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순응
* * *
주변의 불빛이 없는 해안가. 스산한 파도 소리만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 하나 없었던 바닷가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혔다.
“나와.”
그녀, 엘리사의 말에 파도 속에서 불빛이 떠올랐다. 몇 시간 전에 자스민이 보았던 그 빛이었다.
엘리사는 그 빛을 향해 짜증을 내면서 재촉했다.
“지랄하지 말고.”
그녀의 말에 빛은 점점 형체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빛은 세로로 길어지면서 사람의 형체로 변해갔다.
빛에서 나온 사람은 아직 적응되지 않는 듯 자기 모습을 되돌아봤다.
푸른색의 머리카락에 하늘과 같은 하늘색의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은 얼음을 떠올리게 했다.
하얀색 바탕의 파란색 줄로 특색을 더한 로브는 그녀의 신비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엘리사에게는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짜증이 날 뿐이었다. 그녀는 허공에 발길질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요. 엘리사씨.”
“하아…….시발.”
자신의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 건지 엘리사는 자신의 감정을 삼켰다. 이대로 자신의 앞에 있는 이를 멸해 버리기에는 의문점이 너무나 많았다.
“너에게는 물어볼 게 많아.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고 있겠지. 하……….”
엘리사는 그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드넓은 파도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쉴 뿐이었다.
“용건이 뭐야.”
“아까와 같습니다. 리샤트를 위해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왜 우리에게 말해.”
엘리사의 말은 날카로웠다. 그녀는 지금 매우 귀찮을 것 같은 일에 발을 담근 것 같은 끈적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도움이 될 사람이 당신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곳에 소니아님께서 계셨으면 그분에게 갔을 겁니다.”
“아니,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그렇지.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할 정도인가?”
엘리사는 파란 머리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사와 마리안의 관계는 좋은 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같은 동료 아닙니까?”
마리안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라기보다는, 엘리사를 향한 조롱에 더 가까웠다.
“이제는 정신을 놓고 다니나 보네. 되지도 않는 말을 내뱉는 걸 보니까 말이야.”
“글쎄요. 이 시기에 이곳까지 내려온 당신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
“자스민의 처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엘리시아입니다. 정식으로 허가받았다고 한들, 당신들이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죠.”
그 사건에 휩쓸려 회귀자가 된 인물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대부분은 하나의 목표를 두고 협력했던 사이였다.
허나 회귀를 한 후에는 여러 파벌로 갈라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피치 못할 적을 저지하기 위해 임시로 모였을 뿐, 구심점이 사라지니 흩어지는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엘리시아에 있는 회귀자들은 마리안의 말대로 자스민을 환영하지 않았다. 만약 자스민이 정식으로 엘리시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회귀자들에게 둘러싸였을 것이다.
아까 자스민과 있을 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태도. 엘리사는 짜증을 내면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너 아까 고개 숙이면서 도와달라고 빌지 않았냐?”
“그건 벨리타 자스민에게 한 거죠. 당신이 제 말을 들을 리가 없으니까요. 실제로 이 여행의 결정권도 그 아이에게 있는 모양이니까요.”
“허. 그 좆같은 성격은 변하질 않네.”
“당신도 주인에게 꼬리 흔드는 솜씨는 변하지 않았네요. 오히려 더 진보한 것 같기도 하고.”
콰앙
엘리사는 마리안에게 순식간에 주먹을 내질렀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쫓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주먹이었다.
“손이 먼저 나가는 버릇도 그대로고요.”
마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위에 둘러싸인 보호막이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아가리 해라.”
엘리사의 말에 마리안은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엘리사는 순간적으로 또 주먹이 나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후………”
엘리사는 스스로 심호흡하면서 내면의 분노를 잠재웠다. 이곳에서 너무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뭐, 사실 상황이 위태로운 건 사실입니다. 소니아씨에게 부탁을 드리러 테오도르로 갈 수도 없을 정도니까요.”
“그렇겠지……….”
많이 위태롭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손수 엘리사에게 부탁을 할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냥 이곳의 다른 회귀자들한테 말해보지 그러냐. 웬만한 일은 도와줄 텐데.”
“시간이 없으니까요.”
마리안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무표정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리사의 눈에는 엄청나게 화를 내는 것 같이 보였다. 평소 이 정도의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던 마리안이었기에 놀라운 현상이었다.
“원래라면 엘리시아의 수도에 가서 지원을 요청할 예정이었습니다. 그전에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는 상관하지 않고 데려갈 계획이었고요.”
“............”
“그런데 제가 올라오는 그 순간 당신들이 술집에서 꼬치를 먹고 있었고 저는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존나게 꼬였네……”
엘리사는 자기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바닥을 내려보았다.
“진짜 짜증 나는 거 알아? 기껏 아가씨가 계획한 여행인데 벌써 계획이 꼬였잖아. 우리 아가씨가 얼마 신나 하셨는데………”
일련의 사건들로 자스민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너덜너덜해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날 자스민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엘리사를 덮쳤다.
엘리사는 그 누구보다도 자스민의 행복을 바랐기에 그녀는 수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때 자스민은 여행을 제안했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허락했다.
자신이 조금만 주의하면서 위험한 일이 없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지만………
아쉽게도 그 계획은 파탄이 나버렸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 않나요. 자스민이 제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는 거고.”
“넌 아가씨가 거절할 것 같냐?”
“.................”
엘리사의 한숨 섞인 말에 마리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스민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기묘하게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확신을 했기에 마리안은 자스민을 만난 뒤로 엘리시아를 돌아다니지 않았었다.
“아가씨는 네 부탁을 거절하지 않겠지. 네가 그렇게 발 빠르게 움직일 정도니 상당히 버거운 일이겠지. 그런 곳에서 내가 아가씨를 멀쩡히 지켜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나만 가면 안 되냐?”
“.......당신이 그렇게 약한 소리를 내뱉다니. 의외네요.”
“뭐?”
“전에 당신은 좀 더 광견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광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모시는 주인을 닮아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닥쳐.”
엘리사는 마리안이 하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전에 비하면 유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당신 혼자 가는 건 자스민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 시발아. 너 말이 다 맞다……”
이른 아침. 어제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금세 눈이 떠졌다. 눈은 아직 피곤하다는 듯이 고통을 호소했다. 뻐근한 어깨 덕분에 팔을 움직이는 건 어려웠다.
오른쪽에 있는 해변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저 해변을 바라봤을 때 기대감이 내 머릿속의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과 불안이 절반을 넘어버렸다.
분명 관광이 목적이었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버렸다.
내가 이 부탁을 받아들이면 간단한 일로는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엘리사가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을 정도니 말 다했지.
마음 같아서는 죄송하다면서 거절하고 여행을 이어 나가고 싶었다. 엘리시아와 브레토니아의 사이는 점점 안 좋아 지고 있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엘리사의 말에 따르면 지금 갔다 오는 것이 나중에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는 것 보다는 낮다고 한다. 그렇기에 지금 얻은 기회가 천금보다 귀한 기회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도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봐도,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어도 마음 한편에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 일이 남아있을 것이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보자.
어젯밤에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무슨 상황인지, 왜 우리가 필요한지 알아야겠다.
“으으으으으………”
그때 내 옆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꺾어 돌아보니 내 옆에는 어젯밤 그대로인 모습으로 버둥거리는 루시가 잠꼬대하고 있었다.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그녀의 온몸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든든한 메이드대신 취객이라니.
아. 그러고 보니 루시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