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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87화 (87/120)

〈 87화 〉 국경

* * *

마차는 돈을 꽤 썼기에 가는 길을 편히 갈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테오도르의 평야를 지나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가 보일 때까지 마차는 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여행을 갈 때 느꼈던 것처럼 내 심장은 조금씩 두근대고 있었다.

데우스 대륙의 중앙에 있는 테오도르기에 엘리시아의 국경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리시아의 국경은 매우 삼엄했다. 성벽 위에 서 있는 군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긴장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최전선에서 근무하는 애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만큼 엘리시아의 병사들은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아마 아가씨 때문일 겁니다.”

“나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 엘리사에게 물어보았다.

“아무리 허락을 받았다고는 해도 아가씨는 브레토니아의 귀족이십니다. 엘리시아의 많은 이들이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을 쓸 것입니다.”

“너무 부담스러운데…….”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저 혼자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사과를 하는 엘리사에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냐, 너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야. 그저 감탄사일 뿐이야.”

두꺼운 국경선에 도착하자 마부에게 병사가 입을 열었다.

“벨리타 자스민이 탄 마차가 맞는가?”

“예, 예. 뭐, 맞습니다.”

“안을 확인해 보겠다.”

그 말을 하고는 병사들은 마차의 여러 곳을 샅샅이 뒤졌다. 우리가 가져온 가방 하나하나의 물품까지 물어볼 정도로 그들은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관광하러 온 거였기에 당당하게 있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다른 마음을 조금이라도 먹었으면 아마 표정에 다 드러나지 않았을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마차를 뒤지더니 짜증 난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국경을 지나면 조그마한 공터가 있을 거다. 그곳에서 가이드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도록.”

“....어느 정도 걸리나요?”

“반나절 안에는 올 거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우리를 내쫓듯이 통과시켰다. 나는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지금은 국경을 수월하게 통과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내가 궁금증을 앞세워 여행에 지장이 생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국경을 지나고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마부는 그곳에 마차는 세운 뒤에 언제 올지 모르는 가이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며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내가 내려 그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휴……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원래 국경을 통과하는 게 이 정도로 까다롭나요?”

“아뇨, 보통은 이 정도까지 힘들지는 않죠.”

그는 담배 연기를 입에서 내 뿜으며 말했다. 그의 담배 연기에는 그의 애환과 피로가 녹아있는 듯 했다.

“아마 고용주님의 신분 덕분인 것 같은데………”

그의 말을 어딘가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같은데?”

나는 그의 말을 따라 하면서 정확한 대답을 요구했다.

“그동안 마부일 을 해 오면서 국경에서 이 정도로 딱딱한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 신분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는 거겠죠. 저쪽에서 가이드를 꼭 붙이고 다니라는 것도.”

그는 나를 나른하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커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보수는 포렌치노에 도착하면 두둑하게 챙겨줄게요…….”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채고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의 말뜻을 요약하자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위험한 일이었으니 추가 보수를 줘라.’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번 일은 단순한 관광 같은 것으로 알고 있던 마부에게는 충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따지거나 짜증을 내는 대신 침착하게 더 많은 보수를 요구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괜히 그가 오랜 시간 동안 테오도르에서 마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침착하고 괜찮은 마부라면 나는 원래 약속했던 금액에 5배라도 낼 의향이 있었다. 그라면 포렌치노로 갈 동안 훌륭하게 마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뭐,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삶이라서요.”

“그것도 그렇겠군요. 제 생각보다 귀족에 삶도 힘든가 봅니다.”

“당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나와 그는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짦은 시간이었지만, 그와 나누었던 얘기는 재미있었다.

서로 많이 보았던 친구들끼리 나눈 필터 없는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그는 나에게 귀족에 대한 편견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면서 평민의 열등감을 내보였다. 나 또한 그에게 귀족의 명에 같은 것 대신 귀족의 명예를 깎아내렸다.

어찌 보면 최고의 짝꿍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로의 위치에서 자신들을 거침없이 폄하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부와 이야기를 끝내고 마차 안에서 가이드를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저기요? 가이드에요!”

머리를 움직여 문을 가리키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엘리사는 짜증이 난다는 듯이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이번 여행 동안 따라다닐 가이드가 맞는 것 같았다.

“아니 문을 왜 안 열어줘요? 저 무시해요? 솔직히 여행하러 왔다고 해서 마음 다잡고 열심히 설명하려고 왔는데 초장부터 무시하면 안 되죠. 위험하다는 언니 말도 씹고 왔잖아요. 안 그래 요? 언니가 자기 말 무시하면 케이크 안 사준댔는데 저는 그것까지 포기하고 온 거라고요. 안 그래도 엘리사 당신이 그렇게 집착하는 벨리타 자스민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었는데 지금이 딱 기회일 것 같았거든요. 솔직히 엘리사 당신 항상 입에 아가씨, 아가씨 붙이고 다녔—”

벌컥—

“악!”

보다 못한 엘리사는 문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엘리사가 문을 열어젖힐 것이라는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문밖에서는 처음 듣는 이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야야……….”

그녀는 널브러져 있는 사람은 이마를 문지르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엘리사를 쳐다보았지만, 엘리사는 바닥을 뒹구는 그녀를 끔찍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마치 바퀴벌레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랄까.

“엘리사,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내가 너희 신경 쓰려고 굳이 여기까지 왔는데.”

“닥쳐. 네가 정말로 신경을 쓴 거라면 여기에 있으면 안 되지.”

“정말 말이 정말 끔찍하게 정말 심하시네요. 사람 상처받게.”

“하…………”

나는 서로에게 오가는 말을 들으니 내 머리가 어지러워 지는 것 같았다. 엘리사가 정말 싫어할 스타일과 그것을 알면서도 다가서는 사람이라니.

“내가 안 반가운 거야?”

“반갑겠냐. 미친년아?”

“너무 부끄럼을 타는 것도 안 좋다니까~”

“개…씨발……”

이야… 엘리사가 저 정도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줄이야……. 나는 엘리사와 그녀가 더욱 싸우기 전에 나는 그들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어…… 안녕하세요?”

나는 그들의 중간에서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허어………. 안녕?”

그녀는 나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훑어보더니 씩 웃으면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야…… 정말 사람이 달라졌네.”

그녀는 누워있던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나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루시라고 부르면 돼.”

그녀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스민이라고 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대꾸했다. 이 세계에서 누군가와 정식으로 악수를 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긴장이 되었다.

내 손에 땀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이번 여행 동안 확실하게 가이드역할을 해 줄게. 사실 내가 이 왕국에서 모르는 게 없는 몸이거든. 네가 원한다면 그 유명한 이 나라의 대마법진을 보여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나에게 물어보라고.”

그녀는 폭격기처럼 자신이 할 말을 쏟아내었다. 내가 그녀의 말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잘 지내보자는 뜻이었던 것 같았다. 아마.

“첫 번째 목적지가 어디라고 했지?”

“포렌치노요.”

“아, 포렌치노로! 정말 아름다운 도시지. 평범한 관광객들이 오는 평범한 곳이 아닌 조용하고 따뜻한 곳이야. 사실 엘리시아의 관료들도 은퇴하면 대부분 그곳에 가고 싶어 한다고. 그곳에 비어있는 저택 대부분은 귀족들의 별장일걸?”

와…………. 진짜 말 많다.

나는 그녀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하면 그녀는 내게 여섯 마디 이상으로 답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에 저런 이들이 없었기에 더더욱 무서웠다.

빨리 포렌치노나 가고 싶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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