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호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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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 초원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떠 있는 구름과 부유 섬들이 만드는 광경은 내 마음에 구멍을 내는 것 같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니 느껴지는 감각은 시원함과 공허함이었다. 결국 나는 이 큰 행성의 작은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에 차가운 공허함이 느껴졌다.
지금 내게 불어오는 바람은 내게 딱 적절했다. 내 눈을 닫히게 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고, 바람의 세기가 약하지도 않았다.
딱 나 자신이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바람이라고 해야 할까. 손가락에 의식을 집중하면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집중해 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내 눈앞에서 부유섬이 떠다녔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구름보다는 느리지만, 천천히 부유섬은 테오도르를 중점으로 공전하고 있었다.
어째서 부유섬은 테오도르를 중점으로 공전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들은 궁금증이 들이닥쳤다.
나는 이런 것이 왜 궁금할까. 어차피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봤자 진실에 다가갈 수 없는 물음일 텐데.
아니, 궁금한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가만히 누워있는데 무언가 떠다닌다면 그것에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는 거지.
나는 오른손을 들어서 내 목에 흘렀던 피를 닦아내었다. 내가 만든 얼음 조각이 내 목을 살짝 찔렀던 모양이었다.
찔린 줄은 몰랐다. 내 피부 근처에만 다가왔다고 생각했지, 내 피부를 뚫고 찔렀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그도 내 목에 피가 나는 걸 보고 멈추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의 반응을 보면 내 생각은 정답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다. 내가 생각도 하지 않은 부분에서 뜻하지 않은 효과를 거둔 셈이니 말이다.
광활하다.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흐린 하늘, 가끔씩 나타나는 부유섬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만 해도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대륙에는 얼마나 더 많은 지형지물이 있을까. 평범한 소년이 노인이 될 때까지 전부 알 수 없을 정도겠지.
끝이 보이질 않는 마라톤의 시작점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어디로 이어질지, 얼마나 나아갈지 알 수 없는 끝없는 마라톤 말이다.
이대로 내가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발을 내밀 때마다 나는 수많은 일들에 휘말리겠지.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그놈의 여신님 타령 같은 거 말이다. 내가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그들은 나를 향해 다가올 것이다. 내가 이 몸에서 살아 숨을 쉬고 있는 한.
피곤하겠지. 내가 이대로 숨만 쉰다고 해도 나, 아니 자스민을 노리는 사람들은 찾아올 게 분명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지금 죽는 게 편한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수 없이 원해 왔던 목표였다. 지금 눈을 감으면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눈을 감았다.
날카롭던 바람은 나를 안아주는 유모 같았다. 차갑다고 생각했던 이곳의 온도 또한 지금은 따뜻했다.
“아가씨.”
그때 내 위에 누군가 나타났다. 내 눈가 위에 들이닥친 그림자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엘리사.”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나에게 붙어서 내가 괜찮은지 살피기 시작했다. 내 주위를 맴돌면서 내 건강을 살피는 그녀를 바라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엘리사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나는 엘리사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엘리사. 나는 저 부유섬 으로 데려가 줄래?”
“...........”
많은 일이 있었다. 나에게는 저번에 있었던 일 만큼,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테오도르 지하감옥을 테러하고 나를 납치하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보다 이 사건은 크게 언급되지 않았다.
테오도르 측은 지하감옥을 습격한 주동자는 처음 잡혀 왔던 검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설명했다.
그 어디에도 내가 봤었던 타이렌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같이 모두가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다 저렇다 하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흘러만 갔다.
나는 속에 많은 물음을 삼키고 있었다.
타이렌의 정체는 뭘까? 타이렌과 엘리사는 무슨 관계일까? 타이렌은 어째서 엘리사를 보고 망국의 공주라고 불렀을까? 타이렌의 몸이 여러 개라는 말이 사실일까? ‘씨앗’은 뭘까? 왜 나를 여신님이라고 부르는 걸까?
너무 많은 질문이 내 안에 쌓이자 나는 오히려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질문이 높은 파도가 되어 나를 향해 내리치자 나는 헤엄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열심히 헤엄쳐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가만히 있는 게 편했다.
