 게 났겠지.
“저……. 근데…. 검은 존재들이 포기를 하고 돌아가거나 다른 섬으로 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곳에 오신지도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요….”
어젯밤. 나는 내내 갖고 있던 의문점 중 하나를 풀어놓았다.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배를 부숴 놓았거든요.”
“네?”
“검은존재들이 마을에 들이닥칠때쯤에 저희들은 모두 해변가에서 배를 타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끈질기게 찾아올것을 대비해서 그들이 타고온 배를 부수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배를 탄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있었기에 상처없이 올수 있었습니다.“
배를 부수다니……. 단신으로 가능한 건가? 혹시 배의 크기가 크지 않았었던 건가 싶어서 물어보았다.
“배가 크지 않았었나요?”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큰 규모가 컸습니다. 웬만한 함선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배 안에 다른 이들이 더 있는지 확인해봤습니다만, 그렇지는 않더군요.”
“확인은 어떤 식으로…….”
“부수고 난 뒤에 떠오르는 시신이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아하……”
커다란 배가 그렇게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이었나,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엘리사가 보여준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 나….?
부서진 입구 쪽이 정문인 건지 큰 도로가 나 있었다. 바닥에는 수많은 사람이 드나든 흔적들이 있었다. 이 흔적들이 도망치는 사람들인지 검은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사.”
“네. 아가씨.”
“....괜찮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기에 여러모로 준비를 해 오기는 했다. 노엘의 물약이라던가, 엘리사가 주었던 반지와 목걸이라던가, 공용 마법진이라던가.
혹시 몰라 라는 마음에 여러 가지는 준비해 왔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괜히 객기를 부린 건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사도 걱정이었다. 엘리사가 지금까지 크게 다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불길한 마음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에게 계속해서 눈길이 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사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그녀 자신도 확신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가 다치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너는.”
“............”
아무 말이 없는 엘리사가 괘씸하고 답답했다. 그냥 빈말이라도 해 주지. 나는 심장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에 바닥을 찼다.
“....루시를 강제로 데려올 걸 그랬어.”
술에 쩔어 누워있는 루시가 그리웠다. 데려오는 것은 매우 힘들겠지만, 든든한 전력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괜찮습니다.”
엘리사가 즉답했다.
“와 봤자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루시도 나름 회귀자 인 데다가 우리 둘의 감시를 맡을 정도라면 상당히 강할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 봤자 의미 없나.
빽빽했던 나무들이 점점 사라져갔다. 근처에서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해변이 근처에 있는 듯 했다.
주변에는 부러져 있는 나무들이 있었다. 깔끔하게 베여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마을 사람들이 자른 것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엘리사.”
내 말에 엘리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감을 가득 담은 두 다리로 나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바위 위에 앉아있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건장한 체격에 갈색 머리인 남자였다. 그의 옆에는 커다란 대검이 있었는데 어찌나 큰지 엘리사의 키보다 클 정도였다. 바위 아래에도 수많은 칼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바위 뒤에는 절벽인 것 같았다. 들려오던 파도 소리를 듣고 해변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절벽일 줄이야.
그는 우리를 보고 혀를 차더니 옆에 있는 대검을 바닥에 꽂았다. 딱 봐도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무젓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쉽게 들어 올렸다.
“아가씨.”
엘리사는 나를 가로막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표정에는 혐오와 약간의 분노가 보였다. 엘리사에게 분노라는 감정은 보기 쉬웠지만 혐오는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혐오라는 감정이 나타난 걸까.
“병신 짓 하는 개새끼에 불법점유하고 있는 년 하나. 끼리끼리 잘 다니네.”
“살아보겠다고 가족까지 팔아넘긴 애미 뒤진 새끼한테는 듣고 싶지는 않은데.”
서로 한마디만 했을 뿐이지만, 이 들이 얼마나 사이가 좋지 않은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혹여나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엘리사의 뒤쪽으로 붙었다.
“근데 이곳까지 어쩐 일이실까. 그 무서운 엉덩이를 떼고 이곳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알 거없고 꺼져.”
“허. 뭐?”
“노리는 건 포기하고 이 섬에서 꺼지라고. 어차피 처음에 실패했으면 끝난 거야. 너도 잘 알 텐데.”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대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우리를 쏘아보았다.
“하. 마리안 그 미친년이 배를 산산조각 내 버린 건 알고 하는 말이냐?”
“뭐. 뗏목이라도 만들던가. 도망가면서 죄송하다고 빌면 마리안이 봐줄지 누가 알아.”
“이 씨발련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검을 들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빡이 친 모습이었다. 그는 뭉개진 표정을 다시 피고 상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억지로 지은 표정이라는 게 바로 티가 났다. 억지로 지은 표정이기에 그 표정에서는 불쾌함이 절실하게 전해져 왔다.
“그래, 포기하지. 대신 니 뒤에 있는 건 데려가야겠지만.”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엘리사의 말에서 유추하자면 검은 존재를 거느린 존재가 그가 맞는 것 같았다.
타이렌이 약속한 것처럼 그들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그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뭐?”
“아니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뭐라고 손에 들고 있는 게 낫지 않겠어?”
“분명히 건들지 않겠다고 대답을 들었는데……. 안 본 사이에 귀가 잘렸나 보네.”
그는 귀를 후벼파며 대답했다.
“그 영감탱이 말을 들을 것 같아? 좆 까라 그러지. 안 그래도 저게 돌아다닌다는 게 역겨웠는데 잘 된 참이지. 알아서 나한테 올 줄이야.”
“....지금 뭐라고 했냐?”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여신님의 몸에 마법진도 못 만드는 버러지가 들어가 있는데 말이야. 너도 나같이 생각하는 거 모를 줄 알아?”
엘리사는 그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분노는 뒤에 있는 나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그녀가 밟고 있는 바닥은 천천히, 스산하게 파여가고 있었다.
나는 엘리사의 팔을 툭툭 쳤다. 나는 괜찮다는 신호였다. 당연히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모욕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걱정되는 건 엘리사가 나를 귀찮다거나, 싫증이 난다거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물론 엘리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
엘리사는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내 신호를 알아들은 건지 그녀 스스로 화를 참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엘리사가 너무 욱하는 성격이 있어서 걱정되었는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가씨.”
“......어?”
불안하다. 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목줄 끈이 사실 끊어져 있을 때의 감정이랄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금방 끝내겠습니다.”
“어………? 엘리사 잠?”
쾅!!!
엘리사는 그 말과 함께 대검을 든 남자에게 돌진했다.
“아……”
나는 안타까움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강아지 같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