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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93화 (93/120)

〈 93화 〉 약점

* * *

“루시.”

나는 루시의 몸을 힘차게 흔들었다. 내 옆에 누워있는 그녀를 바라보니 어젯밤 루시에 관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미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 좀 그만 맥일걸…….

“으으으응응……”

내가 아무리 흔들어도 그녀는 인간의 언어를 하는 것을 버거워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루시까지 이 모양이니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졌다.

“일어나봐!”

나는 그녀의 볼을 집어 당기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당해봤던 수법이기에 효과는 보장했다.

볼을 가래떡 마냥 잡아당기는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는 미세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피곤함과 짜증이 반반씩 섞여 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살짝 쫄았지만,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왜에……”

“아……. 그게…….”

피곤한 얼굴로 누워있는 그녀가 언제 다시 잠들지 몰랐기에, 나는 그녀를 몸을 일으켰다. 루시의 몸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기에 쉽게 일으킬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파도에서 빛이 나왔는데 그 빛이 나에게 도움을 청했고…… 나는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잠자리에 들었고…….

이런 말들을 최대한 쉽게 말했다. 루시는 내 말을 듣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자스민.”

내 설명을 쭉 들은 루시는 피곤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조그만 눈을 돌리면 다시 누워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왜?”

“정확히 그 빛이 무슨 일로 너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데.”

“어…… 잘 몰라.”

생각해보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심각한 말투로 내게 말을 했고 그건 엘리사또한 마찬가지였었다.

그러고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는 게 일 순위였나?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내 어리석음이 떠올랐다. 진짜 나라는 인간은 멍청한 건가…….

“그 빛의 본 모습을 본적이 있어?”

“.......아니?”

“사이비야. 난 잔다.”

“아악….. 잠만……….!”

다시 침대에 누울려고 하는 루시를 끌어올렸다. 루시는 나를 원망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걸……

“루시. 그 빛이 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왜 내가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엘리사가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엘리사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는걸.”

말이 이상했지만, 이게 내가 근거라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빛이 말을 거는 순간 엘리사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이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삐딱하게 대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경계하지도 않은 것을 보아 위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은 소니아의 동료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타이렌 때처럼 나를 엄청나게 보호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엘리사는 결코 좋은 감정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내가 아직 모르는 소니아의 동료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범주 안에는 루시가 들어가 있었고 말이다.

내가 아직 마차 안에서 지루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루시는 이따금 자신의 모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고 살이 떨리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그녀에게 빠져있을 때 였다.

그녀가 말하는 일행이 누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뚝뚝하지만 남을 생각하는 리더와 사이코패스 같은 연금술사, 루시의 언니와 다른 사람들까지.

어째서인지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나는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루시. 네가 말하는 무뚝뚝한 싸가지라는 사람이 혹시 소니아야?”

“어…. 어?”

음…… 사실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 아니. 그냥 네가 말하는 사람이 소니아랑 비슷한 것 같아서.”

“ㅇ, 어. 으음………. 그게……”

이때 나는 루시가 소니아의 동료 중 하나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렇게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나에게 필적할 정도로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게 이유라고.”

“어.”

루시는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최대한 그녀를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전에 읽은 책에서 설득하려면 상대에 눈을 제대로 쳐다보라는 글을 읽은 것 같았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런 글귀 하나가 귀했다.

“...........으으.”

루시가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나는 이틈을 타서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었다.

“일단 해변으로 가보자. 응? 네가 한번 봐주면 되잖아.”

“............”

나는 루시의 허리를 잡은 채 바닷가로 나섰다. 루시의 키가 나보다는 컸기에 누군가 보면 내가 부축 당한다고 오해를 살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럴 때 엘리사는 어딜 간 거지. 원래는 내가 일어나면 곁에 있었는데, 지금은 숙소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에 가면 엘리사가 보일 것 같았기에 엄청나게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살짝 불만이 생기기는 했다.

하루 만에 다시 찾은 해변은 어제와 달라지는 게 없었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파도는 밤의 쓸쓸한 파도와는 달리 힘이 차 있는 느낌이었다. 파도에 기합이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아침의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해서 그런지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해변가에는 엘리사가 서 있었다. 엘리사는 처음 보는 사람하고 같이 서 있었는데 둘 다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엘리사가 우리를 바라볼 때 나는 손을 흔들었다. 엘리사는 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서둘러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째선지 잠이 오지 않더라고.”

엘리사는 내 말에 이해가 된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나는 엘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사 해변에 있었던 거야?”

“아, 네. 해변에 잠깐 얘기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래?”

나는 그녀의 말에 엘리사와 같이 서 있던 사람으로 시선을 옮겼다.

푸른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를 한 무표정한 인물. 마치 설녀 같다고 생각했다. 하얀 바탕의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설녀 느낌이네.

“마리안………?”

그때, 내 옆에서 비몽사몽 하던 루시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아까 피곤함에 절어 있던 눈빛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눈빛이랄까. 루시는 파란 머리의 사람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루시. 아는 사람이에요?”

내가 그녀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이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루시는 부축도 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아직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아서인지 발을 헛딛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 마음이 같이 불안했다.

“마리안 네가 어쩐 일이야.”

“저 아가씨한테 이야기 들으시지 않으셨나요?”

그 말에 루시는 뒤를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에 어째서인지 나는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앞으로 나서서 루시가 마리안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외모와 분위기만으로도 인간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녀의 앞에 서서 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결정하셨나요?”

“그…… 어제 만났던 빛……. 맞나요?”

“네. 맞습니다.”

어째 쌀쌀맞아진 것 같은데. 어제 만났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말투였기에 그녀가 어젯밤의 빛이라는 게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전에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져서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 말에 마리안은 나와 루시를 한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가 사는 섬에 최근 들어 마물들의 습격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마물이요….?”

“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섬을 습격하는 마물들이 누군가의 지휘 아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물이 누군가의 지휘 아래 움직이고 있다라.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굳이 우리를 골라서 부탁해야 했을까.

내 머릿속에는 질문들이 넘쳐났다.

“네가 겨우 그런 거로 도움을 요청했다고?”

이런 내 질문을 대신 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시였다.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사실 엄청나게 혼란스러울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술을 먹은 것 치고는 엄청나게 훌륭하게 말하고 있었다.

“또 나중에 가서 말하지 말고 지금 말해. 뭐가 문제인 거야.”

루시의 직설적인 말에 마리안은 엘리사를 한번 바라보더니 아주 살짝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중요한 비밀 중 하나라서요.”

“............”

루시는 그 말을 듣고 그럴 줄 알았는지 내 팔에 머리를 박고 작은 소리로 뭐라 뭐라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마리안에 대한 험담 같다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어쩌실 건가요?”

마리안의 눈이 나를 향한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누구의 소행인지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부탁은 거절하는 게 맞았다.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나는 전에도 말했듯이 이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여행을 찜찜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일지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호기심. 어찌 보면 내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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