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해안
* * *
침대는 푸딩처럼 부드러웠다. 침대에 내 몸을 던졌을 때, 내가 생각한 감상이었다. 하얀 이불과 하얀 베개에서는 방금 막 빤 것만 같은 향긋한 냄새가 났다.
집같이 익숙함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국적인 이곳은 편안함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천장에는 파란색과 하얀색의 물감들로 여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인물이 섞여서 싸우고 있었다. 누군가는 빼앗기 위해, 누군가는 지키기 위해.
맨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정사각형의 하얀 물체가 원인인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을 줄이야. 나는 한동안 멍을 때리면서 그림을 쳐다보았다.
뭐라 해야 할까, 이곳의 옛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가씨.”
내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을 때, 내게 엘리사가 다가왔다.
그녀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숙소는 괜찮으십니까?”
“그럼. 내 생각 이상으로 훌륭해서 너무 좋아.”
“그러십니까.”
엘리사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그녀의 손길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아가씨.”
“응.”
“어째서 엘리시아로 오신 겁니까?”
“음………. 그냥, 궁금했거든.”
내가 여러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다들 엘리시아의 자연경관을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낸다는 것이다.
브레토니아도 자연경관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엘리시아에 비하면 그 숫자가 좀 많이 부족할 뿐이었다.
나는 이번 여름 방학 동안 최대한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이유는 저번에도 말했듯이 나라는 인간의 삶의 욕구를 증진시키기 위함이었다.
나는 지금 이 삶을 더 이어 나가든 나아가지 않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스민이 죽지를 않기를 원하는 이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저 악역 영애일 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조금 더 살아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여행을 계획했다. 이 세계에 조금 더 애착을 두기 위해.
내가 죽는 것 보다 앞으로 볼 것들을 아까워 할 수 있게.
“엘리시아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많다잖아, 죽기 전에는 한 번씩 보고 싶어서.”
“.........”
꽈악
엘리사는 내 대답에 내 몸을 껴안는 것으로 대답했다. 누군가에게 안기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기에 부끄러웠지만, 누군가가 나를 감싸 안고 있다는 것만큼은 너무나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나를 감싸 안은 것처럼 나도 그녀를 안았다. 그녀에게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온기는 내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제가 살아있는 이상 아가씨가 먼저 돌아가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엘리사의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오히려 간절한 기도에 가까웠다. 엘리사의 손은 어느새 살짝씩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이래왔다. 내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엘리사가 이렇게 떨면서 말을 하다니. 괜히 마음이 안 좋아 지는 것 같았다. 나 때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 나도 알아.”
나는 엘리사의 머리를 토닥였다.
“고마워.”
그동안 그녀에게 수도 없이 했었던 말이지만 나는 한 번 더 그녀에게 말했다. 엘리사가 너무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엘리사는 나를 안느라 어느새 나와 같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엘리사는 그 사실을 깨닫고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늘어섰다.
그녀와 벌써 며칠이나 같이 잤는데 아직도 엘리사는 나와 자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이쯤 되면 익숙해질 만도 했는데.
“어디가.”
“아, 아니……그게….”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으니 엘리사는 눈을 내리깔며 입을 움찔거렸다. 중요할 때는 망설임이 없으면서 왜 이럴 때는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걸까.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물었다.
“그렇게 어색해 하지 마. 그동안 같이 잤잖아.”
“.........”
“응?”
“사실”
“뭐해???”
그때 방문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정도 목청이 좋고 시끄러운 목소리를 가지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루시. 방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녀는 방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어이없는 눈길로 방문을 곁눈질하며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어이가 없는 건 매한가지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다가갔다.
벌컥
“안녕? 방은 마음에 들어? 이래 봬도 이곳에서 가장 좋은 곳인데 말이야. 지금 보니까 내 방보다도 좋아 보이네.”
“용건.”
“어……?”
“용건이 뭐야.”