그냥 그때 얼음 조각을 목에 박아 넣을걸.
하지만 나는 그때 얼음 조각을 목에 박지 않았다. 또한 그날 완전히 눈을 감지도 않았다.
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자살하고 싶은 내 욕망을 이길 정도로 말이다.
웃기긴 했다. 호기심이라니.
내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은 때 묻지 않은 호기심이었다. 처음 보는 장난감을 보는 아이같이, 내 시선은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문 밖에 보이는 테오도르와 그 밖의 평야를 바라보았다.
나는 최근에 테오도르의 평야를 집적 가 보았다. 느낌은 좋다기보다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원에 누워 생각에 잠겨있는 그 시간이 행복했다. 앞으로도 이런 시간이 더 많아지면 좋으련만.
더 많은 세계를 보고 싶었다. 테오도르뿐만이 아니라 이 대륙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보고 싶었다.
기껏 온 판타지 세계 아닌가. 기왕 오게 됐으면, 조금은 예정을 미뤄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가씨.”
“.........왜요.”
내 옆에는 환한 웃음을 짓는 카밀라가 앉아 있었다.
“몸은 괜찮아?”
그녀는 내 왼쪽 팔을 쓸면서 말해왔다.
카밀라는 그날 이후로 꽤나 얼굴을 많이 비췄다. 잠깐이라도 엘리사가 자리를 비우면 카밀라가 그 자리를 꿰찼다.
처음에는 그녀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나름 익숙해졌다. 여전히 그녀가 무슨 수를 써서 이곳에 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끈적하고 요염한 말투에 고개를 돌려보면 어느새 그녀가 자리해 있었다. 이 정도면 엘리사랑 같이 내 메이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뭐……. 많이 나아졌어요.”
내 몸은 평범하게 나아지고 있었다. 중간고사 이후로 마법을 과도하게 사용할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 몸은 순조롭게 정상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오른팔은 완전하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오른팔을 제외하면 거의 다 나았다고 될 정도였다.
“다행이네. 우리 아가씨가 아파하는걸 보는 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아? 우리 아가씨 갖다주려고 유물이나 가져올까 생각했다니까.”
“네……… 뭐,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떨떨하게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요즘 들어 그녀는 내게 이런 식으로 주접을 떠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에 이런 말을 하는 그녀를 보고 ‘뭘 잘못 먹었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카밀라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그녀의 이런 말에 질색했으나, 이제는 그녀의 말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는 그녀의 이런 말에도 평범한 말처럼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아가씨는 따로 계획 있어?”
“계획이요?”
계획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지.
“곧 방학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는 곧 있으면 방학이었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많이 지났구나.
“글쎄요……. 한적하게 관광이나 하려고요.”
방학 때의 목표를 세워본다면 나는 관광을 하고 싶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어디?”
“으음……”
굳이 갈 곳을 생각해 보자면 남쪽의 엘리시아 제국을 가 보고 싶었다. 따스한 햇볕과 에메랄드빛의 바라가 있다고 하는 곳이었다.
여름방학이라는데 한번은 해변에 가야 하지 않을까.
“엘리시아 쪽이요. 한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카밀라는 내 말을 한번 듣더니 나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의외네. 우리 아가씨는 그런 곳에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제가 어떤 이미지인데요.”
나는 카밀라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으음……. 강가에서 침몰하는 배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
“그게 뭐예요………”
전혀 알 수도 없는 대답이 나와 버렸다.
“그만큼 아가씨가 위태롭다는 거지.”
그녀는 말을 그렇게 넘기며 내 손을 매만졌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내 손을 만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가씨, 방학 잘 보내고 와.”
“당신은 계속 여기에 있을 거예요?”
“뭐, 그렇지.”
그러고 보니 카밀라는 테오도르에 무언가 꿍꿍이가 있었지. 처음에는 그 사실이 무서웠으나, 이쯤 되니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래, 내 삶도 어련히 알아서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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