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빛
* * *
턱을 괸 채로 바다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암흑에 잠겨 어둠을 품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철럭이는 파도 소리는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았다.
“ㅇ, 야. 뭘 그렇게 보고있ㄴ냐.”
내 앞에서 빨개진 얼굴로 투정을 부리는 루시는 이제 자기 얼굴 무게도 무거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술이 약한 것을 알기에 한 잔만 마시고 음료수만 마셨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루시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술이 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도수가 높은 술병을 그대로 마셨다.
그 결과가
“ㅈ자스민…… 내말안득ㄹ려?”
이 꼴이었다.
이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루시는 가까스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몇 분만 있으면 그대로 꿈의 세계로 떠날 것 같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이곳에 있었던 손님은 집으로 향한 지 오래였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우리와 테이블을 정리하는 사장뿐이었다.
그 사장마저도 지금은 잠시 어딘가로 자리를 비웠으니 지금 이 넓은 바닷가에는 나와 루시 그리고 엘리사 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이 넓은 바다를 독차지 하는 것 같아서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내 앞에서 머리를 박고있는 취객 때문이었다.
“루시. 너무 마신 것 아냐?”
“나, 나는 안 취했거든? 너나 알아서 ㅈ잘해.”
“.......그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그녀에 관한 관심을 끊었다. 저렇게 술주정을 부리는 사람들은 무시하는 게 답이었다.
나중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택시에 태우고 보내는 게 가장 효율적인 해답이었다.
비록 이곳에 택시는 없었지만, 지금 루시에게 계속 말을 거는 것 보다는 나을 게 분명했다.
정 문제가 생기면 이곳에 버리고 가도 되고. 가이드니까 알아서 하겠지.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
내 옆에는 엘리사가 한결같이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술은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저번에 나와 술을 먹고 나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고 난 뒤 그녀는 자기 입에 술을 갖다 대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너무나 안심이 되었다. 혹여나 엘리사가 술을 먹고 한 번 더 나를 덮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도 내 걱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자리에서 그녀는 특히 조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한 잔만 마셔서 아무렇지 않아.”
사실 아무렇지 않았다.
원래 술이 약했지만, 자스민에 몸으로 들어가고 나서는 더더욱 술이 약해진 느낌이었다.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지금의 나는 술의 향기만 맡아도 취할 것 같은 술찌가 되어 버렸다.
이런 변화가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반가울 따름이었다. 나는 원해 술 그 자체보다는 알코올이 내 머릿속을 헤집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나 자신이 내가 아닌 것 처럼 몸이 가눠지지 않을 정도로 술에 취했을 때,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그런 감각.
내가 술을 마시는 가장 큰 이유였다.
술자리의 분위기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멍한 채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이었다.
지금의 나는 꽤나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저 맥주 한 잔일 뿐이지만 내 머리는 벌써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더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여행을 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기에 더 마시지는 않았다.
이곳이 내가 지내왔던 옥탑방이라면 술을 마셨겠지만, 지금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술에 완전히 취하기보다는 이곳을 조금 더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곳을 취기에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바닷가에서 무언가 빛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새파란 빛이 천천히 수면으로 떠오르는 그 광경은 나에게는 신성한 의식 같아 보였다.
“엘리사… 저기 봐봐.”
나는 엘리사의 어깨를 쳐 그녀의 시선을 해변으로 옮겼다.
수면 아래에서 솟아 나온 둥근 빛은 점점 환하게 빛났다. 그러면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리사는 나를 말렸다.
“아가씨.”
내 눈앞에 있는 빛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 빛은 창백하고 차가웠지만, 그런데도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저 빛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내가 미지의 존재들과 만나며 느낀 감정치고는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엘리사.”
나는 그녀에게 해안에 있는 빛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이내 자신이 앞에 가는 것을 조건으로 찬성의 뜻을 내보였다.
내 앞에서 자는 루시도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쥐 죽은 듯이 책상에서 엎어져 자는 그녀를 해변까지 끌고 갈 자신이 없었다.
끌고 가더라도 그녀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예상할 수도 없었고.
저벅저벅
우리가 빛을 향해 걸어올 동안 빛은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의식한다는 것 같달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빛을 향해 코앞으로 다가오자 빛은 내 손바닥으로 다가왔다.
들리시나요?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나뿐만 아니라 엘리사 또한 들린 것인지 나를 뒤로 보내고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들리는 것을 알았는지 목소리는 말을 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 목소리는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어딘가 위축이 된 느낌이었다. 적어도 우리에게 적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는 여러분을 모시러 온 리샤트의 사자입니다.
“리샤트?”
“엘리사. 아는 곳이야?”
리샤트라는 이름에 엘리사는 아는 것이 있는지 빛에게 되물었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기에 엘리사에게 물어보았다.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왕국입니다. 하지만 오래전에 멸망했다고 하는 옛이야기 속의 나라입니다.”
.......네. 맞습니다.
엘리사의 말에 목소리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사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에 가까워 보였다.
저희는 정확히 말하자면 리샤트의 후예입니다. 리샤트가 멸망할 때 빠져나온 피난민들이 세운 작은 나라이지요.
“........그건 알겠어. 그런데 어째서 우리를 데리러 온 거지?”
나는 멍하니 엘리사가 말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샤트라는 나라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보다는 뭐라도 아는 엘리사가 말을 하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리샤트에는 큰 문제가 들이닥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저희 만으로는 해결을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수치스럽기 때문일까, 죄송스럽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여러분들을 에게 부탁드립니다. 저희의 얘기를 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엘리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내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엘리사는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결정해?”
내 말에 엘리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네. 저는 아가씨의 시종입니다. 제가 결정하는 것 보다는 아가씨께서 직접 생각하시고 결정하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사의 말에 나는 멍하니 있던 뇌를 굴렸다.
술이 들어갔기에 제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날보다 머리를 굴릴 때 살짝 더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일단. 내일 아침에 대답해도 될까요.”
내일 아침이요……?
“네. 지금 자는 일행도 있고,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지금 바로 결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일 아침까지는 확답을 드릴 테니 지금은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기에는 내가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 멋대로 결정하기보다는 시간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수긍했는지 빛은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이 반딧불이 같아서 무심코 귀엽다고 생각했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빛은 다시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꿈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내 얼굴을 치는 바람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엘리사. 일단은 숙소로 가자. 이렇게 피곤한 상태에서는 생각하는 것도 피곤하다.”
“네. 아가씨.”
나와 엘리사가 다시 가게로 돌아왔을 때 우리 테이블에 있었던 그릇과 잔은 모두 치워져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상에 엎어져 자고있는 이상한 가이드는 치워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으에에에엑……. 언니…………”
이것까지 치워줬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괜찮겠어……?”
내 말에 엘리사는 대답하지 않은 채 루시를 업었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썩어 있었다.
안 괜찮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