루시의 말에 엘리사는 단답형으로 말하며 차갑게 대응했다. 나는 침대가 너무나 푹신했기에 이불을 뒤집어쓸 뿐이었다.
다른 일은 신경을 쓰지 않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닷내음이 흘러들어오는 창밖에는 뻥 뚫리는 해안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다우면서 사람이 없는 해변이라니, 지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니에요? 이래 봬도 당신도 우리와 같이”
“닥쳐.”
또 저런다.
엘리사는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때는 말이 험하게 나갈 때가 많았다. 나도 착한 사람은 아니기에 욕 같은 것도 종종 할 때가 많았다.
물론 나는 속으로만 하지만.
뭐, 엘리사의 저런 면도 나는 괜찮으니까. 내가 그녀의 말에 주의를 줄 필요는 없었다. 내가 뭐라 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자스민!”
“?”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나 몸을 돌려보니 루시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방금까지 둘이 잘 대화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밖에 나가서 이 도시 구경이나 하자.”
루시는 해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마차 안에 있어서 시간 감각이 무뎌졌었다. 지금은 아침 10시 정도의 이른 시간이었다. 몸에는 피로함이 쌓여있었지만, 지금 잠에 빠지기에는 앞으로 있을 여행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규모가 큰 도시가 아니었기에 이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그런 점이 좋았다.
이곳의 주민이 된 것처럼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들의 추천으로 먹은 여러 음식은 하나같이 일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도시의 여러 가지 것들을 체험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저녁이 되어 있었다.
나는 현재 해안가에 있는 작은 꼬치 가게에 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실시간으로 구워지는 꼬치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춤추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었기에 다른 이들이 말하는 에메랄드빛 바다는 모두 과장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본 바다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바다가 잘그락거리는 보석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살면서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게 될 줄이야. 나는 꼬치를 입에 물면서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았다.
바다에 들어가기에는 살짝 늦은 시간이었지만, 바라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여기 꼬치 맛있다. 웬만한 수도의 꼬칫집보다 나은데?”
내 앞에는 루시가 꼬치를 먹으면서 감상을 말하고 있었다.
“나보다 좋아하는 거 같네.”
벌써 꼬치를 5개나 먹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이런 말이 자동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같이 다니면서 느낀 거지만, 나보다 그녀가 훨씬 이곳의 음식과 문화에 환장하는 것 같았다.
“.........설마.”
“설마가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면서 꼬치를 입에 물었다. 정말 많이 먹네…….
“그렇게 따뜻한 얼굴로 쳐다보지 말지.”
“아, 미안. 내 생각보다 너무 잘 먹어서.”
내 말에 그녀는 내 얼굴을 한번 슥 훑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난 모르겠다.”
“아가씨.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아, 어. 다녀와.”
엘리사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 아마 화장실이겠지.
엘리사는 루시 이상으로 많이 먹었으니까. 내 옆에 놓인 빈 잔만 벌써 몇 개인지 모를 정도였다.
“야.”
옆을 쳐다보고 있을 때, 루시는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걸었다. 그녀의 얼굴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넌 여기 왜 온 거냐?”
“못 봤던 것을 보려고.”
“......어휴.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넌 나중에 언니하고 말이 잘 통하겠네. 우리 언니도 너처럼 뜬구름 잡는 말을 자주 하거든. 물론 네가 우리 언니만큼 이상한 말을 한다는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비슷하다고.”
“언니가 있어?”
“내가 말 안 했나?”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 몸짓에 루시는 머리를 짚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 위로 6살 위에 언니가 하나 있거든? 원래 나름대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느샌가 딱딱하게 변해있더라고.”
이 이후로 그녀의 언니에 대한 말을 10분 동안 들었다. 방심할 때면 그녀는 한 번씩 수많은 말을 쏟아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슬슬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편하기도 했다. 작은 이야기만 해도 수많은 말을 해 주었으니까.
정말로 가이드로써는 딱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