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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94화 (94/120)

〈 94화 〉 토

* * *

“..........잠만, 있어 봐.”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를 멈춰 세운 것은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루시였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할 것이 많은지 머리카락이 뽑힐 정도로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왜요?”

“ㅇ, 아니 그게………”

루시는 입을 반쯤 열다가 닫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왜 이러는 거지?

옆에 있는 엘리사는 그 모습이 보기 좋은지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나에게 지어주던 미소와는 달리 악의가 담긴 미소라고 해야 할까. 옆에서 봤을 때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저번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엘리사는 나 이외에는 다 사이가 안 좋지 않나?

소니아, 노엘, 카밀라, 타이렌 모두 엘리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에게 대하는 엘리사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두루두루 잘 지낼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나를 호위하느라 다른 사람들과 벽을 친 게 아닐까. 만약 이 생각이 맞았다면 이번에는 많은 사람과 사이가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과 적을 치면 모두에게 좋지 않았다. 엘리사도 상대도, 나도.

이번 일을 계기로 엘리사가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서 갔다 오시죠. 보고할 정도까지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마리안은 웃으면서 루시에게 말했다.

그 웃음은 귀여움의 웃음이 아닌 비웃음에 더 가까웠다.

“.........그래.”

루시는 말을 내뱉고는 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엘리사는 여행을 시작하면 우리의 감시를 위해 파견을 나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 사람이 루시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는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우리를 감시할 거라면 술은 적당히 먹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감시할 거면 술은 먹지 않거나 조금만 먹지, 끝나지 마셔서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마시면 안 되지 않았을까.

나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배신감이 아닌 답답함이었다. 제발 이제부터라도 술은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 제발.

“그동안 저희끼리 얘기나 할까요?”

마리안은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루시가 이 공간에서 없어진 게 기쁜 것 같았다.

“저……. 근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살며시 미소를 짓는 마리안의 얼굴을 피해 눈을 깔았다. 나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걸 잘 하지 못했다.

“저……. 처음에 제가 봤었던 빛이 마리안 씨 맞죠?”

“네. 맞습니다.”

내가 한참을 고민한 질문을 그녀는 별것도 아닌 것 마냥 쉽게 넘겨 버렸다.

“어……. 음………”

혹시 이 질문이 그녀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그냥 닥치고 있을까. 같은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내 호기심은 무례함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처음 만났을 때하고 말투가 달라지신 거 같은데…….”

“.............”

“........맞나요?”

나도 이 질문이 실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저히 처음 만났던 빛과 같다고 볼 수가 없었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뭐, 그때와는 다르죠.”

내 걱정에는 그녀는 내 물음에 쉽게 인정했다. 나는 그녀가 화를 내면서 내 뺨을 때리는 것까지 예상해 놓았기 때문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때는 당신을 처음 봤기에 내숭을 떨었습니다만…….”

마리안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딱히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요.”

“아하……….”

처음 만났을 때는 내숭이었구나……. 내가 원래 알고 있던 내숭과는 살짝 의미가 달랐지만, 넓게 생각해 보면 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손 떼.”

그 와중에 엘리사는 마리안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손을 내쳤다. 나는 딱히 상관없었는데…….

“당신이 보기에는 좋지 않은 장면이겠네요. 그럴 수 있죠.”

다행히도 마리안은 엘리사의 도발적인 행동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관용에 감사할 뿐이었다. 조금 전에 엘리사가 모두와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너무 욕심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나는 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먼저 마리안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가 가장 궁금한 점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내 물음에 마리안은 나를 바라보면서 따뜻하게 대답해 주었다.

내 옆에 있는 엘리사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카나리아 제도입니다.”

“카나리아 제도요?”

카나리아 제도. 소설에서도 한번 언급되었던 곳이었다. 데우스 대륙의 경계 근처에 있는 제도라고 알고 있었다.

13개의 섬으로 구분되는 카나리아 제도는 경계 근처에 있는 탓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저희가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마리안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곳에 원래 살던 이들과의 충돌이 일어난 건가요?”

“아뇨. 그곳 주변에는 그 정도의 지능을 가진 존재는 없었습니다.”

나 나름대로 그럴듯한 가설을 세워 봤지만, 들어맞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 표정이 웃겼던 걸까. 마리안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아직 저희를 습격한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북쪽에서 내려왔으리라 추측만 할 뿐입니다.”

어쩐지 그녀의 행동만을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아지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허억, 허억. 다녀왔어….”

그때, 숨을 몰아쉬면서 루시가 도착했다. 얼마나 급하게 다녀왔는지 제대로 말을 못 할 정도였다.

“왜 이렇게 급하게 왔어? 재촉한 것도 아닌데.”

“아……. 그…….”

루시는 내 말에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궜다. 왜인지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우, 우욱…. 그냥………. 빨리…. 온….. 웁!”

그녀의 구역질은 점점 심해지더니 이윽고 모래 위에 어젯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나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어났기에 나는 온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 뿐만이 아닌지 내 곁에 있는 엘리사와 마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우웨엑……”

나는 차마 그녀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러니까 술 좀먹지 말라니까…….

“.......일단 카나리아 제도에는 어떻게 가죠?”

나는 내 뒤에서 무지개를 뿜는 루시를 무시하고 마리안에게 물었다. 지금 루시에게 말을 걸어봤자 좋은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기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으음…… 저야 그냥 갈 수 있지만, 여러분들은 그럴 수 없으니 배를 타야겠죠.”

“배가 있어?”

엘리사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마리안을 쳐다보았다. 배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 또한 루시를 무시하기로 마음 먹은 것 같았다. 그래 취객은 무시가 답이지.

“작은 배지만, 여러분들을 모두 태울 수는 있습니다.”

“아……. 나 배 타면 또 토할 거, 웁….!”

그냥 두고 갈까.

마리안이 가져온 작은 나룻배는 작았지만 튼튼해 보였다. 하얀색으로 색칠된 배는 귀여운 등껍질 같았다.

근데 이 작은 배로 저 멀리까지 나갈 수 있을까? 가다가 파도에 뒤집힐 것 같은데.

“근데 이걸로 카나리아 제도까지 갈 수 있어요?”

나는 의문을 속으로 삼키지 않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마리안은 내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

그녀가 말하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곳 직접 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루시……. 괜찮겠어?”

내 옷깃을 잡고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고 있는 루시는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별 이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내 앞에서는 툭 건드리면 죽을 것 처럼 되어 버렸다.

“ㅇ, 어……. 안 괜찮아.”

“그냥 여기 있을래?”

다른 꿍꿍이도 없이 정말로 걱정이 돼서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이대로 루시와 함께 가게 되면 그녀가 너무 고통스러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순 없어.”

이런 걱정에도 루시는 괜찮다면서 계속해서 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를 감시해야 하는데 혼자 해변에 남아 있으면 안 되기는 하지. 살짝 루시가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우리가 모두 배에 올라타자 마리안은 바다에 손을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살짝 흔들릴 테니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말에 한쪽으로는 배를 한쪽으로는 엘리사를 꼭 잡았다. 이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엘리사가 어떻게 해 주겠지.

그러자 누군가 이 배를 잡아당기는 것 마냥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예상을 했다는 듯이 표정에 미동도 없었고, 루시는 배 밖에 머리를 내놓았다.

진짜 죽겠는데 저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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