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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88화 (88/120)

〈 88화 〉 모닥불

* * *

내 바램과는 정반대로 포렌치노로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포렌치노는 엘리시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작은 도시되었기에 국경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차 안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루시하고 점점 말을 섞기 시작했다. 그녀의 투머치토커의 기질은 지루한 이동 기간에 활력소가 되어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차 안에서 쉬질 않고 여러 이야기들을 꺼냈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흥미 깊게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엘리사는 내가 루시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그리 좋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내게 따로 언질을 주지는 않았다.

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며 나는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출발하면 저녁이 되기 전에 포렌치노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사는 안전을 확인한다며 어딘가로 가 버렸고 루시는 배고프다고 숲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오랜 이동에 힘들었기에 마부가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길었던 마차에서 해방된다는것이 기뻤지만, 아직 몸으로 체감이 되지는 않았기에 아쉬울 따름이었다.

점점 무너져가는 장작을 바라보는 것은 어쩐지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타들어 가는 불을 보는 것 만으로도 내 마음속은 어쩐지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원래부터 나는 이런 모닥불을 좋아하긴 했다. 회사에서 작업을 할 때도 모닥불 ASMR을 틀어놓고 작업을 했을 정도니까.

도심 속에서 살면서 실제로 모닥불을 볼 기회는 없었는데, 나는 지금 이 상황이 그저 즐거울 따름이었다.

생각해 보면 최근 내 주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중간고사 사건이라던가, 바로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라던가.

어찌 보면 지금 이 여행은 도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 내내 테오도르에만 있기에는 내 정신적으로 좋을 것 같지도 않았고.

나는 내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을 불을 바라보며 태워버리고 싶었다. 지금 나를 감싸오는 모든 것들로 부터 말이다.

“뭐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내 옆에 루사가 양반다리를 하며 앉았다. 긴 고행길에 지칠 만도 하건만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멀쩡해 보였다.

“........그냥 있는 거죠.”

나는 그녀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모닥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나에게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이거 먹을래?”

그녀는 나에게 꼬치를 내밀었다. 조금 전에 어디 갔었나 했는데 그새 동물을 잡았나 보다. 그녀가 내민 꼬치에는 동물의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뇨……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고기에 있는 핏물은 상관없었다. 다만 지금은 뭘 먹고 싶지 않았다.

괜히 자기 전에 먹으면 다음 날에 컨디션도 안 좋고.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고. 나중에 달라고 해도 안 줄 거야.”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나와 엇비슷할 정도로 작은 키와 귀여운 얼굴. 엘리사보다는 노란색에 가까운 밝은 금발.…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단발이 보였다.

겉모습만을 보자면 아직 어린아이 같았다. 침을 삼키면서 꼬치를 모닥불에 굽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치이익—

꼬치가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와 나는 멍하니 꼬치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꼬치를 바라보면서 고기가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내게 있어서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그녀는 다 익은 꼬치를 꺼내 입을 열어 먹기 시작했다. 배고프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꼬치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이 많던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니. 새삼 배고픔이라는 것에 현상에 대해 위대함이 느껴졌다.

“근데, 여기는 왜 온 거야?”

루시는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녀가 먹었던 꼬치에 꽂혀있던 고기는 전부 먹어 치우고 나무 막대기는 모닥불에 장작이 되었다.

이렇게 빨리 먹을 줄이야…. 나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상식적으로 이 시기에 브레토니아의 귀족이 관광하러 온다니. 이상하지 않아?”

“그………. 건가요.”

“당연하지. 게다가 벨리타 자스민이 온다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걸.

그녀는 입을 한번 닦고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한번 말해봐. 이 나라에는 왜 온 거야? 음……… 아 맞아! 설령 네가 이 나라의 약점을 캐기 위해 왔다고 해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한번 말해봐.”

그녀는 햄스터 같은 귀여운 얼굴로 내게 진실을 요구했다. 보통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얼굴을 보면 웬만한 것들을 다 해주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죄송하지만, 정말로 관광을 위해 온 거에요.”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관광을 위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이었지만, 내 옆에서 엄청난 기대를 하는 그녀에게 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옆에서 산타가 없다는 소리를 들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죄책감이 든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했다.

“.......그래?”

그 말을 내뱉는 그녀는 아까보다 우울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 않기 위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그래, 뭐. 네 사정을 들어보면 당연한 거겠지.”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그녀의 모습은 멍한 것을 넘어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

“자스민.”

“네?”

“너 여기에 오래 있을 거지.”

“네…… 거의 한 달 정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나라에는 너를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 넘쳐나거든.”

루시는 한숨을 쉬며 몸을 비틀었다. 무언가에 짜증을 내는 것 같았다.

“아……”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을 끄덕였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포렌치노는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해.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쳐도 네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런 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알려주다니. 내게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루시는 내가 감사 인사를 전하자 놀랐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살다 살다 너한테 감사 인사를 받아볼 줄이야……”

분명 외형은 꼬맹이인데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아까 낮까지는 그녀의 외형에 맞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은 삶에 지친 30대의 말투였다.

그녀의 외형과 말투에서 오는 갭이 내게는 굉장히 이질적이었지만, 신선함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엘리사나 소니아, 노엘같은 경우는 이미 외형부터 성인 같아서 어떤 말투를 쓰던 상간하지 않았지만, 루시는 다른 느낌이었다.

“자스민.”

“네?”

“너도 말 편하게 하면 안 돼? 너 존댓말 쓰는 거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돼.”

“으음……”

존댓말이 불편하다니…. 그런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주제였다.

사실 카밀라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들에게는 말을 편하게 했었지. 하지만 이번 여행의 가이드인 그녀에게 시작부터 반말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존댓말을 했다.

“불편하신가요……?”

“아니…. 꼭 불편하다기보다는 아까도 말했듯이 적응이 안 되는 거지. 나도 너한테 편하게 말하는데 네가 존댓말 하면 뭔가 이상하잖아. 그리고 엘리사가 나를 너무 노려본다고. 솔직히 지금 이러는 게 어이없기……………”

그녀의 말을 들으니 내가 괜히 그녀에게 벽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찌 되었든 이번 여행 동안 같이 지낼 사이인데 말이다.

“그럼, 이제부터…. 말 편하게 할게…….”

나는 어색하게 입을 열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별것도 아닐 텐데 그녀에게 반말은 하는 것은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나는 얼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래, 자스민. 잘 부탁해.”

그녀는 씩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씨.”

“어………. 어?”

다음 날 아침. 이른 아침 출발하고 마차에서 부족한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날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살짝 뜨고 옆을 바라보니 엘리사가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왜에…. 엘리사.”

“도착했습니다.”

나는 엘리사가 열어준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서는 차가운 아침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여름일 텐데도 시원함이 담겨있는 바람을 맞으니 눈이 저절로 뜨이게 되었다.

하얀색과 파란색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테오도르와는 다르게 보는 것 만큼으로도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드디어 포렌치노에 도착했다는 것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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