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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95화 (95/120)

〈 95화 〉 불편함

* * *

신비로운 방식으로 움직이는 배를 타고 있어서 그런지, 나는 금방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처음 한두 시간까지는 내 생각을 굳게 믿었지만, 4시간이 넘어가면서 점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분명 배에 속도는 웬만한 대형선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방이 똑같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배가 가르는 물살을 보아하니 상당히 빠른 것 같았다.

나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크게 상관없었다. 오히려 망망대해에 던져진 느낌이라 좋았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청량한 공간. 방 안과는 다른 느낌으로 편안했다.

“.............”

그러나 내 옆에서 실신한 사람을 보면 서둘러 도착할 필요가 있어 보이기는 했다. 배를 탈 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저기…….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온 만큼 이면 될 겁니다.”

다행히 내가 생각한 것만큼 최악은 아니었다. 만약 그보다 더 오래 걸렸다면 나는 루시의 장례식을 준비했을지도 몰랐다.

마리안은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슬슬 심심하신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아하.”

나는 내 옆에서 쓰러져 있는 루시를 바라보았다.

“괜한 걱정이에요. 도착하고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술이나 퍼마시고 있을걸요.”

“......설마요.”

이래 놓고 술을 또 먹는다고?

나는 그녀의 말이 빗나가기를 빌었다. 물론 나보다는 마리안이 루시에 대해 더 잘 알겠지만 말이다.

한참을 나아가다 보니 아무것도 없던 바다에 파란색의 바다 이외의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개의 섬들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카나리아 제도는 어디까지나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였기에 나는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눈으로 본 섬 하나하나가 내 예상을 뛰어넘는 크기였다. 내 안에서 섬이라는 지역은 독도가 전부였기에 다른 섬들 또한 대부분 그 정도인줄 알았다.

“거의 다 왔네요.”

마리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거대한 섬들을 지나쳐갔다. 내가 아직 그 섬의 웅장함에 빠져있을 때, 내 앞에는 더욱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넓게 펼쳐진 해안. 그 해안가에 심겨 있는 야자수. 에메랄드빛의 바다까지. 숨겨진 지상낙원 같은 곳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마리안은 해안가에 배를 세우고 나에게 말했다.

“다 왔어요. 내리셔도 돼요.”

사진이나 영화로만 봤었던 공간에 직접 와 있다는 생각에 마리안의 말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배에서 내리려는 찰나 루시가 눈에 띄었다. 내 힘으로 실신을 한 그녀를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엘리사.”

“..........네. 아가씨.”

“부탁해도 될까?”

“...알겠습니다. 아가씨.”

엘리사는 하기 싫은 티가 팍팍 났지만, 루시를 등에 업히고 배에서 내렸다. 나중에 엘리사한테 뭐라도 해 줘야겠네….

“급하게 도와달라고 부른 것 치고는 너무 평온한 거 아니야?”

엘리사는 루시를 업고나니 기분이 나빠진 건지 마리안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정말 싫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엘리사의 저런 감정표현을 보니 내가 너무 미안해졌다.

“그래 보이나요?”

“어. 존나 아무 일 없어 보이는데.”

“다행이네요. 그렇게 보이면.”

“알아듣게 말하지 그러냐.”

“........일단 마을로 가서 얘기하죠.”

마리안의 멈춰있던 두 발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에는 작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모든 건물이 지어진 것은 아니었고 많은 건물이 지금 지어지는 중이었다.

“엘리사.”

“....네. 아가씨.”

“........아니야. 아무것도.”

엘리사에게는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지금 같은 경우에도 너무 욕을 많이 하는 게 아니냐고 하고 싶었지만 참아내었다.

엘리사와 마리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욕하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꼰대 같았다.

지금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따스한 햇볕과 새하얀 모래, 건조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즐기기로 했다.

어차피 여러 가지 일에 신경을 써 봤자 별로 상관없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딱히 바뀌지 않을 것들이었다.

나는 물가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싶었다. 물에 떠내려가듯이 여행하면서 변해가는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마리안의 부탁은 내 예상 밖이었다. 이번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마리안의 제안에 수락했기에 이런 귀중한 제도에 올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것도 여행에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좋을지도 몰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 위를 걷는 건 힘든 일이었다. 보통 걷는 것 보다 몇 배나 힘든 것 같았다.

나야 더 힘들다 에서 그쳤지만……. 엘리사는 겨우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가씨…….”

“왜 엘리사?”

“버리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엘리사의 등을 바라보니 그녀의 등은 어느새 루시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만히 실신해 있던 아까와는 다르게 이제는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침을 여러 곳에 묻히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줄래? 마을에 가면 빨리 침대에 눕혀주자.”

“..............”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엘리사가 내 말을 존중해 줘서 다행이었다.

마을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들 모두가 열의를 갖고 마을을 만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네요.”

“으음…… 대충 맞는 말입니다.”

대충? 그녀의 대답에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지금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마리안은 우리를 숙소로 안내했다. 자그만하고 아늑한 숙소였는데 창문 밖의 풍경이 너무나 좋아서 마음에 들었다.

엘리사는 루시를 침대에 눕히고(사실 쓰레기봉투 버리듯이 던져놨다.)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나는 침대에 앉아 엘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은 포렌치노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마리안은 내 맞은편에 있는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문을 열기 전해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선은 나에게 견디기 너무 힘들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면서 그녀에게 질문을 내뱉었다.

“무슨 볼일이신가요….”

“그냥 당신을 보러 온 겁니다.”

마리안의 목소리는 평온함 그 자체였다.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이틀도 되지 않은 사이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단순히 그 이유 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왜 제 부탁을 받아들이신 건가요?”

“저한테 부탁을 하셨으니까요….?”

내 말이 웃겼는지 마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웃음소리를 죽였다.

방금 내가 한 말에 어디가 웃음 포인트였을까. 스스로 찾아보아도 그럴듯한 요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른 빛이 하는 말을 듣고 생각해본다고 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다음 날에 다시 오는 사람은 더욱 흔치 않고요.”

마리안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벨리타 자스민.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의 여행계획을 스스로 망치면서까지 이곳에 온 이유 말입니다.”

마리안의 부탁을 들어준 이유.

간단한 문제였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내 개인적인 이유였다.

“그냥…… 불편해지기 싫어서요.”

“불편해지기 싫다?”

“도움을 청하는 누군가를 무시하면 양심에 찔리잖아요. 마음은 불편하고………. 그냥 그런 게 싫었을 뿐이에요.”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마리안은 처음에는 내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갔다.

“잘 들었어요. 조금 이따가 엘리사하고 숙소 밖의 마당으로 나와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뭔가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떨떠름하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일어나서 내가 한 것이라고는 배를 탄 것 밖에 없었기에 졸음이 오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엘리사를 기다리고 싶었다.

이유가 중요한 걸까. 갑작스럽게 부탁을 들어준 이유를 물어보는 마리안의 행동은 당황스럽다기보다는 의문을 불러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나같이 행동하지 않았을까. 원래 은근히 사람들이 남의 도움을 지나치지 못하니까.

내 행동에 이상한 점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벨리타 자스민이 이런 행동을 하니까 궁금했던 걸까.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만.

“아가씨.”

“아. 엘리사. 왔어?”

엘리사는 옷을 갈아입는 김에 몸도 씻은 건지 그녀의 몸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밖에서 마리안 씨가 기다리고 있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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